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수 좋은 달

만날 사람은 어떡해서든 만나게 되어 있다

by 달보


운수 좋은 달

지금 생각해 보면 난 그녀와 내가 이어질 수 있게끔 하늘이 도와준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그때 난 교대근무로 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주말에 쉬는 달이 돌아와야만 주말에 쉴 수 있는 환경이었다. 그런 달은 1년에 몇 번 되지 않았다. 그런데 하필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나기 시작했을 때부터 그 한달 동안은 정말 운이 좋게도 내가 주말에 쉬는 달이었던 것이다. 다행히도 그런 운이 내게 따라준 덕분에 그녀와 조금씩 친해지고 있었던 나는 그녀와 주말마다 만나게 되었다.


신기한 건 영화를 보자는 나의 제안이 보기 좋게 걷어 차인 뒤로부터 우리는 매일 카톡을 주고받으며 썸 아닌 썸을 타기 시작했다. 난 그녀와 나의 관계를 어떡해서든 발전 시키고자 항상 고민하고, 매번 노력하고 그만큼 티를 냈다. 바보가 아닌 이상 누가 봐도 자기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똑 부러지는 성격의 그녀는 '너와 나는 그냥 친구다'라는 것을 주기적으로 내게 상기시켜주었다.


그렇다고 쉽게 포기할 수는 없었다. 난 남녀 사이에 온전한 친구관계는 이루어질 수 없다고 생각하는 부류이지만 그녀를 향한 내 마음이 가라앉기는 커녕 날로 높아져만 갔기에 그 열기가 식을 때까지만이라도 이런 애매한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던 욕망이 컸다. 그래서 매번 비수처럼 날아와 가슴에 꽂히는 말을 들으면서까지도 난 그녀와 연락하며 일상을 공유하고 가끔 만나 대화를 나누려고 했다. 그땐 그것만으로도 행복했다.


그렇다고 너무 처절한 짝사랑을 한 것도 아니었다. 내가 주말에 쉬는 그 한달동안 우리는 참 많은 것을 함께 했다. 그녀와 함께 한 번도 경험해본 적 없는 유기견 봉사활동도 다녀오고, 시에서 주최하는 인문학 강의를 함께 듣기도 했다. 그럴 때면 마치 그녀와 난 연인 사이가 된 것만 같았고, 그런 우리의 모습은 누가 봐도 연인처럼 볼 것만 같았다. 그땐 그런 기분이 드는 것만으로도 혼자 많이 좋아했었다. 그에 비해 그녀는 여전히 내게 '좋은 친구 관계'를 어필하며 나름의 차단선을 긋고 있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녀의 그런 칼차단이 내게 채찍이었다면, 그녀와 함께 하는 모든 시간들은 내게 아주 달달한 당근이었다. 그래서 그 시간들을 견딜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만나서 가장 많이 하는 건 대화였다. 사귀는 것도 아니어서 딱히 할 것도 없는 사이였던 우리는 그저 길을 걸으며 대화를 나누거나 퇴근을 하고 난 후 가볍게 맥주 한잔을 곁들이며 대화를 나누는 것이 전부였다. 그에 비해 그녀의 속마음에 대해서 알아낸 건 전혀 없지만, 그녀를 원하는 내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간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난 하루종일 그녀만 생각했었다. 원래 내 성격대로라면 이런 애매한 관계는 서둘러 매듭을 짓고도 남았을 텐데, 그때만큼은 그냥 그런 상태라도 지키고 싶었다. 그녀의 마음은 얻지 못할지언정 이렇게 연락을 주고받고 가끔 얼굴을 볼 수 있는 사이가 된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었다.



결국 한계에 다다른 마음

그런 행복한 날들도 슬슬 저물어가고 있었다. 점점 내가 주말에 쉬지 못하는 주가 다가오고 있었가 때문이다. 난 그동안 행복한 시간들을 보냈지만, 사실 그만큼 마음이 아프기도 했다. 날로 커져만 가는 마음을 표현할 수 없는 그 답답함이 너무나 괴로웠기 때문이다. 우린 당장에 사귀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관계처럼 여겨지다가도 여전히 내게 내리꽂히는 그놈의 '넌 좋은 친구야'라는 말이 나를 꼼짝달싹 못하게 만들었다. 만약 그녀가 내게 그런 말만 하지 않았더라도 난 진작에 고백해서 사귀던, 차이던 뭐라도 저질렀을 것이다. 하지만 '나를 남자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대놓고 못을 박는 여자에게 고백한다는 것은 스스로 관계를 정리하겠다는 것과도 같았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특히 난 평소에 선택과 결정에 대해서 망설임이 없는 편이었지만, 차마 그때는 정말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와의 관계를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너무나도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나도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난 혼자서 조용히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언제나 그녀는 내게 재차 친구를 강조했지만, 난 친구관계로 지낼 생각이 전혀 없었다. 마음이 아프고 독서모임을 나가더라도 차라리 관계를 정리하고 연락을 하지 않는 것이 그나마 내가 더이상 덜 다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마음을 품게 되면서 난 그녀와 처음 만났던 날부터 시작해 그동안 함께 해왔던 잊지 못할 추억들을 떠올리며 그녀의 집 근처에 있는 공원을 혼자서 자주 걷곤 했다. 그리고 그녀가 사는 집을 먼 발치에서 바라보며, 그 집에서 그녀와 내가 함께 살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기도 했다. 그렇게 혼자 웃기도 하고 씁쓸한 기분을 느끼기도 하면서 마음을 천천히 굳히고 있었다.


그렇게 행복한 한달이 다 지나갈 무렵 다가온 마지막 주말에 그녀는 나를 자기집에 초대했다. 핑계는 집에 짬처리할 게 많은데 밥 안 먹었으면 와서 같이 먹자는 거였다. 속으론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기가 힘들었지만, 또다시 상처를 받을까봐 애써 마음을 내리누르기 바빴다. 그래도 만약 내게 강아지꼬리가 달려 있었다면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마음을 안고서 긴장한 상태로 그녀의 집을 방문했고 우린 데이트 아닌 데이트를 했다. 우린 같이 밥을 먹고, 햇살이 비치는 나른한 오후에 커다란 티비로 영화를 봤다. 그때 봤던 영화 내용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녀의 손을 잡으려고 기를 쓰던 내 손가락을 뜯어말리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손을 그냥 잡아버릴까 싶다가도 잡는 순간 어떤 비극이 벌어질지 몰라 정말 힘겹게 참았다. 그렇게 다이나믹했던 오후도 아름다운 노을과 함께 저물기 시작하고, 결국 우린 술을 곁들인 저녁까지 함께 하게 되었다.



술은 참 좋은 것이다

저녁을 먹으며 우리는 맥주를 마셨다. 원래 소주파인 나는 그녀 덕분에 한달 동안 맥주를 정말 많이 마셨다. 맥주는 배만 부르고 취기는 오르지 않았지만, 그런 맥주도 그녀와 맞추기 위해 자주 먹다 보니 어느정도 취기가 올라오긴 했다. 하지만 원래 술이 약했던 그녀는 나보다 먼저 취기가 오르고 있었다. 그렇게 스멀스멀 올라온 술기운은 그녀에게 알 수 없는 용기를 불어넣었던 것 같다.


도통 속을 알 수 없던 그녀가 갑자기 내게 마음을 고백한 것이다. 너무나 당황했던 나는 정말 얼음이 될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관계를 서서히 끝낼 준비를 하고 있던 내게 그 순간은 내 인생에서 결코 잊을 수가 없는 하나의 커다란 사건이 되었다. 대충 알고는 있었지만, 술은 참 좋은 것이었다.


그녀와 나는 그렇게 사귀게 되었다. 난 세상 전부를 얻은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고,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아름다워지기 시작했다. 한낯 독서모임에서 알게 된 도통 속내를 알 수 없는 여자였던 그녀는 내게 너무나도 소중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신기했던 건 내가 그동안 연애하면서 만났던 여자들과는 다르게, 왠지 그녀는 한 명의 여자라기보단 '하나의 존재'로서 존중하고 싶은 마음이 내면 깊은 곳에서 일어났다.




p.s

(현재의 내 와이프는 그때 자기도 왜 그랬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 날 약간의 후회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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