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비뚤어진 회사원의 친구
2019.09.23. 100일 글쓰기 #20
나도 어지간히 문구점 가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최근 들어서 처음 사본 물건이 있다. 레터 오프너. ㅎ가 일본에 가기 전에 같이 어느 문구 편집샵에 갔다가, 할인 코너에서 구경을 하는데 레터 오프너가 색도 예쁜데 가격이 꽤 싸더라. 언젠가는 가져보고 싶었던 물건인데 부담 없이 써볼 수 있을 것 같아서 두 가지 색을 샀다. 터콰이즈 색과 버건디 색.
집에는 산뜻하게 터콰이즈 색을 두고 회사에는 버건디 색을 두었다. 피 묻은 칼과 같은 색의 레터 오프너. 회사에서 항상 호전적이고 공격적이며 어둠에 물든 내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다. 물론 그런 의미로 불그죽죽한 플라스틱을 가져다 둔 줄은 아무도 모른다. 펜코 코멧 오프너, 가격은 3~4천 원대. 한국 문구 편집샵에도 종종 팔고 일본 케이분샤 문구코너에서도 살 수 있다. 색은 다양하다.
오늘도 어김없이 화를 내다 집에 돌아왔다. 월요일부터 야근이라니 개빡세다. 하지만 계속 이랬기 때문에 야근 자체에는 별 감흥 없음. 순간순간이 개빡칠 뿐이다. 업무 특성상 잡일이 정말 많다. 잡일 없는 업무가 있긴 있을까? 사실 모든 일은 잡일을 하는 것이 아닐까? 모든 일은 잡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아닐까?
내 주요 잡일 중 하나는 우편함 비우기다. 부서원들 앞으로 온 우편물들을 가져다준다. 난 막내니까. 나도 언젠가 후배가 들어오면 이 일을 시키겠지. 한 명씩 가져오는 게 비효율이니 한 명이 정해서 가져오는 거야 뭐 이해한다. 그리고 비교적 쉬운 잡일이므로 내가 하게 되는 것도 별 불만은 없다. 귀찮아서 조금 태만하게 할 뿐. 늦게 가져온다고 혼내는 사람이 없어 다행이다. 4일간 성실하게 하고 하루 이틀 빼먹은 척하는 방식을 쓰고 있다.
이 업무에서 중요한 것이 바로 이 레터 오프너다. 분명 팀장 이름으로 온 우편물인데 누가 봐도 잡것이다 싶을 때에는 그냥 내가 뜯어서 확인해보는데, 쓸모가 조금이라도 있어 보이면 놔두고 전혀 없으면 빠르게 찢어서 버린다. 쿨하게 쓰레기를 치우는 척 하지만 사실은 약간 성질머리를 드러내고 있다. 상사 뒤통수 뒤에서 북봑봑. 니들이 아무도 신경 안 쓰는 루틴을 나는 오늘도 시작하고 있봑봑.
그러다 어느 날은 공문이 왔는데 내가 거침없이 뜯은 나머지 공문 한 귀퉁이가 10cm가량 뜯어졌다. 얼기설기 붙이고 튀었는데 선배가 하필 그 공문을 보고 업무를 정리하자고 말을 꺼냈다(그냥 의례적인 공문인 줄 알았는데 업무에 필요한 것이었다). 민망해진 나는 빠르게 잘못을 실토했고 별 일 없이 넘어갔다. 그 뒤로 레터 오프너를 쓰기로 했다.
손으로 북봑봑 찢는 것도 일이다. 예쁜 도구가 있다면 사서 마음껏 쓰면 된다. 특히 그게 적장의 목을 따 멱에서 철철 흐르는 피 색이라면 더할 나위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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