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묘미

day 1

by 달보


9개월 된 현이를 데리고 처음으로 비행기를 탔다. 아내와 둘이서 떠나는 여행과는 짐 싸는 것부터 난이도가 달랐다. 아내가 아니었다면 짐 싸는 데 세 배는 더 시간이 걸렸을 거다. 그나마 예전처럼 옷가지를 많이 챙기지 않아서 캐리어 하나에 세 가족의 거의 모든 짐이 들어갔다.


신분증이 없는 현이를 데리고 공항 게이트를 통과하려면 등본이나 가족관계증명서 같은 서류가 필요했다. 알아보니 공항 안에서도 출력할 수 있다고 해서 그대로 믿고 갔다. 하지만 서류를 뽑으려면 지문 인식이나 IC칩이 있는 신분증이 필요했다. 지문은 수차례 인식되지 않았고(동사무소에서 지문을 등록한 기억이 없어서 예상하긴 했다), 2021년에 발급받은 신분증엔 IC칩이 없었다. 다행히 최근에 갱신한 아내의 신분증 덕분에 등본을 출력할 수 있었고, 덕분에 현이와 함께 무사히 게이트를 통과했다. 등본 하나 때문에 비행기를 타지도 못할까 봐 식은땀이 났다.


제주도까지 가는 약 한 시간 동안 비행기 안에서는 한 아이가 쉬지도 않고 강성 울음을 터뜨렸다. 얼마나 시끄러웠는지 제주도에 도착해서 내릴 때 곳곳의 사람들이 한숨을 내쉬며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전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우는 아기보다, 그 아기의 부모님이 얼마나 난처할지가 더 신경 쓰였다. 한편으로는 우리 현이가 얼마나 순한 아기인지를 새삼 다시 느꼈다. 평소에 아무리 얌전했어도 채 1세가 되지 않은 아이의 첫 비행이었으니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아내가 젖을 물린 덕분인지 제주로 가는 내내 엄마 품에서 곤히 자다가 도착할 때쯤 얌전히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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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여행은 특이하게도 숙소를 따로 잡지 않았다. 아내와 친분이 두터운 한 지인이 제주도에 사는데, 우리가 제주에 간다는 소식을 듣고는 여행하는 동안 머물 숙소를 마련해주셨다. 지인 어머님의 집이었다. 처음엔 숙박비가 들지 않아서 좋을 것만 같았지만 생각해보니 꼭 그런 건 아니었다. 왜냐하면 숙소 위치가 제주시 한복판이었기 때문이다. 제주도를 여행하는 기분을 제대로 느끼려면 서귀포만 한 데가 없다고 생각하던 나여서, 제주시에서 일주일 동안이나 머물러야 한다는 사실은 그리 달갑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제주도에 도착해 렌트카를 인수하고 아내 지인이 마련해준 숙소 근처에 다다르자 뭔가 일이 꼬이고 있다는 예감이 들었다. 숙소가 있는 곳은 육지의 평범한 동네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서귀포에선 좀처럼 보기 힘든 대리석 외벽과 통유리로 된 빌딩들이 골목 어귀까지 줄지어 있었다. 골목 안으로 들어서니 학교가 하나 있었는데 그 주변에는 눈에 익은 각종 프랜차이즈 상가들이 즐비했다.


우려하던 일이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는 씁쓸함을 억누른 채 주소에 찍힌 숙소에 도착했다. 건물은 필로티 구조였다. 외관만 봐도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듯했다. 출입구 앞에 차를 대고 캐리어를 내리는데 마치 사업에 실패해 원룸으로 이사 가는 가족이 된 것만 같았다. 도어락을 해제하고 들어선 숙소 내부는 예상보다 더 실망스러웠다. 막 지저분하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결코 깔끔하다고도 보기 어려운 곳이었다. 전체적으로 칙칙했고 눅눅한 기운이 감돌았다.


사람마다 청소 기준이 다르니 청소가 아쉬운 부분은 넘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숙소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화장실 상태는 심각했다. 세면대는 머리카락 하나 빠질 틈도 없이 막혀 있었다. 바닥 배수구도 물이 잘 빠지지 않아 샤워기를 조금만 틀어놔도 바닥에 물이 차올랐다. 평소엔 잘 쓰지도 않는 ‘대략난감’이라는 단어가 절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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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에서부터 스멀스멀 올라오는 침울한 기분이 걷잡을 수 없이 번지기 전에 마음을 고쳐먹었다. '제주도 여행은 창문 너머로 바다가 보이는 서귀포 어딘가의 숙소를 잡아야 한다'라는 고정관념을 비틀기로 했다.


일단 밖으로 나갔다. 억지로라도 마음을 열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었더니 보이지 않던 것들이 조금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막 제주에 온 느낌은 아니었지만 분명 낯선 동네에 온 것만은 맞았다. 동네 어귀에 생뚱맞게 피어 있는 근사한 벚꽃나무 한 그루, 새 건물치고는 묘하게 내공 있어 보이는 빵집, 딸아이와 동요를 맞춰 부르며 행복한 기운을 풍기는 부녀. 기대에서 어긋난 실망을 떨쳐내지 못했다면 결코 포착하지 못했을 풍경들이었다. 이전처럼 서귀포 숙소를 고집하고 무작정 해안도로로 차를 몰고가 드라이브를 하기만 했다면 결코 겪지 못했을 소박하지만 소중한 경험들.


기대한 대로 흘러가야만 좋은 여행인 건 아니었다. 무릇 여행이란 뜻밖의 순간들로 가득한 것이기도 하니까. 예기치 못한 상황을 마주하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비로소 미처 알지 못했던 나의 또 다른 면모를 발견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여행의 묘미.


그리고 어쩌면, 인생의 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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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보가 쓴 책 : 『신혼이지만 각방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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