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을 구하기로 결심하다
새로운 곳에서 생활하는 건 언제나 두렵지만 설레이기도 하다. 어떤 일을 겪을지, 어떤 사람들을 만날지 기대 반 두려움 반인 상태로 회사가 지정한 기숙사로 이사를 완료했다. 기숙사는 원룸이었다. 예전 서울에서 회사를 다니던 시절에 살았던 그 작디작은 공간이 생각나는 곳이었다. 하지만 나의 상태는 그때와는 많이 달랐고 도망치듯 떠나온 곳이지만, 왠지 모르게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새로운 거처가 낯설 법도 한데 내가 정말 마음이 놓였던 이유는 기숙사 바로 맞은편에 보기좋게 자리잡은 엄청 큰 도서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20대를 돌아보며 가장 잘했다고 생각하는 건 이런저런 실패를 겪는 와중에 책을 놓지 않았다는 것이다. 좋을 때나 힘들 때나 언제나 책을 곁에 두며 살아왔다. 독서를 해온 덕분에 거의 인간개조 수준으로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었던 나는 평생 책을 읽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뭔가 제대로 살고 있지 않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 내 좁은 방에 책만큼은 언제나 가득했다. 그런 나였기 때문에 거대한 도서관이 기숙사 앞에 있다는 것은 내게 큰 위안이 되었다.
그렇게 새로운 직장에 출근하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났다. 난 어딜 가도 적응을 잘하는 편이었다. 그래서 같은 직장 동료들과는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 내가 들어간 곳은 교대근무를 하는 곳이었고 교대근무는 태어나서 처음 해보는 일이었다. 교대근무를 시행하는 회사를 다녀보니 특징이 몇 가지 있었다.
첫 번째는 직장동료들이 형, 동생 사이처럼 느껴졌다. 이건 양날의 검이기도 했다. 그만큼 친하게 지낼 수도 있지만, 그만큼 함부로 대하기 쉬운 관계로도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아직도 처음 들어갔을 때의 시절이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한번은 그곳에서 만난 형님들이 내게 몇 가지 물어보더니 "딴 건 몰라도 넌 결혼하긴 글렀다"는 말을 했었다. 이유는 가진 것도, 모은 것도 없이 치아교정까지 하고 있는 어리지도 않은 남자가 연고도 없는 지역에 홀로 왔기 때문이라고 했다. 말 그대로 팩트폭격이긴 했지만 별다른 타격은 없엇다. 난 알게 모르게 나에 대한 자신감은 남달랐기 때문이다. 또 한번은 나의 취미를 물어보길래 독서라고 대답했더니, 말하기 싫으면 하지 말라고 핀잔을 줬던 기억도 난다. 책 같은 건 그들의 세계관에서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 것 같았다.
두 번째는 술을 정말 좋아한다. 편견일수도 있지만 교대근무를 하는 사람들은 술자리가 정말 잦았다. 처음엔 내가 먼저 친해지고 싶어서 술자리에 일부러 참석했지만, 조금 친해지고 나니 시도 때도 없이 날아들어오는 술자리 제안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었다. 사람들과 빨리 친해져야 일도 더 잘 배우고 내가 편해질 것 같은 생각에 매일 날아 들어오는 술자리를 차마 거부하진 못했다. 그렇게 하루하루 술에 절어가며 수습기간을 버텨냈었다.
그렇게 일도 조금씩 적응되어 가다보니 다른 것들이 마음에 걸리기 시작했다. 옆구리가 시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 당시 난 전 여자친구와 헤어진 지 1년이 다 되어가던 시점이었다. 난 운이 좋게도 20대 시절동안 여자친구가 없었던 가장 큰 공백기간이 3개월이었다. 그런 내게 1년이라는 시간은 이전에 겪어보지 못했던 공허함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생각만 해선 될 게 없다는 판단을 내린 후 일단 사람부터 만나야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내가 여가 시간에 하는 것이라곤 책 읽는 것밖에 없었기에 독서와 관련된 모임을 찾아봤다. 그렇게 한 독서모임에 가입하고 나서 처음으로 직장동료가 아닌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독서모임에 들어가고 나서 느낀 건 독서모임이라고 해서 사람들이 책을 다 열심히 읽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난 혼자서도 책을 잘 읽는 편이었지만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며 같은 책을 읽고 서로의 생각들을 공유하면 좋을 것 같아서 독서모임에 가입한 것이었다. 하지만 내 생각과는 달리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 같이 읽기로 한 지정도서조차 겨우 완독할까 말까였다. 바빠서 못 읽는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내가 봤을 때 그들은 독서를 따로 시간을 내서 할만큼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진 않아 보였다. 그런 덕분에 알아서 책도 잘 읽고 생각발표도 잘했던 나는 모임에서 자연스레 주목을 받게 되었다.
물론 옆구리가 시려서 모임에 들어간 건 맞지만 독서모임에 참여를 한 이상 누구보다도 책을 열심히 읽으려고 노력했다. 사람을 만나는 것도 좋지만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은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단지 내가 할 수 있는 것에만 집중하려 했었다. 내가 독서모임에서 할 수 있는 건 꾸준히 책을 읽고 모임에 매번 참석하는 것이었다. 그런 마음을 지니고 활발히 활동해서 그런지 모임장은 나를 운영진으로 활동해 달라며 부탁을 했고, 그렇게 난 모임에 참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운영진으로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만약 그렇게 내가 독서모임의 운영진이 되지 않았다면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한편 회사 생활도 무난하게 잘 흘러가고 있었다. 점점 나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나에 대한 평가도 좋아진다는 걸 몸소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놈의 술자리가 여전히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사실 난 기숙사에서 혼술을 자주 할 만큼 술을 좋아했지만 난데없이 불쑥 들어오는 직장동료들의 술자리 제안은 나를 괴롭게 만들었다. 난 항상 퇴근하거나 쉬는 날이면 무엇을 할지 머릿속으로 계획을 짜두는 편이다. 사람을 만나진 않을지언정 혼자서는 항상 바빴다. 그런 내게 갑자기 훅 들어오는 술자리는 내가 계획한 일들을 하나도 못하게 만들었다. 이상하게도 그들은 미리 술자리에 대한 약속을 잡을 줄은 몰랐다. 단 한 번도 전날에 미리 얘기하는 법이 없었고 항상 즉흥적이었다. 퇴근하기 직전에 갑작스럽게 제안하는 술자리는 시간이 지나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래도 내가 매일 봐야만 하는 사람들이기에 항상 내 시간을 지켜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퇴근길에 궁전처럼 눈 앞에 뻗어 있는 수많은 아파트들을 바라보며 '이렇게 살아선 아무것도 안 되겠다'라는 생각이 번개처럼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특히 연애시기를 놓치고 결혼을 못할 것 같았다. 그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나서 난 두 가지 결심을 했다. 첫 번째는 모든 술자리 거절하는 것이었다. 그 날 이후로 난 모든 술자리를 거부하기 시작했다. 직장 동료들은 그런 나를 보며 처음에는 당황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지만 시간이 조금 흐르니 '나는 술자리엔 참석하지 않는 사람'으로 이미지가 굳어지기 시작했다. 두 번째는 운동을 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피곤하고 힘들어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운동을 하기로 했다. 그땐 교대근무를 돌다 보니 시간적인 제약이 따랐었지만 다행히도 24시간 헬스장이 근처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곳에 바로 회원등록을 하고 낮이고 새벽이고 가리지 않고 퇴근하면 무조건 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도서관도 그렇고 24시간 헬스장도 그렇고 회사가 무작위로 지정해준 기숙사 근처엔 내가 필요한 모든 것이 다 있었다.
그렇게 난 술자리를 끊어내고 퇴근할 때마다 항상 운동부터 하는 생활에 돌입했다. 사람이 갑자기 마음먹는다고 하루아침에 달라지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뭔가 절벽 끝에 서 있는 사람 같았다. 그리고 책을 읽으며 나의 행동을 제한하는 것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런 것들이 어떤 원리로 나의 행동을 가로막는지 머릿속으로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래서 운동하기 싫은 마음이 들 때면 그 마음을 이기려 하지 않고 타협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단지 가기 싫은 마음을 그대로 안고 '헬스장에 도착하는 것'에만 집중하였기에 매일 나와의 약속을 지킬 수 있었다.
사람 마음은 속을 알 수가 없는 게 항상 운동하러 가기 전엔 가는 것 자체가 귀찮고 몸도 피곤해서 정말 가기 싫은 마음이 들다가도 헬스장에 도착하기만 하면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운동을 정말 열심히 하게 된다. 사람에게 진심이란 없는 것 같다. 마음이란 단지 상황에 따라 매번 변하는 카멜레온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하튼 그렇게 난 내 몸을 헬스장에 집어넣는 것에만 집중했고 그 덕에 운동도 매일 하고 술자리도 거의 완벽하게 끊어낼 수 있었다.
사실 술을 먹지 않고 운동을 한다고 해서 시리던 옆구리가 따뜻해지고 없던 인연이 마법처럼 생겨나진 않는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던 나는 가만히만 있을 수는 없었기에 일단 술을 끊고 운동부터 하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라도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아야만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그 단호한 결심 이후로 내 삶에 어떤 좋은 기운이 들어오기 시작했던 게 아닌가 생각한다. 실제 그 뒤로 내게 많은 일들이 일어났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