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4-1
여행 넷째 날 아침, 첫 번째 목적지로 향하기 전에 우선 숙소 근처에 있던 용꽈배기에 들렀다. 용꽈배기는 쫄깃한 식감을 좋아하는 내 입맛에 맞았다. 기본 반죽 자체가 맛있다 보니 메뉴를 가리지 않고 입이 즐거웠다. 대파꽈배기, 팥도넛츠, 매콤한 당면이 든 고로케 순으로 아내가 조금씩 떼어서 입에 넣어줬다. 운전을 핑계로 아기새처럼 받아 먹었다. 지난번보다 더 맛있어진 것 같았다.
다만 즐거운 입과는 달리 차 안의 분위기가 밝지만은 않았다.
우리는 서귀포를 향하고 있었다. 제주시를 빠져나갈 즈음 전후방 가득한 차량 사이에서 반복되는 신호에 갇혀 힘겹게 이동해야 했다. 평소엔 답답함을 잘 느끼지 않는데, 그때는 마치 가슴에 뜨뜻미지근한 바람이라도 불어넣은 것처럼 숨 쉬기가 어려웠다.
곧이어 제주시를 벗어나자마자 도로 양옆엔 유채꽃이 핀 드넓은 평야와 밭이 펼쳐졌다. 전방으론 맑고 청명한 하늘이 도로 위를 덮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속이 뚫리는 풍경이었다. 마음이 시원해졌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제주도에 도착한 지 한참이 지나서야 서귀포로 간다는 것과, 오늘 일정이 끝나면 다시 번잡한 도심으로 돌아가야한다는 사실이 갑갑하기도 했다. 감정이 오락가락했다. 내 얼굴의 표정은 점점 딱딱해지고 있었다. 그러다 결국 꽈배기의 여운이 입 안에서 사라질 때쯤 아내에게 불만을 털어놓았다.
"난 우리가 왜 제주도까지 와서 차 막히는 데를 전전긍긍하는지 모르겠어. 바다 한 번 못 보고 이렇게 여행해야 하는 것도 이해 안 되고. 물론 내일 모레엔 서귀포로 숙소를 옮기지만 진작에 그렇게 했어야 했다고 생각해."
"제주시가 육지나 별반 다를 바 없는 도시 느낌이 있긴 해. 그래도 제주도는 제주도잖아. 제주시에서 서귀포까지는 40분쯤 걸리는데 사실 어딜 가도 이동 시간은 비슷하지 않아?"
"차가 꽉 막힌 데서 30분 운전하는 거랑 뻥 뚫린 길에서 느긋하게 30분 운전하는 건 다르지."
"그래도 언니 덕분에 숙소값은 아꼈잖아. 화장실 물 잘 안 내려가는 거 빼면 나쁘지도 않았고."
(잠시 침묵)
"됐어, 그만 얘기하자. 더 얘기해봤자 바뀔 것도 없고. 그리고 이틀 뒤엔 숙소 옮기기로 했으니까."
무의미한 말다툼을 적당한 시점에 마무리 지은 건 아내였다. 당시엔 대꾸하지 않고 침묵했지만 속으로는 싸움이 크게 번지지 않아 다행이라 여겼다.
약간의 마찰이 우리 사이를 스친 후로는 모든 게 좋았다. 제주시에서는 신호등의 빨간불과 과하다 싶을 정도로 많은 과속 카메라가 내내 신경 쓰였는데, 서귀포로 가는 길은 악셀 페달을 밟으며 유유히 주변을 구경할 만했다. 날씨는 봄 냄새가 났고, 노랗게 만발한 유채꽃은 급정거를 유발했으며, 도심에 갇혀 있느라 텁텁했던 마음엔 싱그러운 섬바람이 불었다.
처음 도착한 곳은 '산방서림'이라는 북카페였다. 블로그 리뷰 사진으로는 손님이 꽤 많을 줄 알았지만 막상 도착하니 주차장엔 삐딱하게 세워진 승용차 한 대뿐이었다. 그 옆에는 녹슨 대형 버스가 방치돼 있었다. '이곳이 맞나?' 싶은 심정으로 카페 문을 열려는데 갑자기 한 남자가 다가왔다. "카페 오시는 거예요?" 우리가 첫 손님이었다.
라운드진 외벽을 따라 길게 늘어선 책장엔 눈에 익은 베스트셀러들이 조명을 받아 멋들어지게 진열되어 있었다. 맨 윗 칸은 영화나 애니메이션에서 본 적 있는 장난감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아내는 어떤 커피를 마실지 고민하고 있길래 결정을 도왔다. "오늘의 드립 커피 어때?" 나는 무난하게 카페 모카와 비슷한 시그니처 커피를 주문했다.
커피가 나올 때까지 1층 내부 사진을 찍었다. 그러다 카운터 앞 포스기 옆에 놓인 장식품들을 찍으려고 카메라 줌을 조정하고 있는데 사장님이 말을 걸어왔다.
"루프탑 꼭 한 번 올라가보세요. 풍경이 멋지거든요."
"아,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는데 바람이 많이 불어서 아이 데리고 올라갈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감사합니다."
"경상도 분이세요?"
"네, 지금은 구미 사는데 고향은 대구에요."
"아~ 저는 부산이거든요."
"어? 저희 와이프가 부산 사람인데, 이따 올라가서 말해줘야겠네요."
나는 평소 안면 있는 단골 카페 사장님과도 대화를 잘 나누지 않는 편이었다. '여행 중'이라는 상황이 나를 평소답지 않게 만들었다.
"사장님은 제주도에 오신 지 얼마나 됐어요?"
"5년 전에 왔어요."
"제주도 정착하기 힘들다던데 어때요?"
"힘들죠. 특히 물가가 비싸요. 주유소 기름값도 그렇고. 제주도는 육지처럼 할인마트가 싸지 않아서 꼭 지역할인마트에서 장을 봐요."
'할인마트'와 '지역할인마트'의 차이는 몰랐으나 맥은 짚을 수 있었다. 마침 주문한 커피가 나와 대화는 그 즈음에서 끝났다. 아무런 의미 없는 대화가 이상하리만치 마음에 오래 남았다. 말 몇 마디에 스친 정이 생각보다 따뜻했다. 산방서림 사장님과는 처음 본 사이였지만 가늘지만 끈끈한 인연의 실로 이어진 것만 같았다.
모카크림이 초코파이 속 마시멜로처럼 얹힌 커피와 익숙하면서도 낯선 향의 깜장물이 담긴 컵을 쟁반에 올려 2층으로 올라갔다. 2층도 1층처럼 책이 가득했다. 바닥을 뚫고 솟아 있는 커다란 나무 한 그루를 중심으로 공간이 짜여 있었다. 그 나무는 넓게 펼쳐진 잎으로 2층 천장을 수놓고 있었고, 가지마다 열매 장식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아내와 현이는 해먹처럼 생긴 의자에 기대어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막 9개월 된 아기가 어른처럼 기대 앉아 산방산과 하늘을 가만히 바라보는 모습이 귀엽기 그지없었다. 아기가 맞나 싶을 만큼, 인생 2회차가 아닌가 의심스러울 만큼 조용히 풍경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내와 현이, 카페 사진을 실컷 찍고 나서 사장님이 추천한 루프탑으로 올라갔다. 제주도 군생활을 산방산 근처에서 했던 터라 산방산은 지겹도록 봤었는데 그땐 별다른 감흥이 일지 않았다. 북카페 루프탑에서 오랜만에 마주한 산방산을 보고 있으니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새로웠다. 익숙한 풍경이 낯설게 느껴질 때 오는 묘한 경외감이었다. 산이 유독 웅장하게 보이는 건 루프탑과의 거리가 가까워서인 것 같았다. 혹은 10년 전과 지금의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어서 그런 걸지도 모를 일이었다.
맑은 하늘과 달리 강한 바람이 불었다. 그럼에도 아랑곳 않고 현이를 꼭 안고 아내와 셋이서 바람과 겨루며 산방산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이후 1층으로 내려가 현이를 위한 그림책을 한 권 구입한 다음 밖을 나섰다. 우린 서귀포시 안덕면에 있는 맷돌 콩국수와 냉우동으로 유명한 '명경식당'이라는 곳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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