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logue
하는 일마다 1년을 채 버티지 못하고 방황하다가 서른 즈음 인생의 최저점을 찍었다. 자포자기한 마음으로 공장에 취직해 고향을 떠났다. 연고도 없는 지역에서 만난 여자와 기적적으로 결혼하더니, 여전히 정착할 생각은 않고 또 이직을 거듭했다. 이윽고 마침내 안정적인 직장을 찾았으나 그곳에서 생애 처음으로 권고사직을 당했다. 하지만 오히려 그 일을 계기로 고등학교 행정실로 들어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정년을 다짐하게 된다. 이런 과정을 밟아본 사람이 나 말고 또 있을까.
나는 인생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기로 했다. 왜냐하면 인생은 정말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한때는 '나답게 살자', '더 나은 사람이 되자'라는 생각에 집착했다. 자기계발서의 여파였다. 하지만 그렇게 살아도 행복하지 않았다. 목표를 세워도 금세 무너졌고 성취는 잠깐뿐이었다. 끊임없이 스스로를 채찍질할수록 마음만 점점 피폐해졌다. 그러다 나중엔 '사람은 그냥 태어났으니 살아가는 것뿐이며 굳이 더 나아져야 할 이유는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금수저를 부러워하거나 대기업에 입사한 친구를 보며 배 아파하는 건 나만 손해 보는 일이었다. 건전지와 소금을 비교하듯, 애시당초 견줄 수 없는 것들을 저울질하는 것과 다름없으니까. 누군가는 부모 덕에 대학 등록금, 유학 비용, 결혼 자금까지 걱정 없이 해결하지만, 어떤 사람은 그 모든 걸 스스로 감당해야 한다. 누군가는 기회를 고르며 경력을 쌓고, 다른 누군가는 생계를 위해 아무 일이든 선택해야 한다. 조건과 환경이 이렇게 다른데 결과만 놓고 비교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겉보기에 남부러울 것 없는 이들도 저마다 말 못 할 고민을 안고 살아간다. 누구나 각자의 짐을 지고 가는 중이라, 비교는 결국 괜한 마음고생일 뿐이라는 걸 갈수록 실감하게 된다.
삶은 일종의 도화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주어진 고유한 캔버스. 누군가는 계획대로 선을 긋고 색을 입히지만, 어떤 이는 우연한 번짐이나 실수로 전혀 의도치 않은 무늬를 만든다. 또 어떤 이는 남이 그려준 그림을 자신의 것이라 착각하며 살아가기도 한다. 하지만 출처가 어떻든 그 그림을 낙서로 볼지 작품으로 여길지는 온전히 본인의 몫이다. 인생은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무늬를 띠게 된다.
요즘 문득, 내 삶이 한 단계 올라선 듯한 기분이 든다. 정확히 뭐가 달라졌는지는 설명하기 어렵다. 무언가 거창한 성취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다만 전보다 스스로를 덜 몰아붙이게 되었고, 가슴에 늘 맺혀 흐르던 초조함도 조금씩 가라앉고 있다. 예전엔 남이 그려준 밑그림에 맞춰 살아가느라 조급하고 불안했지만, 이제는 비로소 내 손으로 인생을 그려가는 감각을 알게 된 것만 같다. 마치 그동안 좁고 답답한 방에 묵고 있다가, 호텔 측 실수였다며 갑자기 넓은 VIP룸으로 옮겨진 느낌이랄까.
원래 난 양 볼에 정체 모를 분홍빛이 서려 있었다. 인중과 코 주변으로 뾰루지도 꾸준하게 났다. 면도기 관리를 잘 못해서 턱 주변도 엉망이었다. 아내를 쫓아다닐 즈음 상처난 부위를 아랑곳하지 않고 면도하다가 곪아서 딱지가 생긴 적이 있었다. 그게 턱에 난 커다란 점인 줄 알았다며 아내는 훗날 회고하기도 했다. 이제는 얼굴에 트러블이 거의 생기지 않는다. 결혼하면서 혼술이 줄고 먹는 음식이 다양해진 게 비결인 것 같다. 또 가르마를 타서 이마를 훤히 드러내고 다닌다. 아내가 사준 옷을 계절에 맞게 고루 갖춰 입기도 한다. 요란하지 않게, 단정한 옷차림을 즐긴다.
‘더 나은 것’이란 정의하기 나름인, 다소 허황된 개념이라 여기면서도 사고방식, 생활습관, 주변 환경, 직업, 자산 같은 것들이 한결 나아진 듯하다. 설령 그게 착각일지라도 그 착각 속에서 오래도록 머물고 싶다.
주변 사람들은 종종 말한다. 결혼을 정말 잘한 것 같다고. 낯간지럽지만 그럴 때마다 딱히 부정은 하지 않는다. 나도 그에 200% 동의하니까.
아내를 만나지 못했다면, 결혼을 하지 않았다면, 아마 나는 지금도 공장에서 일하거나 건설 현장을 전전긍긍하며 일감 찾아 떠도는 생활을 했을지도 모른다. 혹은 일본의 '프리터(freeter)'처럼 페이는 낮지만 정신적 스트레스는 덜한 아르바이트를 하며 살았을지도 모르고. 평범한 직장에서 평범한 월급으로 집도 사고 저축도 하면서 간간이 해외여행도 다녀오는 아내의 삶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지 않았다면, 돈을 위해 청춘을 갈아넣는지도 모른 채 지냈을 것이다.
나는 결혼을 고민해 본 적이 없다. 내게 결혼은 배고프면 밥을 먹고, 여덟 살이 되면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다만, 결혼한다고 일상이 이토록 다채로워질 거라고는 미처 예상치 못했다. 단지 배우자와 함께 한 지붕 아래 살아간다고만 생각했지, 일상이 이만큼이나 변할 줄은 정말 몰랐다. 앞서 결혼한 사람들은 신세한탄과 함께 '결혼은 미친짓이다'를 강조할 뿐, 결혼을 권장하는 경우는 드물었으니 더더욱 그럴 수밖에.
그러니 그냥,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지금의 모든 상황은 한 마디로 압축할 수 있을 것 같다.
단지 "운이 좋았다"라고밖에는.
지금에야 결혼해서 모든 게 나아졌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결과론적일 뿐이다. 난 얼마든지 그 반대의 상황에 처할 수도 있었다. 그러니 누군가에게 감히 결혼을 추천하진 못하겠다. 그는 나와 비슷하지만 나와 같지 않으며, 그가 만나는 배우자 또한 마찬가지일 테니까. 다만 이것 한 가지만큼은 확신한다. 배우자만큼 일상에 지각변동을 일으키는 존재는 세상에 없다고. 뒤틀린 모양이 어떻든 간에 변화를 받아들이고 스스로 책임질 자신이 있다면 결혼은 해 볼 법하다고. 어느 쪽으로든, 인생이 송두리째 바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