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은 여기 없다. 대답이 없다.
정채봉 선생님의 시가 떠오른다.
때때로 아니
요즘은 아주 자주
내 마음이 여기 내게 없다.
"나는 여기 있는데 내 마음을 여기 막 없고 그래"
이제껏 영문도 모르고 매일 값을 치르며 살아오신 어머님이 계신다.
그녀는 단 한 번도 내게 무엇을 요구하지 않았다.
특히
공부를 잘하기를 또는 하는 모습을 보이기를 희망하지 않았다.
그저 인간됨으로 잘 먹고 잘 자고 이른바 사고 따위 없이 자라기만 바랐다.
그도 그럴게
깐깐하고 이성적인 언니가 둘이나 있었기에 야단법석을 떨며 주권을 요구할 일 없이 자랄 수 있었고
내게 어떤 문제가 생기기 전에 그녀들이 모든 상황을 정리했으니.
어머님은 항상 언니들에게 먼저 지시를 내렸고
이성적인 언니들은 적당히 일을 분배하여 나를 썼다.
핑계일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자라고 보니 나는 선생님이나 친구, 그 누구를 막론하고 대답할 일이 없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자라면서 대답할 일이 없었다.
어머님은 내게 무엇을 요구하는 사람이 아니었고,
아버님은 대꾸하는 것을 싫어하셨고, (어른에게 대꾸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남으로)
언니들은 적당하고 합리적인 지시만 했으며
8살 터울인 동생은 대답할만한 어떤 일을 만들 수 없었다.
(내게 3 스타가 있다면 동생에겐 4 스타가 있는 셈이니)
스스로가 대답할 줄 모르는 사람이란 걸 알기까진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장담컨대)
직설적인 친구들을 사귀며 이제껏 누구의 말에 대답을 해본 적 없음을 깨달았다.
놀랍겠지만 그렇다.
더욱이나 나라는 아이는
문제를 만들지 않았고, 내성적이고 조용했으며 느릿느릿한 학생으로서
선생님들이 바라는 건 오직 좋은 성적이 다였으니까.
무언가에 '대답'을 한다는 일이 얼마나 무서운 촉발인지 아는가?
하필이면 고등학생
그 중요한 시점에서 대답을 요구하는 친구들을 사귀게 된 건.......
어머님의 삶에서 자식이 문제를 만드는 전무후무한 사건의 발단이 되었다.
(그러니까....... 자식이 '그 자식', '이 자식'과 동의어가 된다는)
마찰이 잦아졌다.
나의 사춘기는 그랬다.
누군가가 내게 대답이 필요한 질문을 던지는 사건이 자주 발생하고,
그로 인해 대답에 익숙하지 못한 나는 생각을 그대로 쏟아냈다.
지금도 서툴다.
여전히 정직과 솔직함을 구분하지 못한다.
언젠가 큰언니가 의도와 다르게 잘려버린 앞머리를 부여잡고 울고 있을 때
한국이란 나라에서 *권총으로 맞아 죽을 수 있음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다.(*장난감 권총)
"다 큰 사람이 그 덩치에 매일 자라는 앞머리 때문에 우는 걸 보고 있으니 정말 멍청해 보여."
진심으로! 조롱의 의미는 단 1%로도 없었다.
아버지께서 '네 언니 이상하지 않냐?'는 물음에 가만히 대답했을 뿐이었고
내가 아닌 누가 보아도 그 당시 그 모습은 정말 멍청해 보였을 것이라 확신한다만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다.
아무튼
이때부터 본인은 마구잡이로 대답을 해대며 '반항아', '깡패'라는 타이틀로 물의를 일으키기 시작했었다.
그리고 마침내
어머님께선 물음 없는 자식에게 먼저 대답했다.
"나는 널 믿는다. 그래서 너에게 잔소리를 하지 않았던 것뿐이야."
모든 물음에 끊임없이 대답하려는 내게
"네가 이렇게 된 건 분명 네 잘못이다.
그리고 네가 그리된 건 모두 내 잘못이기도 하다."
그날 이후 변한 건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 대답이란 걸 하려 애썼지만 사람들은 내 대답을 반박이나 반항으로 여겼다.
그리고 마침내
대답을 회피하기 위해 문밖을 나섰을 때
아버님은 술에 취해 전화를 걸었다.
그 날도 학교가 아닌 옥상에 있었을 때였다.
"(울먹이듯) 어디 있니? 어째서 너는 내 마음을 모르니? 어째서!"
아버님은 마음을 말로 하지 않는 대답을 용인하셨고,
어머님은 질문 없이도 대답하는 방법을 아셨다.
보통의 남녀가 그렇듯
참고로 두 분은...
계약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지 몸소 삶으로 보여주셨다.
결혼이라는 계약, 잘못된 계약에 대한 책임, 그리고 원수를 사랑하는 마음.
잘못된 결혼 계약은 서로를 미워하기 때문이 아니라
잘못 없이도 잘못된 결과가 도출될 수 있다는 가능성일 뿐
그저 서로가 너무 다르다는 것.
다름을 안다고 인정할 수 있는 건 별개.
그럼에도 자식은 부모를 사랑한다는 이변.
아무튼
이제 난 제대로 된 대답을 하기 위해 떠나기로 결심했다.
5개월 뒤면 떠나야 하는데 돈은 한 푼도 없다만.
"넌 왜 그러니?"
"도대체 뭐 때문에 그래?"
오래되고 진부한 질문에 대답할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정작 질문한 이는 잊었을 텐데.
떠나 보지 않은 사람은 외로움을 모른다.
그래서 친구들이 외롭다는 말에 공감하지 못했다.
"인간이 외롭다는 것은 사람이라는 단일 개체를 벗어나 드디어 교감을 통해 인간, 인류가 되었음에 감사할 일이고,
그 외로움 덕분에 끊임없이 이성(또는 동성 그 누군가)을 만나 사랑을 하고,
인류가 번식되는 인간의 정상적인 감정상태 일 뿐이야."
"싱글은 온전한 한 개를 말하는 거야."
떠나기 전에 미리 대답한다.
미안하다. 헛소리였다.
p.s 대답이라는 건.
답을 말하는 건 수단이고
마음만 말하는 건 수작(?)일지 모른다.
그래서 대답엔 기술이 필요하다.
진심을 담아 최대한 답에 가깝게
상대에게 전하는 기술.
상대에게 납득되지 못하는 답은 답이라 할 수 없고
진심을 전하지 못하는 답은 대답이라
말하기 쑥스러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