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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나 Feb 09. 2020

사물 쓰기, 8. 휴지

비염인의 눈물 콧물 환절기 추억

#15 휴지

난 비염인이다. 아마도, 후천적 비염인이다. 나는 어릴 때 아토피 피부염을 앓았었다. 태어나자마자 살았던 할머니의 이층 집을 떠나 독립을 결심한 나의 엄마 아빠는 신축 아파트에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당시 4살이던 나는 온몸으로 새집증후군을 겪었으니,  10살 무렵까지 아토피를 앓은 게 바로 그것이다.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발병한 것으로 기억한다. 다행히 중학교에 입학할 즈음에는 피부는 모두 원래대로 돌아왔으나 심각한 비염이 남았다. 참고로, 아토피의 대표적인 종착지가 알레르기성 비염이라고 한다.


지금은 만성으로 코가 반쯤 막혀있다. 한약도 먹고 나이도 먹고 성장(또는 노화)으로 인해 호르몬이 안정되어 전처럼 심각한 일상은 아니지만 답답하다. 시원하게 숨을 쉬는 기분은 뭘까. 비중격 수술이라고 하던가, 휘어있는 콧 속 뼈를 잘라내라는 조언을 여러 번이고 받았다. 주변에 동명의 수술을 한 친구들이나 지인들에게 물어보면 피만 사흘 밤낮을 쏟고 썩 변하지도 않는다고 하니 그냥 이대로 살고는 있습니다만.

내게 부끄러웠던 휴지
휴지를 많이 갖고 다니는 게 싫었다. 물건을 많이 챙겨 다니는 버릇은 아마 비염 때문에 생겼으려니 싶다. 중학교 때 교실엔 공기청정기가 있었다. 학교 바로 뒤 아파트가 재건축을 하게 되어서, 교장이 건설사와 싸워 얻어낸 전리품이었다. 교실은 언제나 난장판이고 먼지가 풀풀 날렸다. 열심히 일할뿐만 아니라 주기적으로 필터마저 갈아지는 공기청정기의 역할이 무색하게도. 중학교 교실이란 그런 곳이니까. 교실은 비염인에게 가장 지옥 같은 공간이다. 하루 종일 있어야 하지만 쌓여만 있지 않고 열심히 흩날리는 먼지 속에서 집중해서 성과를 얻어내야 한다. 무간지옥이 따로 없다.

그곳에서 나는 항상 포켓티슈와 살았다. 수시로 코를 풀어서 친구들 눈에 띄지 않게 모아놨다가 한꺼번에 버렸다. 티가 나면 지저분해 보이니까 그게 싫었다. 얼굴에서 눈에 띄게 큰 데라고는 내 눈구멍 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어느새 코가 주먹만 해졌다. 여드름도 엄청났다. 휴지를 달고 사니까 코가 멀쩡할 날이 없었다. 당연히 코 주변 피부도 엉망진창이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코를 풀며 공부를 하는 와중에도 애니메이션 로젠메이든을 좋아하던 정말 정말 예쁜 친구와 단짝이 됐다. 친구랑 같이 다닐 때 나는 내 코가 그렇게 싫었다. 자기가 좋아하는 만화의 캐릭터처럼 얼굴도 작고 코도 작고 입도 작은 친구는 비염마저 없었다. 살아있는 것이 힘들어 집에 가서 울 때에는 이미 비염으로 커진 코가 더 커졌다. 이 와중에 콧구멍은 더 부었고 더 좁아져서 숨이 막혀왔다. 그때의 내 삶은 그랬다.

어느 11월에 그렇게 좋아하던 친구들 앞에서 가만히 서있는데 코피처럼 콧물이 흘렀다. 그때는 코피도 자주 흘리던 때라서 분간이 되지 않았다. 코를 막고 주저앉는 나에게 친구들이 휴지를 들고 달려왔다. 정말로... 동복을 입는 첫 주가 싫었다. 차라리 피를 흘리고 싶었다.

그래도 친구들은 졸업 때까지 내 곁에 있었고 전혀 콧물과 상관없는 일로 멀어졌다.

언제나 휴지는 내 곁에
이젠 비염(또는 콧물)과 상관없는 사람처럼 써놨지만 여전히 매일 아침 눈물을 찔찔 짜며 코를 푸는 사람이 나다. 오늘 아침에도 친구들과 리조트에서 하루를 보내고 눈을 뜨자마자 거의 30분은 코만 푸는데 시간을 다 보냈다. 소중한 하루의 30분을 얼굴에서 진액을 빼는데 쓴 꼴이다. 옷장 정리 한번 할라치면 마스크를 안 쓰면 큰일 난다. 옷 정리보다 멈추지 않는 재채기가 더 힘들다. 온몸의 진이 다 빠져버린다. 날 제일 힘들게 하는 게 내 몸뚱이라니.

오늘은 새 티슈를 깠다. 조금이라도 사람답게 살려면 물티슈를 가지고 수시로 닦아내고 치워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더러워지는 게 사람 사는 공간이라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다. 아, 계속 약을 먹기도 지친다. 약을 먹으면 졸리고 졸리면 일을 할 수 없다. 그래도 회사에서는 직원 복지 명목으로 큰돈을 써준 덕에 내 뒤통수에 공기청정기가 하나 있다. 바닥이 카펫인 바람에 매일 쌓이는 책상 위 먼지가 제일 문제다. 물건도 많은데 책상까지 닦으려니 귀찮아 죽겠다 아주. 그래도 휴지는 회사 돈으로 펑펑 쓰며 닦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지구야 비염인이 일회용품을 너무 많이 써서 힘들지. 미안하다. 회사에서 걸레까지 빨고 싶지는 않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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