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적인 그녀와의 만남

우연한 만남 치고는 필연적인 만남

by 달보


내게 일어난 두 가지 특이점

독서모임에 들어가 활동한 지 6개월이 되었고 모임의 규모는 점점 커지고 있었다. 독서모임 운영진이라는 감투를 쓰고 있었던 나는 문득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자체적인 소모임을 기획하게 되었다. 정기모임은 아니지만 내가 직접 주최한 자리인 만큼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의 시간이 아깝지 않도록 나눔 할 책을 준비하고, 질문리스트를 뽑고, 어떤 대화를 이어나갈지 등의 준비를 했었다. 처음엔 참석자가 많을까봐 인원제한을 두려고도 했었다. 누구보다도 독서에 열정적이었던 나와 책과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할 사람들이 많을 줄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나의 오만한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모임 예정일이 다가올 때까지도 참석을 누른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내심 섭섭하기도 하고 아쉬웠지만 '그럴 수도 있지'라고 생각하며 모임을 다음에 다시 열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모임에 대한 공지를 내리려는 순간, 왠지 모르게 뭔가 조금 더 질질 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 나의 성격 같았으면 진작에 공지를 내렸을 법도 한데, 난 왜 그날따라 유독 물고 늘어지고 싶었던 걸까. 이때가 내가 평소와는 다른 행동을 하게 된 첫 번째 특이점이었다.


결국 내가 공지했던 모임날을 맞았고, 어차피 모임에 참석할 사람은 없을 거라는 생각에 예정된 모임시간에 내가 할 것들을 미리 계획했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참석자가 한 명 있었다. 내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어떤 여성분이었다. 다행히도 내가 직접 주최한 첫 모임이 물거품이 될 것 같진 않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놓였었다. 하지만 나를 놀리기라도 하는 듯 잠시 후에 그 여성분은 "모임 시간에 일정을 맞추지 못할 것 같아 참석이 어려울 것 같아요"라는 얘기를 전해왔다. 내심 실망을 많이 했지만 어쩔 수 없이 모임을 완전히 내리려고 했었다. 하지만 여기서 두 번째 특이점이 일어났다. 나도 모르게 "일정을 하루종일 비워놨기 때문에 모임 시간은 얼마든지 조절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해버린 것이다. 결국 그 여성분은 마지못해 조금 늦더라도 모임에 참석하기로 결정하였다.


내가 알고 있는 평소의 나였다면 이런 상황에서는 진작에 물러났을 것이다. 지금도 이때만 생각하면 나답지 않은 돌발행동을 한 것이 정말 신기할 따름이다. 이런 건 단순한 우연일까.


이렇게 난 미래에 나의 아내가 될 사람과 1:1로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낯을 가리지 않고 처음 본 사람과도 얘기를 곧잘 했던 나였기에 왠지 그 분과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근데 내가 미처 몰랐던 사실이 하나 있었다. 그 여성분이 나와 같은 동네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난 그것도 모르고 엉뚱한 곳의 카페를 찾아보고 있었다. 그분이 먼저 언급하기 전까지만 해도 난 나와 같은 동네에 산다는 걸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사실 지역단위의 독서모임이었기에 같은 동네에 살고 있는 사람을 만나는 건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분이 나와 같은 동네에 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왠지 이 사람에 대한 남다른 호기심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잊을 수 없는 첫 만남

그렇게 약속시간이 다가왔고 난 20분 정도 먼저 도착해서 책을 읽고 있었다. 약속 장소는 어둑한 분위기의 술집 같은 카페였다.(의도한 것은 아니다) 나와 만날 사람을 기다리며 눈은 책 속의 글자를 따라가고 있었지만 긴장감 때문에 내용이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잠시 후, 모임에 나오기로 했던 그 여성분은 시간에 딱 맞게 도착했고 난 드디어 그녀와 처음 마주하게 되었다. 우린 짧막한 인사를 나누고 그녀는 개인 커피를 주문하고 와서 내 앞에 다시 앉아 마스크를 벗었다. 근데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예뻤다. 특히 피부가 정말 좋았다. 똑단발에 빨간 손톱, 양쪽 귀에는 귀걸이가 있었다. 그리고 목 주변이 시원하게 트여있음에도 따스해 보이는 옷을 입고 있었다. 그녀는 똑부러지고 단호하면서도 여성스러운 분위기가 돋보이는 여자였다. 그렇게 내가 그녀와 대면한지 5분 정도 지났을까. 내 마음 속에는 이미 '이 여자와 진지하게 만나봤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난 곧바로 태세전환에 돌입했다. 그때 그 모임의 취지는 책과 독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려 했던 건전한 토론이었지만, 난 '이 자리는 내 인생의 소개팅이다'라는 마음을 먹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갑자기 주제를 전환하여 나의 시커먼 속내를 드러내진 않았다. 난 책에 관해서는 어떤 이야기도 할 자신이 있었고, 그런 이야기를 통해 나의 매력을 자연스럽게 발산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원래 2시간 정도만 모임을 갖고 집에 갈 생각이었던 나는 어떡해서든 시간을 끌기 위해 안간힘을 썼고, 그녀는 대화를 할수록 참 매력적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대화를 하던 도중에 난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듣게 된다. 알고 보니 그분은 이전에 소개팅으로 만난 남자를 만난 후에 이 자리에 왔던 것이다. 난 애써 표정관리를 하면서 마음속으로는 커다란 실망을 했다. 마침 그녀는 소개팅남 얘기가 나온 김에 그와 있었던 한 가지 에피소드를 내게 들려주며 그 남자에 행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봤다. 나의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난 내가 살아오며 쌓아왔던 모든 지식을 총동원해서 그 남자는 무조건 별로라고 말했다. 그녀가 소개팅남과 만나고 있다는 사실은 정말 받아들이기 싫었지만, 아직 그녀의 옆자리는 비어있다는 것으로 나를 달랬었다. 그렇게 정신을 부여잡고 나머지 대화를 이어나갔었다.


야속하게도 시간은 쏜살 같이 흘러 어느새 밤 11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고 아쉽지만 난 자리를 끝낼 수밖에 없었다. 그녀와 시간을 보냈던 30초 같은 3시간 동안 마음속으로는 '어떻게 하면 다음에 만날 핑계를 자연스럽게 만들 수 있을까'에 대한 생각만 했었다. 근데 하늘이 날 도왔을까. 운이 좋게도 마침 그날 그녀는 자기가 읽고 있던 책을 가지고 왔었다. 난 그 책이 내가 놓치면 안 될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흑심을 품은 채로 난 그 책을 대뜸 읽어보고 싶다며 빌려달라고 강하게 말했다.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내가 그날 그녀가 가지고 왔던 책을 빌렸던 건 정말 잘한 일이었다. 그 책 덕분에 전혀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지극히 자연스러운 다음의 만남을 기약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린 카페를 나온 뒤에 서로 좋은 시간을 보냈다며 인사를 나눴다. 인사를 나누며 그녀는 내게 자기 집은 여기서 바로 보이는 저 아파트 살고 있다며 말해주었다. 순간 '우리는 원래 만나게 될 운명이었나'라는 생각이 들며 흠칫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가리킨 아파트는 바로 내가 사는 곳 바로 맞은편에 위치한 아파트였기 때문이다. 같은 동네에 산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토록 가깝게 살고 있다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다시 보니, 내가 이직해서 발령받은 기숙사 주변에는 내가 좋아하는 도서관, 내게 필요했던 24시간 헬스장, 그리고 심지어 이젠 내가 마음을 품게 된 여자가 사는 집까지 가깝게 자리하고 있었다. 여러 가지 놀라움이 채 가시기도 전에 그녀는 그 아파트가 심지어 자가라고 하였다. 순간 살짝 멍한 느낌이 들었다. 얼굴도 이쁜데 본인 명의의 집도 있고 차도 있고 탄탄한 직장까지 다니고 있다고 생각하니, 내겐 뭔가 과분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용기를 잃고 싶지 않은 마음에 애써 무시하기로 했다. 그렇게 우린 각자의 집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난 집으로 걸어가는 내내 그녀에게 '맥주 한잔 하실래요?'라는 말을 건네고픈 욕구를 애써 누르느라 혼자 애를 먹었다.


2021년 7월 10일, 그녀를 처음 만난 그날의 날짜는 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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