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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보 Oct 09. 2023

아내 몰래 쓰지만 들켜도 되는 글

사실 들키고 싶은 마음


여보, 우리가 처음 만난 날들을 떠올리며 글을 쓰다 보니 그때의 감정이 새록새록 떠오르네. 당신을 처음 보자마자 얼마나 마음에 들었으면 여보가 가져왔던 책을 덥석 물고서는 빌려달라고 떼를 썼지 내가. 그땐 그 책이 내게 구원의 손길이었어. 우리가 만나게 된 건 소개팅이 아니라, 취지만큼은 아주 건전했던 작은 독서모임이었었잖아. 그래서 어떡하면 여보를 다음에 또 만날 수 있을지 얼마나 잔머리를 굴렸는지 몰라. 잔머리가 일으킨 마법의 아이디어로 인해 당신이 가져온 책을 빌려야겠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고, 그 책을 핑계로 난 아주 자연스럽게 두 번째 만남에 대한 말을 꺼낼 수 있었지.


이제 와서 그때 일들을 돌이켜 보면 가볍게 웃으면서 넘어갈 추억거리 정도가 되겠지만, 그 당시 내 심정은 여보를 다시 만나게 되는 날만을 기다리며 얼마나 초조하고 불안에 떨었는지 몰라. 당신을 처음 보자마자 난 이미 흑심을 품기 시작지만, 그런 흑심의 싹이 올라오기도 전에 일부러 짓밟기라도 하는 듯 당신은 내게 소개팅으로 만난 남자가 있다며 벌써 세 번 정도 만났다는 말을 건넸지. 그땐 얼마나 인정하고 싶지 않던지. 난 당신을 언제 다시 만나게 될지도 모르는데, 그러는 사이 그 소개팅남과 연인으로 발전할 수도 있을 거란 불안감에 제발 그 관계가 뭉개지길 얼마나 기도했었는지 당신은 모를 거야. 하나님 같은 건 믿지 않지만, 나도 약아빠진 인간인 건지 정작 나 불리할 땐 하늘을 우러러 그렇게 기도를 하게 되더라.


누군지도 모르는 그 남자와 당신이 제발 이루어지지 않길 바랐어. 그리고 우리가 최소한 두세 번 정도는 단 둘이서 만날 수 있게 되길 빌었어. 그래야 나라는 인간을 제대로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았거든. 결국 사귀진 못하더라도 최소한 마음을 둔 상대에게는 후회 없을 만큼 있는 그대로의 담백한 모습을 보여주는 게 언제나 사심을 품고 있는 상대 앞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여겼어. 그 이상은 선을 넘는 것만 같았고, 그럴 만한 깜냥도 내겐 없었지.


가진 게 없는 것치곤 난 그래도 내가 꽤 괜찮은 남자친구감이라는 자신감을 항상 지니고 살았어. 생각이라는 걸 하기 시작한 이래로 이리저리 부딪히며 뭉개지고 넘어지고 깨지는 한이 있더라도, 쉬운 길보단 의미 있는 길을 선택하며 살아왔다는 자부심이 있었기 때문이야. 굳이 쉬운 길 놔두고 외롭고 거칠게 살아왔던 이유는 언젠간 함께 살게 될 배우자를 위해서야. 나 혼자 살 생각이었다면, 아마 쉬운 일만 하면서 편하게 놀고먹고 살았겠지. 난 좋은 차도 관심 없고, 넓은 집도 필요 없고, 물욕도 없고, 사회적인 지위나 명예 같은 건 더더욱이나 욕심이 없거든.


하지만 한 가정을 책임지게 될 가장이 된다면 전혀 다른 마음을 품어야 한다는 신념이 있었어. 꼭 그래야만 된다고 믿었어. 내가 아닌 다른 존재는 나 혼자 마음만 먹는다고 해서 도와주고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이 극히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야. 내 문제는 어떡해서든 스스로 해결해 볼 수도 있지만, 그 외적인 대부분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건 돈이라고 생각해. 그 돈을 벌기 위한 가장 현명한 방법은 충분한 돈이 흘러 들어올 만큼의 부가가치를 뽐내는 능력 있는 인간이 되는 거지. 사회생활을 시작하자마자 회사가 주는 월급만으로 살아간다면 생계를 유지하거나 혹은 더 상황이 안 좋아지거나 둘 중 하나라고 생각했어. 첫 회사만 다녀봐도 대충 감이 잡히더라고.


말이 길었지만 내가 이렇게 괜찮은 사람이 되어가는 길을 걸어가고, 포기하지 않는 끈기와 인내를 발휘할 수 있는 건 모두 당신과 함께 살아갈 미래를 위해서야. 내가 결코 책임질 수 없는 문제들을 감당하기 위해서라도 능력을 키우고 싶어. 나 혼자서 해결할 수 없는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하고 싶어. 당신이 없다면 이 모든 노력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도 볼 수 있겠네. 하지만 당신을 위한 모든 일은 결국 나를 위한 일이기도 해. 당신은 굳이 이런 말 하지 않아도 이미 다 알고 있겠지.


이 글을 쓰게 된 요지는 내가 지금 너무 행복하다는 걸 당신에게 말해주고 싶었어.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당신을 한 번만이라도 더 보기 위해서 별의별 짓을 다 했었는데, 이젠 굳이 그런 애를 쓰지 않아도 언제나 당신과 함께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진한 행복감을 느끼게 해 줘. 그렇게도 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사람을 매일 볼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나를 채워주는지 몰라. 우린 심지어 우리를 사랑하고 아껴주는 사람들 앞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낼 거라는 공식적인 약속도 했어. 아직도 난 왼손 네 번째 손가락의 반지를 만지작 거리면서 우리의 추억과 오늘의 감사함을 떠올려.


이건 독백도 아니고, 편지도 아니야. 단지 우리에 대한 이야기를 글로 쓰던 도중 주저리주저리 생각나는 것들을 한 번 펼쳐봤어. 근데 그런 것치곤 포근한 감동이 또 안에서부터 서서히 올라오네.


이제 그만 써야겠다.

여보, 조금만 더 쓰고 갈게.




아내를 향한 마음을 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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