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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보 Apr 03. 2023

그때 내가 도망치지 않았다면

인생이 어떻게 흘러갈지는 아무도 모른다


난 살면서 평균 이하의 범주에 속했던 적이 별로 없었다. 그런 내가 책까지 읽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못할 게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자신감이 올라가고 하는 것마다 결과가 좋았다. 날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도 '뭘 해도 잘 될 것 같다'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군인 시절에는 상급자의 눈에 띄어 이등병 때부터 작전실로 올라갔다. 학원을 다닐 때는 교육팀장의 제안으로 오전엔 수업을 듣고, 오후에는 강사로서 다른 수강생들을 가르쳤다. 알바를 할 때는 추천을 받아 트레이너로 진급하고, 정규직 매니저 제안까지 받았다. 대학교로 복학하고 나서는 과대표를 추천받고, 교수님의 제안으로 동아리를 개설한 후 수업이 끝나면 3,40명의 후배들을 가르쳤다. 졸업할 때까지 과탑을 놓치지 않았고, 교수님의 추천서를 통해 서울에 있는 큰 기업에 졸업을 하기도 전에 입사를 할 수 있었다.


난 이 모든 과정을 겪는 동안에도 친구들과 원 없이 술을 마시고 놀았으며, 연애사업도 활발하게 잘 된 덕분에 옆구리가 시린 날은 없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 그 시절은 너무나도 찬란했다. 하지만 그 빛나는 세월들이 내게 독이 될 줄은 몰랐다.




예정에 없었던 퇴사

서울에 올라가서도 난 하던 대로만 하면 길이 보일 거라고 생각했다. 열심히만 하면 성공할 줄 알았다. 내 모든 것을 걸면 그만큼 보상이 돌아올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사회생활은 결코 쉽지 않았다.


난 스스로 잘난 맛에 흠뻑 취한 나머지, 내가 무엇에 약한지 어떤 것을 두려워하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깨닫지 못했다. 아니 알아볼 생각도 없었다. 평생 동안 듣기 좋은 말만 듣다 보니, 나를 향해 날아오는 쓴소리에 대한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순진하기 짝이 없었던 나는 사회라는 필드에 진출하여 10원짜리 욕이 귀에 내리 꽂히고 나서야 비로소 나의 무지함을 깨닫기 시작했다.


난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말을 듣는 게 너무 무서웠다. 나의 모자람이 온 세상에 들춰지는 게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두려웠다. 내가 어느 경지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그런 날들이 계속 이어질 거라는 생각에 한없이 막막했다. 인복이 좋았던 나는 한 마디 욕을 하면 열 마디 이상의 가르침을 주려고 하는 보기 드문 훌륭한 사수를 만났으나, 그땐 그런 귀인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비수처럼 꽂히는 쓴소리만 마음에 새겼었다.


욕을 많이 먹는 만큼 더 긴장하고 일에 미쳐서 열심히 하다 보니 어느새 나도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앞으로 내가 감당해야 할 부분이 보이지 않는 산처럼 높게 쌓여있다는 생각에 겁이 났다. 쥐꼬리만 한 월급을 받기 위해서 내가 희생해야 될 부분이 너무나도 크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난 결국 조용히 혼자서 도망칠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때 실제로 나는 4개월 보름동안의 프로젝트 기간 동안 단 한 번의 휴무날도 없이, 하루 평균 18시간 이상의 근무를 했다. 아침 7시까지 출근해서 웬만하면 밤 11시가 넘어서야 퇴근했다. 그 당시만 해도 밤 10시쯤에 퇴근하면 입사동기와 함께 기뻐 날뛰면서 '이런 날에 맥주라도 한잔 해야지'라고 할 정도였다. 그렇게 일하고 내 통장에 꽂히는 월급은 세후 147만 원이었다. 서울에서 살았던 원룸의 월세는 관리비포함 54만 원이었다.


이 지옥 같은 현실로부터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은 시간이 갈수록 덩치가 불어났고, 주변 사람들에게서 내 표정이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는 소리를 들을 만큼 나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결국 그 부정적인 기운의 지배 아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퇴사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렇게 나는 이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이른 시기에 회사를 그만두기로 결정했다.


퇴사를 통보하고 난 후 내가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이사님이 직접 찾아오실 정도로 뜯어말리셨지만, 이미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이곳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으로 가득 들어차 있었다. 그렇게 찬란하기만 했던 나의 20대는 그때부터 꼬이기 시작했다.



끝없는 방황의 시작

그때 아마 퇴사를 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한 분야에 대해서 전문적인 지식을 갖춘 경력자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외적으로 내가 무엇을 잃었을지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다. 그 당시 말도 안 되는 업무환경과 근무시간은 지금 생각해도 압도적으로 인생을 갉아먹는 것들이었다. 그렇게 최악의 환경으로부터 드디어 탈출하긴 했지만, 나의 사회생활 제1막이 일종의 실패로 확정됐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문제는 그때의 퇴사가 마지막이 아니라, 시작이었다는 점이다. 어릴 때부터 난 어딘가에 취업하면 사장은 못 되더라도 임원급의 조력자로서 성공적인 경력을 쌓을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하지만 임원은커녕 '사원'딱지를 떼기도 전에 입사하고 퇴사하는 것을 반복하기 시작했다.


내가 하는 것마다 대충 하는 버릇이 있었다면 차라리 손해라도 덜 봤을 텐데, 뭘 해도 잘해야 된다는 생각이 강했던 나는 항상 입사하기 전에 철저히 준비를 했었다. 그게 지나고 나서 생각해 보면 정말 큰 독이었다고 생각한다. 시간이 그만큼 소요됐기 때문이다. 입사를 하려고 준비한 세월보다, 입사하고 난 후 퇴사하기까지의 기간이 훨씬 더 짧은 사태가 반복해서 벌어졌다.


그런 데 비해, 그동안 내 모습을 지켜봐 왔던 주변 사람들은 내가 그런 만행을 보고서도 항상 응원해 주었다. 모두가 나를 믿는다고, 나중엔 다 잘 될 거라고 해주었다. 그때 만약 누군가 내게 정신 차리라고 쌍욕을 해줬더라면, 조금 더 일찍 방황을 멈췄을지도 모르겠다. 결국 그렇게 여기저기 찍먹만 하던 나는 어느새 나이가 30대에 이르렀지만,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운이 좋게도 면접을 보는 곳마다 다 잘 붙기는 했다. 하지만 새로운 곳에 입사하더라도 며칠만 출근해 보면 암담한 미래가 훤히 보이는 것만 같은 생각에 퇴사를 밥먹듯이 했다. 그렇게 나도 어느새 30대의 나이로 진입하니 점점 면접을 볼 수 있는 기회마저도 잡는 게 쉽지 않았고, 서른 살을 먹고도 한 두 해가 더 지나고 나서야 겨우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참 내가 이상한 건 위기감을 느끼는 건 그렇더라도, 또 그에 준하는 긴장을 하진 않았다는 것이다. 난 내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철부지인 걸까. 여하튼 나는 '인생이 꼬일 대로 꼬였네'라고 생각하는 사람 치고는 기분이 그렇게 암울하지 않았었다. 여전히 '하면 잘할 것이다'라는 생각이 지배적으로 머릿속에 깔려 있었다. '난 이미 늦었다'라는 생각 같은 건 오히려 하는 게 더 힘들었다. 그건 일종의 용기일까. 자만일까.


그래도 현실은 현실이었다. 내가 어떤 잠재력을 지녔든 간에 제대로 쌓아온 게 없다 보니 증명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내가 살고 있던 지역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천천히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난 태어난 곳에서 평생을 자라왔다. 동네에 부모님 집을 포함해 외가족들까지도 살고 있었다. 난 그런 동네가 정겹고 좋았지만, 왠지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기운이 나를 제한하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마침 고향을 떠야겠다는 생각이 점점 강해질 때쯤에 두 가지 일이 일어났다. 하나는 3년간 사귄 여자친구와 헤어졌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다른 지역에 살던 친구가 자정이 다 되어가는 시간에 대뜸 전화가 오더니, 추천서를 써주겠다며 자기 회사로 들어오라는 제안을 한 것이다. 마침 칼을 갈고 있었던 나는 안 갈 이유가 없었다. 난 그렇게 순식간에 고향을 벗어나게 되었다.


그때 그 선택이 내 평생 가장 잘한 결정 중 하나가 될지는 꿈에도 몰랐다.



모든 일은 나를 위한 것이다

그 후로 나는 별다른 경력도 없었지만, 이직만으로 연봉을 7천까지 올릴 수 있었다. 예쁘고 훌륭한 여자를 만나 결혼도 했다. 이미 아파트를 사서 혼자 살고 있었던 아내 덕분에 집 걱정을 할 필요도 없었다. 난 그렇게 빚 한 푼 없이 결혼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이 모든 일들이 고향을 벗어난 지 2년도 채 되지 않아서 일어난 것들이다.


난 항상 비겁하게 도망쳐왔다고만 생각했다. 끈기도 없이 남들처럼 버티지 못하는 나 자신이 항상 부끄러웠다. 하지만 이제 와서 돌이켜 보면 난 매번 도망쳤던 게 아니라, 좀 더 나은 길을 선택한 것이었다. 단지 방향을 자주 바꿨던 게 흠이었을 뿐이다. 만약 내가 했던 선택들 중에서 조금이라도 어긋난 부분이 있었다면, 지금의 충만한 삶까지는 도달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결국 난 내가 도망쳐왔다고 생각했던 그 모든 순간들 덕분에 지금의 아내를 만났고, 지금의 삶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난 내가 평생의 업으로 삼을 만한 일도 찾았다. 그게 바로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글쓰기다. 정말 내가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되는 건, 나도 드디어 좋아하는 일을 찾았다는 것이다.


글쓰기를 알게 되고나서부터는, 새벽 밤낮으로 글을 써가며 나를 발견하는 삶을 살고 있다. 매일 꾸준히 해야 할 일이 확실하게 정해져 있는 삶은 그 자체로 이미 축복이 내려진 거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이해가 갈 것이다.




만약 예전의 나처럼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든다거나, 이미 도망쳤던 기억 때문에 괴로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차피 일어날 만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다'라는 말을 전하며 덤덤하게 받아들이라고 해주고 싶다. 본인이 힘들면 힘든 것이다. 아무도 자신의 인생을 책임져주지 않는다. 나의 고통을 굳이 다른 사람과 비교해 가며 애써 희석시킬 필요는 없다. 어차피 버티기 힘든 것을 버텨봤자, 내 몸과 정신만 썩어갈 뿐이다.


살다 보면 끈기를 발휘해야 할 때도 물론 있다. 오히려 끈기 있는 사람이 성공하는 케이스가 더 많다. 다만, 정상적인 사람이 이유 없이 힘들어하지는 않는다. 분명히 감당하기 힘든 것이 갑자기 삶을 덮치는 바람에 예상치 못한 시련이 닥친 걸 수도 있다. 자신의 성향과 기대하는 바가 현실과 합이 맞지 않다면 누구나 힘들어하는 것은 당연하다.


다만,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했으면 좋겠다.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였으면 좋겠다. 인정해야 할 부분을 인정하지 않는 건 가뜩이나 힘든 데 스스로를 더 몰아붙이는 꼴이 된다. 의외로 현실은 생각처럼 그렇게 괴롭지는 않다. 모든 것의 원흉은 생각과 마음에 있다.


항상 어딜 가도 내 20대의 절반은 드러내고 싶었고, 절반은 감추고 싶었다. 하지만 그 둘의 합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이젠 20대에 겪었던 그 모든 일들이 결국 나를 위해 일어난 것들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인생의 모든 순간은 나를 위해 존재한다.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비겁하고 나쁜 게 아니라, 충분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니 그런 마음이 드는 것이며 그것조차 내 삶에서 새로운 길이 열리고 있다는 하나의 신호이자 지표로 받아들였으면 좋겠다. 어떤 고난과 시련도 다 그만한 이유가 있고 뜻이 있다는 것을, 지금 이 순간에도 어떤 상황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이들에게 전하고 싶다.


인생이 어떻게 흘러갈지는 아무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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