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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하면 차는 당연히 SUV...?

by 달보


아내를 처음 만났을 때 우리 둘은 서로 다른 연식의 쉐보레 스파크를 몰고 있었다. 나는 형편이 넉넉지 않아 자연스러운 선택이었지만, 웬만한 풀옵션 새차를 현금으로 살 여유가 있는 그녀가 경차를 타고 다닌다는 점은 조금 의아했다. 알고 보니 차에는 별 관심이 없었고 자동차는 그저 이동수단일 뿐이며, 바퀴 달린 고철덩어리에 큰돈을 쓰고 싶지 않다는 그녀의 생각은 나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결혼을 앞두고 있으니 어느새 난 SUV 새차를 알아보고 있었다. 후보는 쏘렌토였다. 둥글둥글하면서도 멀끔하고 탄탄하면서도 매끄러운 디자인이 마음에 들었다. 비록 2020년 풀체인지 된 쏘렌토의 디자인은 어딘가 시원찮았지만, 그럼에도 다른 차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쏘렌토 어떻냐는 말에 아내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천천히 알아보기 시작했다. 등급은 고민할 것 없이 가장 높은 데서 한 단계 낮은 걸로. 감가상각은 모르겠고 일단 새차로. 색상은 당연히 우윳빛깔 하얀색으로.


문제는 두 가지였다. 할부 여부와 출고 기간. 우린 둘 다 빚 지는 걸 싫어했다. 새차값을 일시불로 낼 만큼의 돈은 있었지만(물론 아내에게) 그만한 거액을 한 번에 쓰는 건 부담스러웠다. 게다가 차를 산다고 바로 인도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미 계약 후 1년 가까이 기다리는 친구도 있었고 이제는 더 오래 걸릴 거라는 말도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에라 모르겠다, 일단 딜러부터 만나보자며 아내 직장 동료에게 받은 명함에 찍힌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그 주 주말에 미팅을 잡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 약속을 코앞에 두고 딜러가 일이 생겼다며 일정을 취소해왔다. 우린 괜찮았다. 다만, 딜러 쪽에서 먼저 약속을 취소할 수도 있구나 싶어 살짝 당황스러웠다. 딱히 미안해하는 기색도 없어 보였다.


그는 운이 없었지. 만약 우리를 만났다면 그 자리에서 계약했을지도 모르는데. 어쨌든 그 덕에 벌게 된 시간이 마음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 막혀 있던 생각회로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다 며칠 후 문득 떠오른 질문.


'굳이 새차를?'


자동차에 관심 없고, 관리할 자신 없고, 감가상각 신경 쓰기 싫고, 집순이 집돌이에 캠핑 같은 취미 없으니 넓은 짐칸도 필요 없겠고, 더군다나 자녀계획조차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였으니 결론은 뻔했다. SUV는 필요 없었다. 그리고 우리 부부에게 새차란 사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어이가 없었다. 그 생각을 그제야 하고 있다는 게. 뭔가에 홀려도 단단히 홀린 게 틀림없었다. 1년에 돈 백만 원도 쓰지 않는 내가 무려 오천만 원이 훌쩍 넘는 돈을 쓰려 했다니. 정작 지 통장엔 돈 천만 원도 없었으면서.


어느새부턴가 도로에 SUV 차들이 즐비했다. 쏘렌토, 싼타페, 모하비, 팰리세이드, GV80 등. 주변에서도 새차는 대부분 SUV를 염두에 두고 있었지, 그랜저나 K5 같은 승용차를 언급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유모차 들어가려면 트렁크 넓은 SUV는 무조건이지.", "애 낳으면 항상 짐이 많아서 SUV 말고는 답이 없어." 이런 말들을 자주 듣다 보니 결혼하면 SUV가 당연한 수순처럼 느껴졌고, SUV가 아니면 뭔가 부족한 신혼생활을 시작하는 것 같다는 착각마저 들었다. 그래서였을까. '결혼=SUV 새차'라는 공식이 머릿속에 스리슬쩍 자리 잡은 게.


새차는 됐고, 연비나 잘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곧바로 떠오른 건 '그랜저 IG 하이브리드 모델'이었다. 전면 그릴 모양은 썩 내키지 않았으나, 헤드라이트와 후면 디자인이 괜찮았던 그 차. 성능이나 스펙은 굳이 알아볼 필요가 없었다. 지긋지긋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타고 다니는 것부터가 이미 많은 것들이 검증된 셈이니까.


"이거 살래, 차 보러 가자."


아내는 감탄과 탄식이 섞인 표정으로 나를 노려봤다. 예상대로였다. 중고차 앱을 뒤적이다 이천 만원 초반대에 상태가 괜찮아 보이는 매물을 찾았고, 대구로 차 보러 가자고 말하기까지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으니까.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그녀의 반응이 왠지 우습기도 했고, 내가 봐도 나라는 인간이 대체 어떻게 되먹은 놈인지 새삼 궁금하기도 했다.




그로부터 몇 개월이 지났다.


"자기는 감이 되게 좋나 봐."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서 운이 좋은 건지 진짜 감이 좋은 건지 여전히 미심쩍지만, 이번엔 인정하고 넘어가겠다는 기류가 느껴졌다.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차 사는 걸 경멸했던 게 머쓱해질 정도로 그녀는 여러 면에서 만족하고 있었다. 전반적인 차 상태, 연비, 승차감, 그리고 은은한 하차감까지. 직감에 의존한 중고차 뽑기는 다행히 성공적이었다.


막상 타보니 고속도로 주행에서 가장 큰 차이를 실감했다. 이제는 작은 차로 장거리 주행하는 건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편안하고 조용했다. 특히 스마트 크루즈 기능이 유용했다. 앞차와의 거리를 조절하고 단속 카메라가 나오기 전에 속도를 줄여주니 신경 쓸 일이 확 줄었다. 오십만 원을 웃도는 자동차세가 처음엔 많이 부담스러웠는데 나중엔 전혀 아깝지 않게 여겨졌다. 휘리릭하면 주차가 끝나는 경차에 비해, 여기저기 꼼꼼히 신경 써야 겨우 주차선을 맞출까 말까한 대형차에 적응하느라 애를 좀 먹긴 했다만.


무엇보다 차값을 일시불로 지불한 게 좋았다. 나는 예전부터 '당장 제값을 치르지 못할 거면 아예 사지를 말자'는 생각으로 살아왔다. 할부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 흔한 신용카드조차 만들어본 적이 없을 만큼 나는 빚이 무섭고 껄끄러웠다. 그런 내가 수천 만원에 달하는 할부를 감수하면서까지 꼭 필요하지도 않은 새차를 사려 했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하마터면 큰돈 쓸 뻔했다.


여러모로 운이 좋았다. 나름 고심해서 내린 결정이긴 해도 뚜렷한 근거 없이 직감에 따른 선택은 어쨌든 위험하긴 했다. 타이밍이 적절했고 상황이 잘 따라줬다. 앞으로도 새차 살 일은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없을 것 같다. 남이 타던 차를 이어받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 그렇게 아낀 비용이 생활에 큰 도움이 되니까.


바라건대 '새 것'과 '요즘 것'들에 휘말려,

중요한 결정을 욕망에 내맡기지 않기를.




p.s 미팅 캔슬해주신 딜러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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