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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나 Jan 07. 2020

사물 쓰기, 6. 영양제

건강을 지키며 어른흉내를 낸다는 것은


2019.09.06 100일 글쓰기 #14



벌써 작년이 된 일이다.


탕비실에서 정수기 물에 비타민(3정)을 삼키고 있는데, 상무님이 들어왔다. 무슨 약을 먹냐, 어디 몸이 안 좋냐는 말에 '그런 것은 아니고요 비타민을 먹었어요 요즘 눈이 침침한 것 같아요' 라며 둘러댔다. 평소 침착하고 젠틀한 모습을 유지하려 애쓰는 상무님은 갑작스럽게 흥분하며 "아니 이게 무슨 소리냐 눈이 침침하다니 그게 지금 내 앞에서 할 소리냐" 외치며 운동으로 단련한 몸을 파르르 떨었다.


입사 후 1년 하고도 6개월이 지났지만 이 사람이 이렇게 파르르 떠는 모습은 그 전에도 그 후로도 절대 볼 수 없었다. 술에 잔뜩 꼴으면 온 세상의 모든 것을 귀여워하는 주사를 가진 이 사람이 그렇게 제정신인 채로도 부들부들 열폭하는 모습은 전혀 본 적이 없다. 진취적임과 트렌디함을 추구하는 그가, 인성만은 누구나 인정하는 그가, 대머리도 웃어넘기는 그가, 막을 수 없는 노안에 그렇게 분노하다니. 노안이란 무엇인가. 침침이란 무엇인가. 비타민이란 무엇인가.


난 쉽게 말했겠지만(feat. 홍삼)

난 분명 그 상황에서 둘러댔다. 내가 비타민 영양제를 챙겨 먹는 데는 큰 이유가 없다. 그냥 집에 많이 쌓여있고 이것을 먹어 없애려는 생각뿐이다. 우리 아빠는 종종 정관장 물건을 어디선가 잔뜩 선물 받아온다. 그러다 보니 이 물건이 아직도 집에 한 세트가 남아있다. 하아... 먹어도 먹어도 없어지질 않는다.


홍삼 비타민. 대체 뭐하는 물건인지. 홍삼이 막 증식하는 걸까. 그래도 이 물건을 참고 계속 먹을 수 있는 이유는 센츄롬에 비하면 비타민 냄새가 역하지 않기 때문이다. 코리안 홍삼의 신묘한 사이언스 덕분일지? 왜인지는 별로 궁금하지 않아서 찾아보지 않았다. 찾아보다가 혹시라도 사실은 냄새랑 상관이 없다는 걸 알게 된다면 다시 또 구린내를 느끼게 될까 봐서.

다 먹을 때 즈음엔 또 새로운 게 생길 거다.


나 자신이 잘 챙기지 않는 것과는 별개로, 어릴 때부터 별별 영양제를 다 먹어보기는 했다. 저혈압, 저체중에 아토피 피부염까지 앓다 보니 엄마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 와중에 공부도 더 잘해야 하니까 오메가 3 지방산,  철분(훼마틴), 종합비타민(센츄롬)에 홍삼정에 등 어쩌구저쩌구를 꼭 챙겨 먹었다. 아마 엄마가 그렇게 신경을 써주어서 내가 큰 문제없이 몸뚱이를 유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엄마 고마워...


요즘은 아이허브에서 뭔가 괜히 하나라도 더 사보려다가 산 철분이 너무 몸에 안 맞아서 먹지 않고 있다. 남자 친구 동생의 여자 친구(그냥 남)을 통해 받은 종합비타민도 역시 메스꺼워서 못 먹는다. 먹어야 한다는 웬만한 영양제들이 이렇게 메스꺼워서 어떻게 살 수 있을는지. 하지만 먹고 힘들어하느니 차라리 안 먹는 게 낫지 않을까. 그나마 잘 먹는 것은 홍삼과 프로폴리스 정도 되시겠다. 프로폴리스 스프레이는 특히 목이 X를 눌러 조의를 표할 지경이 되었을 때에 아침저녁으로 뿌리면 참 좋다. 신경을 안 쓰는 사람 치고 또 호불호는 확실하죠.


이 비타민을 먹어서 내가 정말 뭐라도 효과를 보고는 있는 걸까? 그 효과가 사실은 현상 유지인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잊어버릴 때쯤 하나씩 먹긴 먹어야 하는 것 아닐까? 알 수 없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나도 언젠간 노안으로 열폭하는 상무님처럼 나이가 들 고 노안도 온다는 것. 내 몸뚱이는 소모품이니까 젊다고 나대지 말아야겠다. 역시 하던 대로 몸 사리며 살아야지.


상무님은 왜 그렇게까지 노안에 버튼이 눌린 걸까. 당신도 쪽팔렸는지 그 후로 비타민이나 눈깔 얘기는 한 번도 안 꺼낸다. 이럴 때일수록 어떤 어른으로 성장해야 하는지 고민이 든다. 영양제만 먹고 오래 사는 좀비가 되면 어떡해. 나는 좋은 선배 건강한 어른이 되고 싶어.


영양제 꼬박꼬박 안 챙겨 먹을 거면 자기 전에 불 꺼놓고 핸드폰 보는 습관이라도 줄여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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