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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을 떠났다

답 없는 인생을 바꾼 최고의 선택

by 달보


어릴 적 내가 살던 동네는 ‘균형’이 잡힌 곳이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들, 아저씨와 아줌마들, 형 누나 동생들이 적절한 비율로 어우러져 살고 있었다. 골목을 벗어나면 바로 큰 도로가 나왔고, 횡단보도만 건너면 초등학교와 중학교가 있었다. 학교 옆으로 난 오르막길을 따라 올라가면 왕복 6차선 도로가 놓인 대교가 있었다. 그 아래로는 금호강이 흐르고 있었는데, 같은 강을 따라 난 양쪽 둑길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나는 우리 동네 쪽 둑길을 더 좋아했다. 이유는 없었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말처럼, 그냥 우리 집이 있는 쪽이 더 아늑하게 느껴졌을 뿐이다.


그 시절엔 스마트폰도, 컴퓨터도 없었다. 하지만 친구들을 만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놀이터 하나 없는 동네였지만, 집 밖으로 나가면 어디서든 노는 아이들을 쉽게 만날 수 있었다. 작은 동네였기에 서로 모르는 얼굴도 거의 없었다. 놀고 싶으면 그냥 다가가서 자연스럽게 끼어 놀면 됐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딱지치기, 요요, 술래잡기 같은 놀이를 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늘 바글바글 몰려 다녔다. 최소 다섯 명, 많게는 열댓 명씩 우르르 몰려 놀았던 기억이 난다. 집에 가야 할 시간은 정해져 있지 않았다. 시계도 필요 없었다. 황금빛 노을이 온 세상을 물들이기 시작하면, 어디선가 밥 먹으러 들어오라는 엄마들의 목소리가 고소한 밥 냄새를 머금고 공기를 가르며 들려왔다.


그렇게 매일같이 어울려 놀던 친구들이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하나둘씩 이사를 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다. 함께 놀던 아이들이 떠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실감하지 못했던 데다, 그저 가끔 있는 일이라고 가볍게 여겼기 때문이다. 게다가 가장 친한 친구만큼은 절대 이사 가지 않을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도 있었다.


그런데 중학교에 진학할 무렵, 문득 돌아보니 함께 놀던 아이들 대부분이 이사를 가고 없었다. 처음엔 그 부분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마침 컴퓨터 게임에 푹 빠져 있던 시기였고, 새 학교에서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남아 있는 또래 친구가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 집만 여전히 그 동네에 남아 있었고, 주변엔 생을 그곳에서 마감할 듯한 노쇠한 어르신들만 남아 있었다. 게다가 나와 가장 친한 친구는 다른 동네가 아니라 아예 서울로 이사를 가고 없었다.


처음에는 이사 가는 친구들이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정든 친구들과 익숙한 동네를 떠나는 게 얼마나 서운할까 싶어서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불편한 진실을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 우리집은 이사를 가지 않는 게 아니라, 형편상 이사를 갈 수 없는 처지라는 걸, 그리고 우리 동네가 지역구에서도 유독 가난한 곳에 속한다는 걸 알게 된 건 우리 집의 형편이 심각하게 기울어진 뒤였다. 정작 불행한 건 떠나는 친구들이 아니라, 동네에서 벗어나지 못한 나였다.


나는 그 동네에서 거의 30년을 살았다.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보려 애썼지만, 되는 일 하나 없이 시간이 흘러갔다. 그런 현실이 지겨워 결국 동네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인생이 바닥을 치고 나서야,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강한 욕망이 솟구쳤다. 나는 그 내면의 목소리를 외면하지 않았다.


이후 놀랍게도, 고향을 떠나자마자 내 인생은 마치 막힌 배수구가 뚫리듯 술술 풀리기 시작했다.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하고, 안정적인 직장에 들어가고, 글쓰기라는 인생의 과업을 발견해 이렇게 글을 쓰게 된 것도 그 덕분이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많은 복잡한 요소들이 개입했겠지만, 내 인생을 바꾼 가장 결정적인 한 수는 바로 고향을 떠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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