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금으로 뭘 할 수 있을까

통장 앞에서 하는 인생 계산

by 캔디작가

퇴직금 정산 내역서가 메일로 왔다.


열어보기가 무서웠다. 마치 건강검진 결과지를 열어볼 때처럼. 숫자 하나에 내 20년이 정리된다는 게 이상하게 느껴졌다.


클릭했다.


4,200만원.


20년 근무, 퇴직금 4,200만원. 여기에 위로금 명목으로 얹어준 600만원. 총 4,800만원.


많은 건가, 적은 건가. 솔직히 모르겠다. 1년에 240만원씩 적립된 셈이다. 한 달에 20만원. 그렇게 생각하니까 갑자기 초라해졌다. 밤새 야근하고, 주말에 출근하고, 아이들 얼굴 못 보면서 일한 대가가 한 달에 20만원이라니.




\계산기를 꺼냈다.


우리 집 한 달 고정 지출. 전세 대출 이자 45만원, 관리비 15만원, 통신비 20만원, 보험료 35만원, 큰애 학원비 80만원, 둘째 학원비 60만원, 식비 100만원, 교통비 20만원, 기타 잡비 30만원...


405만원.


남편 월급이 380만원이다. 내 월급이 320만원이었으니까, 둘이 합쳐서 700만원. 거기서 405만원 나가고, 나머지로 저축하고 가끔 외식하고 그랬다.


근데 이제 내 수입이 0원이 됐다.


380만원에서 405만원을 빼면? 마이너스 25만원. 매달 25만원씩 적자다. 퇴직금 4,800만원을 매달 25만원씩 까먹으면... 계산기를 두드렸다. 192개월. 16년.


16년이면 내가 예순셋이다. 그때까지 아무것도 안 하고 버틸 수 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아이들 대학 등록금은? 결혼 자금은? 우리 노후는?


계산기를 내려놓았다. 숫자가 머릿속에서 빙빙 돌았다.




저녁, 남편과 마주 앉았다.


"퇴직금 나왔어."


"얼마야?"


"4,800만원. 위로금 포함해서."


남편이 고개를 끄덕였다. 많다는 건지 적다는 건지 표정으로는 알 수 없었다.


"일단 급하게 쓸 데는 없으니까... 천천히 생각해 보자."


"천천히?"


목소리가 높아졌다. 또.


"천천히 생각할 여유가 없어. 내 수입이 없어졌잖아. 매달 적자야."


"알아, 알아. 그래도 당장 굶는 건 아니잖아. 일단 몸부터 추스르고..."


"몸은 괜찮아. 수술한 지 한 달 넘었어. 나 일할 수 있어."


남편이 한숨을 쉬었다. 그 한숨이 싫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뻔히 보이니까.


"그냥... 쉬면 안 돼? 20년 일했잖아. 좀 쉬어도 되잖아."


"쉬면서 뭘 해? 집에서 빈둥거려? 애들 학원비 아빠 월급으로 다 감당할 수 있어?"


남편이 대답을 못 했다. 나도 안다. 감당 못 한다는 거. 근데 나보고 쉬라니.


"나 일하고 싶어. 쉬고 싶은 게 아니야."


그 말이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말하고 나서 깨달았다.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뭔지. 돈 때문만이 아니었다. 나는 일하고 싶은 거다. 20년 동안 쌓아온 게 있는데, 그걸 그냥 내려놓고 싶지 않았다.


남편이 나를 봤다. 뭔가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알았어. 네가 원하면."


그 말이 고마우면서도 씁쓸했다. '네가 원하면'. 원하지 않아도 해야 하는 건데.




밤에 잠이 안 와서 핸드폰을 켰다.


검색창에 '40대 후반 재취업'이라고 쳤다.


기사들이 쏟아졌다. '40대 재취업, 하늘의 별 따기', '중장년 취업난 심각', '경력단절 여성, 갈 곳 없다'...


기사를 읽을수록 가슴이 답답해졌다. 통계가 나왔다. 40대 이상 재취업 성공률 23%. 그나마도 대부분 비정규직이나 단순 노무직이라고.


나는? 20년 경력 영상 편집자. 프리미어, 에펙, 포토샵 다 할 줄 안다. 촬영도 하고 기획도 한다. 이 정도면 어디 가서 안 쳐줘?


근데 댓글들을 보니까 현실은 달랐다.


'경력 많으면 오히려 안 뽑아요. 연봉 높게 줘야 하니까.'


'40대 넘으면 면접도 안 불러요. 서류에서 거르더라고요.'


'차라리 경력 숨기고 신입으로 지원하는 게 나아요.'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천장을 봤다. 병원 천장이랑 똑같이 하얗다. 그때도 이랬지. 누워서 천장 보면서 '내가 뭘 하고 살았지' 생각했었지.


근데 그때는 암이라도 이기면 됐다. 지금은 뭘 이겨야 하는 거지?




다음 날 아침.


아이들이 학교 갈 준비를 한다. 큰애는 여전히 말이 없고, 둘째는 뭔가 눈치를 보는 것 같다.


"엄마, 오늘 회사 안 가?"


시우가 물었다. 순간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엄마 요즘 좀 쉬는 중이야."


"아, 수술해서?"


"응, 그래. 수술해서."


거짓말은 아니니까. 반쯤은.


시준이가 현관에서 신발 신다가 뒤돌아봤다.


"엄마."


"응?"


"...아니야."


그리고 나갔다. 뭘 말하려던 걸까. 요즘 그 애가 가끔 나를 본다. 뭔가 말하고 싶은 것 같은 눈으로. 근데 항상 '아니야'로 끝난다.


현관문이 닫히고, 집이 조용해졌다.


텅 빈 거실에 혼자 서 있으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20년 동안 이 시간엔 항상 회사였다. 7시 30분에 나가서 저녁 7시, 8시에 들어오고. 주말에도 가끔 나갔고. 집에 이렇게 혼자 있는 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안 난다.


소파에 앉았다. 뭘 해야 하지? 청소? 빨래? 그건 주말에도 했는데. 지금 해야 하나? 아, 이력서. 이력서를 써야지.


노트북을 켰다. 이력서 양식을 다운받았다. 커서가 깜빡인다.


이름: 오금이

생년월일: 1978년 3월 15일


거기서 멈췄다. 생년월일. 1978년생. 만 47세.


이걸 쓰는 순간 서류에서 걸러지겠지. 아까 본 댓글처럼. '40대 넘으면 면접도 안 불러요. 서류에서 거르더라고요.'


그래도 써야지. 안 쓰면 시작도 못 하니까.


경력사항을 채워나갔다. 코러스미디어 20년. 프로젝트 수십 개. 공모전 수상 3회. 대용량 영상 편집, 모션그래픽, 촬영 감독...


쓰다 보니 생각보다 많았다. 내가 한 일들. 보고서에는 '담당: 박현수'로 올라갔지만, 실제로 손댄 건 전부 나였다.


갑자기 화가 났다. 이 경력이 왜 내 이름으로 안 남아있는 거지? 왜 나는 '팀원'으로만 적혀있는 거지?


책상 서랍을 열었다. 어제 가져온 USB가 있다. 이 안에 진짜 내 이름이 있는 파일들.


아직 이걸 어떻게 할지는 모르겠다. 근데 언젠가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력서를 완성했다. A4 두 장.


프린트해서 보니까 그럴듯해 보였다. 20년 경력, 수상 이력, 보유 스킬. 나쁘지 않은데? 이 정도면 어디서든 써주지 않을까?


근데 맨 위에 적힌 숫자가 눈에 밟혔다. 1978년.


그래. 문제는 이거지. 경력이 아무리 많아도 나이가 많으면 안 뽑는다고 했으니까.


그래도 해봐야지. 안 해보고 포기할 순 없잖아.


구인 사이트에 접속했다. '영상 편집'으로 검색했다. 채용공고가 쏟아졌다. 하나씩 열어봤다.


'신입/경력 무관, 단 35세 이하'


다음.


'경력 3~5년, 연봉 협의'


이건 될까? 근데 '3~5년'이라는 게... 20년은 너무 많은 건가?


다음.


'영상 편집 프리랜서, 건당 50만원'


50만원. 한 달에 몇 건을 해야 생활이 될까. 계산기를 다시 두드렸다. 최소 8건. 한 달에 8건이면 일주일에 2건. 가능한가?


일단 지원 가능한 곳에는 다 지원했다. 10곳. 이 중에 하나라도 연락 오겠지.


오겠지?


(다음 화에 계속)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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