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진심은 무엇일까
책은 정말 좋은 도구다. 자연스러운 만남을 아주 자연스럽게 성사시켜 준다. 그녀와의 첫 만남에서 내가 가장 잘했다고 생각하는 건 그녀가 가지고 왔던 책을 빌린 것이었다. 난 내가 빌렸던 그 책으로 인해서 어쩔 수 없이 그녀와 다시 만날 수밖에 없는 자연스러운 핑계가 생겼다는 사실에 혼자 정말 기뻐했다. 그리고 그 기회를 가장 잘 살릴 수 있는 방법은 그 책을 제대로 읽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책을 돌려주는 핑계로 그녀와 다시 만났을 때, 독서에 임하는 나의 진지한 태도를 매력으로써 어필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녀를 향한 나의 흑심이 너무 드러나면 좋을 게 하나도 없을 것만 같았기에 최대한 은밀하면서도 깊게 접근하려 했다.
나와 그녀의 두 번째 만남을 성사시켜 준 그 책은 '한나 아렌트, 세 번째 탈출'이라는 그래픽노블 그림책이었다. 그림책인 것치곤 내용이 단순하지 않아서 사유할 만한 부분이 많은 책이었다. 하필 난 그런 사색할 만한 구석이 짙은 내용이 담긴 책을 좋아했고, 3일 만에 완독한 후 나름의 감상평까지 탄탄하게 준비했다. 그러고 나서 난 그녀에게 '책을 다 읽었으니 만나자'는 연락을 건넸다. 만약 혹시라도 경비실에 놔두고 가라고 할까 봐 노심초사했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고 난 그녀를 다시 만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두 번째 만남은 내가 생각했던 것 그 이상이었다. 그녀와 나는 맥주를 마시기로 했기 때문이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싶을 정도로 혼자서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물론 마음을 품은 여자와 맥주 한잔 한다고 해서 관계가 바로 이루어지는 건 아니지만, 그녀와의 겨우 두 번째 만남에서부터 맥주를 마신다는 것 자체가 내겐 하나의 기적이었다. 언제 옷을 산 지 기억도 나지 않는 내가 새 옷으로 온몸을 휘감은 채 그녀를 만나러 약속장소에 나갔다.
사실 그 두 번째 만남은 내가 그녀에게 빌렸던 책을 돌려주는 자리이기도 하고, 맥주를 마시며 그녀에 대해 조금 더 알아가는 자리이기도 했지만, 나의 가장 큰 목적은 따로 있었다. 그건 바로 그녀가 내게 얘기해 주었던 그 소개팅남과 어떻게 진행되어가고 있는지의 여부를 알아내는 것이었다. 마음 같아선 소개팅을 하건 말건 그녀에게 들이대고 싶었지만 성급한 마음에 모든 것을 망치고 싶진 않았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그 소개팅남과 더 이상 연락하지 않는다'는 말을 듣게 해달라고 조용히 기도했다.
우린 노랑통닭이라는 치킨집에서 만났다. 난 원래 치킨을 먹더라도 소주를 먹는 파인데 그날만큼은 정신을 차려야겠단 생각에 그녀와 같이 맥주를 마셨다. 다행히 가게 안에는 사람도 별로 없었고, 분위기도 좋았다. 그리고 난 겨우 두 번 만나고 이 관계가 흐지부지되는 것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 책 한 권을 더 준비해 갔다. '내가 책을 빌려서 잘 읽었으니 나도 빌려주고 싶은 책이 있다'라는 아주 훌륭한 핑계를 대기 위해서였다. 그러면서 내 목적을 달성하고자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나는 슬슬 본론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녀에게 소개팅남과 어떻게 되어가는지 물어봤던 것이다.
그 사람과는 더 이상 연락을 하지 않아요
그녀의 대답이었다. 정말 하늘이 도왔을까. '더 이상 연락을 하지 않는다'라는 대답을 듣고 정말 세상을 다 얻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물론 그 소개팅남과 연락이 두절이 됐다고 해서 내 마음이 그녀와 이어지는 건 아니었지만, 그땐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정말 큰 힘이 되었다. 그렇게 기분 좋은 신호탄을 시작으로 우린 부드럽게 대화를 이어나갔고 참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와 나는 어떤 주제를 다루더라도 오래도록 진득한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게 참 좋았다.
시간은 역시나 쏜살같이 지나갔고 우리는 가게 밖을 나왔다. 너무나도 아쉬웠던 나는 그녀에게 맥주 한잔을 더하자고 제안했고 그녀도 흔쾌히 동의했다. 확실히 그날은 세상이 나를 도와주는 듯했다. 그렇게 우린 2차 술자리를 가졌고 간단히 한 잔만 더 먹고 가자던 우리였지만 어느새 각자 4잔까지 추가로 마셨다. 그렇게 술을 마시며 대화를 하던 도중 우린 둘 다 마블영화를 좋아한다는 걸 알았고, 하필 그 당시에 블랙위도우가 개봉했었다. 그래서 난 속으로 영화를 같이 보러 가자는 말을 꺼내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솔직히 이 정도 상황까지 왔으면 난 거의 그린 라이트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후에 무슨 참변을 당할지는 상상도 못 한 채 말이다.
내가 처음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그녀와 많은 시간을 함께했지만, 그래도 너무 아쉬웠던 나는 집까지 바래다주겠다며 억지를 부렸다. 그녀는 딱 봐도 그런 건 전혀 바라지 않아 보였지만, 내가 질질 따라가는 것을 마지못해 허락해 주었다. 덕분에 난 그녀의 집 앞까지 따라가며 조금이라도 더 같이 걸을 수 있다는 생각에 혼자서 좋아했다. 그녀의 집은 언덕 위에 위치한 아파트였고, 언덕 중간에는 LED 전구가 이쁘게 달린 외부 엘리베이터가 있는데 그걸 타고 올라가면 아파트 주차장 입구까지 바로 이어지는 신기한 구조였다.(그래서 난 아직도 그 엘리베이터를 보면 그때의 그 시절 생각이 많이 나곤 한다)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천천히 걸어갔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아파트 입구까지 다다랐던 우리는 작별인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난 발길을 돌려서 혼자 집으로 걸어갔다. 그때 그냥 얌전히 걸어가기만 했어도 '그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테지만, 난 결국 사고를 치고야 만다.
(문제의 카톡 내용)
"오늘 즐거웠습니다. 좋은 시간이었어요 ㅎㅎ"
"네 저도 즐거웠습니다."
"OO님, 혹시 블랙위도우 같이 보러 가실래요? ㅎㅎ"
"아니요. 괜찮아요."
저 '아니요, 괜찮아요.'는 실제로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저렇게 답장이 왔었다. 그린라이트라고 생각했던 나의 꿈은 완벽한 착각이었다. 첫 만남부터 시작해 두 번째 만남, 술자리, 2차까지 모든 게 탁탁 맞아 들어간다고 생각했던 나의 로맨스는 박살이 나고 말았다. 내가 너무 성급했나 싶다가도 다시 생각해 보면 '마음이 없는 남자와는 그런 시간을 가지지 않을 텐데'라는 집착을 버리지 못했다. 너무 뻘쭘했던 나는 '이제 그녀와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라는 걱정을 하면서 한숨을 푹푹 쉬며 집에 걸어갔다. 재밌는 건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의 나조차, 그때 보기 좋게 걷어 차인 나를 놀려주고 싶은 마음이 일어난다.
(ㅋㅋㅋㅋㅋㅋㅋ)
"그래, 난 고백했다가 차인 것이 아니다."라며 아무리 스스로를 위로해 봐도 거의 그 정도에 버금갈 만큼의 상처를 입은 한 마리의 참새가 따로 없었다. 내 인생을 구해주기도 하고, 그녀와의 만남을 자연스럽게 이어주기도 했던 책마저도 이젠 그 역할이 다한 듯 싶었다. 그날 이후로 이제 그녀에게 내가 먼저 연락하면 안 될 것 같았기에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려고 마음을 다잡고 있었다.
하지만 이게 웬일인가. 다음 날 그녀가 먼저 내게 연락을 해왔다. 그리고 그녀는 뜬금없이 내 이름의 한자 뜻을 물어봤다. 아무것도 아닌 질문인데 그때 난 그것이 왜 그토록 안심이 되었을까. 이후로 그녀가 보내오는 하나하나의 톡은 다 죽어가던 나무를 살리는 한 움큼의 물줄기와도 같았다. 그날부터 나는 그녀와 굳이 책을 핑계로 하지 않더라도 서로 평범하게 연락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의 마음이 왠지 조금은 열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일상을 공유하며, 흔히 썸이라고 하는 그런 비슷한 기운이 우리 곁을 맴돌기 시작했다.(실제로 나의 아내는 그때 그 시절의 본인이 자기가 생각해도 미친년이었던 것 같다고 고백했다)
누가 그랬다. 글을 쓰는 건 인생을 두 번 사는 일이라고.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나의 아내와의 추억들을 이렇게 떠올리며 글로 옮겨보니 참 기분이 묘하다. 내가 걸어온 지난날들이 정말 아름답게 여겨진다. 그녀의 차갑던 답장도, 나의 어리석은 착각도, 그렇게 시작된 우리의 관계도 하나같이 너무나 찬란하고 아름답고 눈물이 날 정도로 감동스럽다. 지금도 내 뒤에서 특유의 커다란 숨소리를 내쉬며 폰을 만지고 있는 아내가 참 사랑스럽게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