실수투성이여도 괜찮아
#풀타임 워커로 산다는 건
뉴질랜드에서의 서른 번째 날
오늘은 정신없이 일하고 계속 일하고 쉬지 않고 일한 풀타임 워커로써의 하루다. 신랑도, 나도 정말 일만 했다. 워킹홀리데이 온 사람다운 삶을 살고 있는 것 같다. 홀리데이를 위한 워킹데이. 오늘 신랑은 9시 출근, 나는 10시 출근이어서 똑같이 7시 30분에 알람을 맞춰놓고 일어났다. 물론 겨우 일어났다. 그래도 아침을 든든하게 먹고 출근하면 좋을 것 같아서 신랑이 먼저 씻을 동안 부랴부랴 아침식사를 준비했다. 바게트 빵과 베이컨 그리고 따뜻한 커피 한잔이면 충분하다. 신랑이 먼저 출근했다. 나보다 먼 곳에서 근무하는 신랑은 차를 가지고 출근했다. 출근시간이 되어 걸어서 스시집까지 걸어가는데 비가 부슬부슬 왔다. 그래서 우산을 쓰고 나갔는데 이게 왠 걸, 분명 비가 오는데 사람들이 다 우산을 쓰지 않고 비를 맞고 걸어간다. 정말 한참 고민했다. 우산을 쓰면 안 되는 건가? 일정량 이상 비가 올 때만 우산을 쓰는 건가? 나만 비가 온다고 느껴지나? 몰래카메라 하는 줄 알았다. 분명 비가 내리고 있는데 스시집까지 걸어가는 20분 동안 우산을 쓴 사람은 나 밖에 없었다. 신기한 경험이었다. 그렇게 일을 시작했다. 신랑은 9시부터 3시 30분까지, 나는 10시부터 4시까지. 신랑은 그저께 일하다가 밥솥에 팔을 데어왔다. 신랑이 하는 일이 스시만들때 가장 중요한 밥 짓는 일이라서 그런가 보다. 나는 오늘도 눈치 보느라 눈동자를 요리조리 굴렸다. 눈이 아플 정도다. 역시 사람은 눈치가 있어야 한다고, 눈치만 있으면 뭐든 칭찬받는 것 같다. 오늘도 나는 씨푸드 메뉴 담당이다. 씨푸드 메뉴는 오전에 만들어놓고 소량은 냉장고에 보관하고, 소량은 냉장판매대에 진열해놓는다. 낮 12시가 되기 전에 모든 메뉴가 완성이 되어야 그 이후에 캐셔업무를 내가 맡아서 볼 수가 있는 시스템이었다. 그래도 오늘은 12시 전에 나와야 하는 씨푸드 메뉴를 깔끔하게 완성했다. 내가 만든 스시를 사가는 손님들을 보면 정말 뿌듯했다. 오늘은 수첩도 가져가서 받아쓰기하듯이 적어내려 갔다. 이걸 적어놓지 않으면 앞으로 너무 힘들 것 같다는 생각에 눈치껏 행동했다. 12개가 넘는 씨푸드 메뉴마다 그람수도 다르고, 넣어야 하는 소스 양도 다르고, 데코레이션 방법까지 다르다. 심지어 제조시간을 표시하고, 유통기한을 표시하는데 메뉴마다 유통기한이 달라서 무조건 적어놔야 했다. 한 번에 외울 수 있는 양이 아니었다. 적기는 했는데 이것을 어떻게 머릿속에 넣어야 할지는 아직 모르겠다. 오늘부터 캐셔업무도 함께 보기 시작했다. 물론 아직 왕 초보기 때문에 서브 역할이지만 카운터에서 캐셔를 하면 영어 사용이 훨씬 많아지는 것 같아서 좋았다. 아직은 손님이 오면 두려움이 더 크지만 극복해내야 할 것 같다. 그래도 내가 일을 배우고 있다는 뱃지를 달고 있어서인지, 사람들이 아무 말하지 않고 내가 천천히 해나갈동안 기다려준다. 한국이었으면 욕먹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한국이었으면 이렇게 겁먹지 않았겠지만. 정신없이 하루가 지나갔다. 어느덧 퇴근시간. 나보다 30분 먼저 퇴근한 신랑은 나를 데리러 오기 전에 공원에 앉아서 분위기 있게 스시를 먹었다고 한다. 둘 다 스시집에서 일하다 보니 스시는 원 없이 먹을 것 같다. 신랑은 스시에 들어가는 밥을 할 줄 알고, 나는 스시를 만들 줄 아니까 우리 둘이 힘을 합하면 스시를 다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다. 뉴질랜드에서의 낯선 시작이 어느덧 30일이 되었다. 시간이 참 빠른 것 같다. 풀타임 워커로 일도 시작했고, 정신없이 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처음엔 그저 무모한 것 같고 두려웠는데 이제는 새롭게 시작된 이 삶을 조금 즐겨보려 한다.
뉴질랜드에서의 서른아홉 번째 날
오늘의 일기. 12시간 동안 서서 일하고 왔더니 눈이 감기고, 나른하고, 다리는 아프고. 안 쓰기엔 찝찝해서 쓰기 시작했다. 오늘은 스시가게가 제일 바쁘다는 금요일. 그 금요일이 왔다. 나도 신랑도 출근하는 날인 데다가 출근이 빠른 날이다. 신랑은 8시 30분 출근이고 나는 8시 출근. 알람을 6시 50분에 맞춰놓았는데 일어나서 시계를 보니 7시 18분이다. 응? 아침에 이렇게 못 일어날 것을 예상하고 어제 머리를 감고 잔 건 정말 잘한 일 같다. 덕분에 세수하고, 양치만 하고 출근 준비를 마쳤다. 모자를 쓰고 일하다 보니 화장도 신경 안 써도 되고 참 좋은 것 같다. 가게에 도착해서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일을 시작했다. 오늘은 누구의 도움도 없이 씨푸드 메뉴를 나 혼자 준비했다. 내가 일하는 위치가 카운터랑 가까운 쪽이라 손님들이 올 때마다 하던 일을 멈추고 장갑을 벗고 캐셔업무를 보고, 다시 장갑을 끼고 일하고. 손님이 계속해서 오는 금요일이라 씨푸드 준비가 조금 늦어졌다.
손님 피크타임이 지나가고 찾아온 쉬는 시간은 정말 꿀맛 같았다. 아침에 바나나 한 개 먹고 출근해서 여기저기 뽈뽈거리며 돌아다녔더니 너무 배가 고팠다. 그래도 갓 지은 따뜻한 밥을 챙겨주셔서 밥에 새우, 아보카도, 치킨 올리고 데리야끼 소스 뿌려서 나만의 점심을 완성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구성하기도 했지만 뭘 먹어도 맛있었을 시간이라 정말 맛있게 먹었다. 오후 시간에는 나와 '유이'라는 일본 친구와 단둘이 가게를 봐야 했다. 유이한테 너무 미안했다. 난 아직 왕초보라서 나와 함께 일을 하려면 유이가 정말 고생한다는 걸 알아서 조금이라도 빠릿빠릿하게 행동하려고 정말 노력했던 하루였다. 그래도 오늘 12시간 일하는 건 너무 무섭고 두려웠는데 생각보다 잘 지나갔다. 유이라는 친구가 너무 착하고 친절한 친구라서 그랬을 수도 있다. 다음 주는 데이지라는 중국 친구와 함께하는데, 데이지는 조금 까칠하고 예민한 편이라 벌써부터 겁이 난다. 눈치로 하루를 버텨냈다. 오늘 아침 8시부터 저녁 8시 15분까지 일을 했더니 다리가 부서질 것 같다. 이렇게 일하는 날이 있으면 또 노는 날도 있겠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어놓고 일을 했는데 12시간 일하는 동안 5KM를 걸었다고 떴다. 정말이지, 미친 하루다.
뉴질랜드에서의 마흔세 번째 날
뉴질랜드로 온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벌써 43일이 되었다. 시간이 너무 빠른 것 같아서 무서울 정도다. 그래도 지금 이 시간들을 마음껏 누리고, 많은 것을 보고 배워서 돌아가야겠다는 다짐이 생긴다. 오늘은 화요일, 신랑도 나도 풀타임 워커로 살아간 날이다. 신랑은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 나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8시 15분 마감까지다. 신랑이 9시까지 출근하려면 7시 30분에는 일어나야 하는데 오늘도 역시나 8시가 다되어갈 때 겨우 일어났다. 아침에 일어나는 건 왜 이렇게 힘든지 모르겠다. 신랑 컨디션이 좀 안 좋아 보여서 페퍼민트차를 따뜻하게 챙겨줬다. 감기 기운이 있는지 어제부터 머리가 아프다고 하던데 오늘도 컨디션이 별로인가 보다. 해외에서 아프면 답 없는데 얼른 나으면 좋겠다. 신랑보다 출근시간에 여유가 있어서 빨래까지 하고 출근했다. 날씨가 너무 좋아서 어딘가로 놀러 가고 싶은 기분이었다. 출근을 위해 걸어가는 시간 동안 이 날씨를 만끽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
오늘도 나는 씨푸드 파트를 담당했다. 지금까지는 매니저님이 만들어야 하는 개수들을 미리 파악하고 알려주셨는데 오늘부터는 내가 직접 판매개수를 파악해서 만들어야 했다. 너무 부족하지 않게 그렇다고 과하지도 않게 판매수량을 정한다는 건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었다. 12시 전에 모두 만들어져야 하는 씨푸드, 오늘따라 가게가 왜 이렇게 바쁜 건지 또 왜 이렇게 아무도 날 도와주지 않는 건지 힘들었다. 캐셔와 씨푸드를 함께 해야 하다 보니 손님이 올 때마다 하던 일을 멈추고 계산하고 다시 하던 일을 시작했다.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래도 너무 늦지 않게 씨푸들 만들어냈다.
오전을 정신없이 보내고 점심을 챙겨 먹었다. 요즘 아보카도에 푹 빠져있다. 뉴질랜드 사람들은 아보카도를 진짜 즐겨먹는 것 같다. 처음에는 이런 걸 왜 먹지? 무슨 맛으로 먹지?라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나도 이유모를 아보카도의 매력에 푹 빠져서 밥 먹을 때마다 아보카도를 챙겨 먹고 있다. 사람은 역시 적응하기 나름인가 보다. 오늘의 하이라이트는 오후 시간이었다. 점심을 먹은 후부터 나와 데이지라는 중국 친구와 함께 단둘이 마감을 하는 날이다. 3시부터 마감시간까지 데이지와 나뿐이었다. 데이지라는 친구는 중국인이고 말이 정말 빠르다. 그리고 예민하고 까다롭다. 싫은 티를 팍팍 낸다. 오늘 느낀 건 데이지는 나를 싫어하나 보다. 물론 귀찮기야 할 것 같다. 아직 초보라서 나와 단둘이 마감을 하면 부담이 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3시가 되자 내가 해야 할 일을 종이 두장에 걸쳐서 적어서 주는 데이지의 모습을 보며 화가 났다. 이런 거 없어도 잘할 수 있는데 나를 못 믿는 건가 싶은 마음과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오늘의 목표는 데이지보다 한발, 두발 앞서 나가는 것으로 정했다. 데이지가 시키기 전에 움직이기가 목표였다. 그 결과는 대성공이다. 한 번도 웃지 않았던 데이지가 웃었다. 그렇다고 일이 수월했던 건 아니다. 실수투성이였던 하루다. 정말 많은 일이 있었는데 그중 첫 번째는 나름 손님이 고른 스시를 미리 팡가 하고 계산하기 위해 포스기에 찍었다가 손님한테 낚였다. 손님이 스시 사겠다며 큰소리로 얘기하고 들고 있길래 당연히 사겠거니 하고 포스기에 이미 그 스시를 찍어놨는데 마음이 바뀌었는지 그 스시를 구매하지 않았다. 나는 그걸 모르고 이미 포함시켜서 계산했을 뿐이고. 그래서 데이지한테 굽신굽신 했다. 나는 결제를 취소하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데이지가 웃으면서 해결해주었다. 두 번째 실수, 매 시간마다 미소(된장국)의 온도 체크를 한 후 기록해놔야 한다. 그것이 나의 또 다른 업무였다. 내가 쉬는 시간을 가졌을 때 누군가가 미소 온도 체크를 했어야 했는데 아무도 안 해주었다. 바빴을 거라는 걸 잘 알지만 결국 욕먹는 건 나다. 세 번째 실수, 손님이 하는 주문 못 알아듣기. 이건 답이 없는 실수다. 가게 특성상 손님이 원하는 대로 스시를 새로 만들어주기도 한다. 알레르기 있는 사람이 많기도 하고, 각자 원하는 메뉴가 다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오이 싫어하는 사람이 김밥에서 오이 빼 달라고 하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아보카도를 더 넣어달라, 파프리카 빼고 당근 넣어달라 등등. 초집중을 하고 귀를 쫑긋하지만 그래도 못 알아들으면 데이지를 부를 수밖에 없다. 오늘 SORRY SORRY만 몇 번을 했는지, 백만번은 했을 것 같다. 그래도 잘한 일도 있다. 한국인 손님이 와서 영어로 이것저것 주문하는데 직원 모두가 아무도 그분의 영어를 못 알아들었다. 그리고 직원들이 나를 애타게 찾았다. 그래서 나는 한국어로 주문받고 스시만드는 사람에게 영어로 통역을 했다. 너무나도 뿌듯한 순간이었다. 이렇게 오늘의 폭풍 근무도 마무리가 되었다. 실수투성이였지만 그래도 뿌듯한 하루인 것 같다. 데이지와 친해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