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나 똑바로 살자
"아휴, 월급이 통장을 스쳐 지나가네. 돈이 애들 학원비로 다 빠져나가서 돈을 모을 수가 없어"
"다 큰 애들이라 생활비 모자르면 알바라도 해가면서 잘 살 것 같은데 믿고 맡겨보는 건 어떠세요? 그리고 나중에 도움을 요청하면 그때 도와줘도 되지 않을까요?"
"아직 애들이라 아무것도 몰라. 대학교 등록금까지는 그래도 기본적으로 지원해줘야지."
위의 대화는 며칠 전 어느 지인과 나눈 대화다. 그는 애들 교육비 때문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래서 난 혹시라도 하는 마음에 애들이 알아서 잘 살지도 모르니 믿고 맡겨보라고 말을 건네봤지만 전혀 먹히지 않았다. '출처 불분명한 기본적인 것'들은 그래도 해줘야 한다는 말밖에 돌아오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자기 아이들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 그래서 난 생각했다. '부모라는 이유로 자녀의 가능성을 함부로 판단할 권리는 어디에 있는가'
나는 거의 방치된 상태로 자라왔다. 할머니 밑에서 자랐다고 하기에도, 부모님 밑에서 자랐다고 하기에도 애매한 상태로 어린시절을 보냈다. 다행히 성향의 탓이 컸는지 삐딱해질 수 있는 환경에 둘러싸였음에도 불구하고 얌전하게 컸다. 내가 생각해도 나의 부모님은 내게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본인들의 삶을 쳐내기에도 너무 정신없었기 때문이다.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나는 거의 방치된 채로 자라왔다. 엄마는 내게 딱 하나 남아있는 신발을 구멍이 났다는 이유로 버렸던 적도 있다. 그때 난 '내게 말로만 사랑한다고 하면서 정작 관심은 없구나'라는 것을 느꼈다. 그래도 부모님과 사이는 좋았다. 자기들 삶도 바쁜데 나를 챙겨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미워할 생각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난 학창 시절을 보낸 후 군대부터 갔다 와야겠다는 생각에 20살에 입대하고 22살에 전역을 했다. 정말 운이 좋게도 군 생활 도중에 책을 접하게 되었다. 그 시절은 내 인생에 있어서 잊을 수 없는 터닝포인트가 되었고 그 덕분에 난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했다. 생각의 변화가 미치는 영향이 상당히 컸는지 그 이후에 난 공부를 제대로 시작했고, 다니던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할 수 있었다.
난 그래도 부모님의 보이지 않는 품이 내 곁을 감싸주었다고는 생각한다. 공부하느라 밤새고 해가 뜰 때쯤, 집에 들어가는 길에 출근하는 아버지와 마주치는 일이 가끔 있었다. 그럴 때면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을 보여줬다는 생각에 혼자서 좋아했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런 내 모습을 보고 흐뭇할 거라고 혼자서 멋대로 상상했다. 그 후로도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혼자서 모두 잘 견뎌낼 수 있었다. 지금은 훌륭한 여자를 만나 결혼까지 하고 좋은 집에서 큰 빚도 없이 잘 살고 있다. 나에 대한 글을 쓰다 보니 조금 길어지긴 했지만, 요점은 부모님의 방치에도 불구하고 난 이렇게 성장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아버지나 어머니는 주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자식교육은 따로 할 필요가 없다, 그냥 내버려 두면 알아서 잘 큰다". 솔직히 나의 부모님이 주변 사람들에게 이런 얘기하는 것을 들을때면 조금 무책임한 발언이라고 생각이 든다. 내 생각에 우리 부모님의 방치는 '계획 없는 방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모님의 간섭이 없었기에 내가 이렇게까지 성장할 수 있었던 건 사실이었다.
이런 나여서 그런지 많은 부모님들이 아이들의 한계를 자신들의 지식 선에서 결정짓는 게 안타깝다고 생각한다. 자신들의 노후대책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으면서 자식의 학비를 챙겨주는 게 기본적인 도리라며 점점 가난해져가만 가는 삶의 대가는 누가 감당해야 할까. 많은 사람들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해선 관심도 없으면서 무조건 인서울만 외치며 자녀들을 의미없는 무한경쟁 속으로 집어넣는다. 그들을 보며 나의 부모님과는 또 다른 무책임을 느끼곤 한다.
나의 가장 친한 고등학교 친구들도 이젠 거의 반 이상이 부모가 되었다. 하지만 나와 내 친구들은 공부하던 애들이 아니었다. 공부를 어떻게 하는지에 대한 방법도 제대로 모르면서 애들 교육은 똑바로 시키겠다고 한다. 그러면서 하는 것이라곤 돈 쓰는 것밖에 없다. 마이너스 통장에 빚이 점점 늘어만 가는 형편에 애를 위한다는 핑계로 돈을 무리하게 쓰는 것이 자식을 위한 건지 본인을 위한 건지 알 수가 없다. 육아서를 읽는 친구들은 한 명도 보지 못했다. 그리고 스마트폰은 무조건 보지 말라고 한다. 근거도, 출처도 없는 무자비한 교육을 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본인의 인생을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사람일수록 자녀의 가능성을 함부로 판단한다. 최고의 교육은 부모로서 잘 살아가는 모습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자식을 키우는 부모라는 이유로 애들보다 본인이 더 많이 알고 있다고 착각한다. 내 자식은 내가 가장 잘 안다는 것을 무기로 삼는다. 실제로 자식한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에 대한 사유는 제대로 거치지 않은 채 남들 하는 것들을 따라하기에만 바쁘다. 주변에서 한다는 것들은 명분을 가리지 않고 모조리 흡수하려고만 한다. 모든 것은 자녀를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가만히 보면 인생이 고달픈 모든 핑계를 자녀에게로 탓을 돌리는 것만 같다.
우리는 기하급수적으로 변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아이들은 어른들보다 지혜와 처세술이 부족할 뿐이지, 그 외의 모든 것들은 웬만한 어른들보다 더욱더 많이 알고 있다. 그런 아이들을 가장 무시하는 존재가 바로 아이들과 가장 가까운 부모들이다. 어찌 보면 본인 자식에게는 본인의 영혼 일부가 깃들어 있어서 그런 걸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남 일은 객관적으로 잘 판단하면서 본인의 일은 그르치기만 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답답하다. 자기 자신의 인생조차 제대로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서 자녀에게 무엇을 바라는 건지 모르겠다. 시간이 지나가면 아이들만 성장하는 것이 아니다. 아이들과 성장하는 만큼 부모도 함께 성장한다. 단지 자신들은 다 안다는 어리석은 생각에 빠져 매일 똑같은 일상을 살아간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할 뿐이다. 아이들은 쑥쑥 커가는 데 비해 부모는 제자리걸음은 커녕 뒤쳐지기만 한다면, 그 부정적인 영향은 아이들에게 미치지 않을 수가 없다. 최고의 효도는 자식으로서 잘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최고의 교육은 어른으로서 성장하는 모습 그리고 부부로서 잘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수많은 책을 읽으며 깨달은 것 중 하나는 어른들은 아이들에게서 배워야 한다는 점이 많다는 것이다. 심지어 요즘 쏟아져 나오는 어설픈 힐링에세이보다는 오히려 애들이 보는 동화책에서 얻을 만한 인사이트가 훨씬 많다. 어른들도 세상에 태어났을 당시에는 거의 신적인 존재였다. 가장 순수한 상태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수많은 실패를 딛고서 모든 것을 배우려고 하는 그런 존재였다. 하지만 성인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세상의 물이 배어들고 동시에 본인의 잠재능력을 모두 까맣게 잊어버린 채 살아간다.
아이를 낳았다고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 아이를 낳았다고 해서 갑자기 철이 들거나 지혜가 생기지 않는다. 오히려 어른들은 떼 묻은 자신들의 생각을 애들에게 주입할 게 아니라, 순수한 아이들의 상태를 보고 배우며 자신들에게 묻은 떼를 씻어내야 한다.
평생 생활비 걱정을 하며 살아가는 부모 밑에서 성장해 봤으면서 자신조차 생활비 걱정을 하며 살아가는 삶을 유지한다면 자녀도 본인의 삶과 비슷하게 살아갈 확률이 높다. 힘들게 번 월급을 아무 생각 없이 자식교육에 쏟아붓기 전에 무엇이 진정 자녀를 위한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사교육도 일종의 상품이다. 진정 내가 돈을 쏟아붓는 것의 대가가 아이들의 미래에 진정 도움이 되는 것인지 아니면 마케팅의 최면에 걸려있는 건 아닌지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자기 자신과 자녀들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충분한 시간을 갖고 깊게 사유해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