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아내 몰래 버린 편지

by 달보


나는 여복이 많은 편이었다. 평범한 외모에 얌전한 성격 치고는 연애가 끊이질 않았다. 소개팅으로 만난 경우는 단 한 번뿐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자연스럽게 주변 사람들과 이어진 인연이었다. 한 번 헤어지면 몇 년씩은 공백기를 갖는 친구들과 달리, 나는 헤어지고 나면 금세 새로운 사람을 만났다. 마치 번호표를 뽑고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한 사람이 떠나면 또 다른 누군가가 내 앞에 나타나곤 했다.


어릴 적부터 결혼을 하고 싶었다. 특별한 계기는 없었다. 오히려 나의 부모님은 이상적인 결혼 생활과는 거리가 멀었다. 가정이 파탄 나도 이상하지 않을 일들이 여러 번 있었다. 다행히 지금은 사이가 좋지만, 가난의 굴레를 수십 년 동안 단 한 겹도 벗겨내지 못했다. 그런 부모님 밑에서 자랐으니 결혼을 멀리하는 게 더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결혼을 원했다. 부모님보다 잘 살 자신이 있었고, 부모님처럼만 살지 않으면 중간 이상은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들의 삶은 답습하지 말아야 할 것들로 가득한 교과서 같았다.


그런 내게 연애는 거의 필수 조건이었다. 나는 늘 누군가를 원했다. 눈에 들어오는 사람이 있으면 유심히 지켜봤고, 작은 기회라도 생기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단 덤벼들었다. 고백했다가 차이는 건 물론 두려웠다. 하지만 내 사람이 될지도 모를 사람을 넋놓고 가만히 보내고 나서 겪게 될 후회는 도저히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여복이 많다는 말에 한때는 거의 동의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절반쯤만 맞는 얘기였다. 나는 늘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레이더를 돌렸고 나서야 할 때는 주저하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은 날더러 사람을 쉽게 만난다며 운이 좋은 것 같다고 했지만, 사실 그 모든 일들은 나름대로 부단히 노력한 결과였다.


아내를 처음 만났을 때 단 5분 만에 '이 사람과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화를 거의 나눠보지도 않았고, 판단 기준이라곤 눈앞에 보이는 외형이 전부였지만 그럼에도 그런 마음이 들었다. 어차피 사람은 사귀어 봐야 진가를 알 수 있고, 설령 사귄다 해도 끝까지 알 수 없는 게 사람이니까.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부담스럽지 않은 선에서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보여주면 되고, 운좋게 연인으로 발전한다면 나부터 잘하는 데 집중하면 큰 문제는 없을 거라 믿었다.


그동안의 연애를 통해 얻은 가장 값진 깨달음은 '나만 잘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내 마음이 올곧지 않으면 더할 나위 없는 사이라도 관계는 얼마든지 틀어질 수 있었다. 더 예쁜 사람을 원하거나, 더 날씬한 사람을 원하거나, 더 똑똑한 사람을 원하거나. 주체할 수 없는 욕망을 가만히 내버려두는 건 곧 재앙을 부르는 것이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다섯 번이나 이별하고 난 후에야 느낀 것이었다. 그런 만큼 내게 또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결코 이전 만큼 어리석은 생각은 하지 않겠노라 다짐하고 또 다짐했었다.


그러나, 자신감이 과하게 컸던 나는 첫 만남이 좋았다는 생각에 그녀와의 두 번째 만남에서 대뜸 사귀자는 뜻을 전하려 했다. 그것도 편지로.


예전에 내게 별 관심 없는 사람의 마음을 편지로 움직인 적이 있었다. 그 경험이 나를 부추겼고, 이번에는 그때보다 상황도 더 나은 듯하니 좋은 결과가 있을 거라 기대했다. 그런데 그녀를 만나러 가던 길에 왠지 모르게 불길한 예감이 드는 것 같아서 여동생에게 대뜸 전화를 걸었다.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동생이 이렇게 말했다.


"미쳤나? 차이고 싶으면 주든가."


그래 뭐, 불안한 마음에 전화를 건 건 맞는데, 그래도 내심 좋은 반응을 기대했었다. 하지만 동생은 가차 없이 쓴소리를 내뱉으며 내 계획이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는 것인지 확실히 깨닫게 해줬다. 원래도 좀 거칠긴 했지만, 그날따라 유난히 거침없고 날카로운 동생의 말투가 이상하게 반갑고 고마웠다. 덕분에 손에 쥐고 있던 편지는 뒷주머니에 고이 찔러 넣고 아내를 만나러 갔다.


두 번째 만남 장소는 술집이었다. 그녀도 내가 썩 싫지만은 않은 것 같았다. 마음에도 없는 사람과 굳이 술잔을 부딪히고 싶진 않을 테니까. 우리는 책 이야기를 시작으로 연애할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뭔지, 친구들과의 관계는 어떤지 같은 얘기를 주고받았다. 나는 특히 나의 가치관이 돋보이는 이야기를 할 때면 약간 과장해서 더 성실하고 담백한 사람처럼 보이게 하려 했다. 반면 그녀는 있는 그대로의 자기 모습을 꾸밈 없이 드러내는 것 같았다.


작은 것 하나하나가 다 신호처럼 보였다. 낯선 사람에게 주량을 솔직히 말하는 경우가 드물긴 해도, 500cc 맥주 한 잔이 주량이라던 그녀는 그날 나와 2차까지 가서는 대여섯 잔의 생맥주를 마셨다. 게다가 헤어질 때 그녀의 집앞까지 바래다주었으니, 나는 무조건이라며 확신했다. 이건 그린라이트야.


그래서 문자를 보냈다.

"영화 한 편 보실래요?"


곧이어 답장이 왔다.

"아니요. 괜찮아요."


얼굴이 화끈거리고 온몸에 닭살이 돋을 정도로 부끄러웠다. 말끝이 어긋난 것도 아니고, 정식 고백도 아닌데도 거절은 유난히 날카로웠다. 핸드폰 화면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괜히 켰다 껐다를 반복했다. 아무 일도 없었던 척하려고 애썼지만 무릎에 힘이 풀리고 어깨가 저절로 말려들어갔다. 자정에 가까운 골목길 지켜보는 이도 없건만. 이불 속에 누워서야 잔인한 현실이 슬슬 와닿았다. 왜 그렇게 쓸데없이 들떴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뼛속까지 민망해졌다. 걷잡을 수 없는 후회가 빚어낸 자책감이 온몸을 휘감었다. 어떤 식으로든 긍정적인 대답이 돌아올 줄 알았는데, 그런 말을 건넨 스스로가 이유 없이 싫어졌다.


그러다 문득 동생이 떠올랐다. 순간 진정제를 맞은 듯 머릿속이 아득해지면서 아차 싶은 마음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만약 그날 동생에게 전화를 걸지 않았다면 지금의 우리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 편지를 건넸다면 아마 나는 지금까지도 결혼할 사람을 찾아 헤매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사소한 선택 하나가 인생 전체를 바꿔버릴 수 있다는 걸, 나는 그때 처음 실감했다.




cookie.

그날 썼던 편지는 분신같이 메고 다니는 노트북 가방에 4년 가까이 들어 있었다. 가끔 가방을 뒤지다 편지 봉투가 눈에 띄면 얼굴이 살짝 달아오를 정도였지만 이상하게 버릴 수가 없었다. 결국 지금은 버리고 없지만 불과 얼마 전이었다. 부끄러운 기억이지만, 어느새 한낯 추억이 되어버린 편지여서일까. 이상하다. 읽어보고 싶지도 않은 그 편지가 아직도 괜히 마음에 쓰인다. 버리지 말 걸 그랬나, 하면서. 그래도 아내에게 들키는 것보단 낫겟지.


keyword
이전 03화나는 뭘 해도 어설픈 남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