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달보 Dec 24. 2023

조용한 신혼부부가 크리스마스 이브를 보내는 법

내 기준에서는 완벽한 하루


크리스마스 이브라서 그렇다기보다는 이쯤 되니 뭔가 이전처럼 하루를 한 번 보내보고 싶었다.


전날 밤 10시쯤 알람을 전부 끄고, '내일은 그냥 편하게 일어나 봐야지'라며 마음을 먹고 잠들었다.


이전엔 늦잠 한 번 자보려 해도 5,6시면 꼭 눈이 떠지던데, 이번엔 아침 7시까지 푹 잤다. 아침 7시에 눈을 떠 본 적이 언젠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오랜만이었다. 그럼에도 해는 여전히 떠 있었다. 동지팥죽을 먹은 날이 며칠 되지 않은 게 생각났다.


그 상태로 1시간을 누워서 아내와 농담을 주고받고, 유튜브 숏츠도 보다가 책도 몇 페이지 읽었다.


8시쯤 지나서 어제 장모님이 한 솥 끓여주신 사골국 생각이 나서 한 그릇 해치웠다. 속이 든든하니 다시 눕고 싶었다.


그래도 날이 날이니 만큼 아내와 바깥나들이를 하기로 했다. 서로 사인을 주고받진 않았지만,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샤워를 하고 나갈 채비를 했다.


티맵에 주소를 찍은 카페는 전부터 아내가 디저트가 맛있다는 얘기를 듣고서 가고 싶어 했던 곳이었다. 그 얘기는 인스타그램에서 들은 것 같았다.


시동을 걸고 유유히 지하주차장을 빠져나오니, 진눈깨비가 부드럽게 내리는 게 보였다. 집에서 나오기 전에 어느 카톡 대화방에서 '화이트 크리스마스'란 단어를 스치듯 본 게 기억이 났다.


크리스마스를 특별하게 여기진 않는 편이다. 그럼에도 크리스마스 이브에 아내와 데이트하러 나가는 길에 내리는 눈은 좀 낭만적이었다.




짧지도, 길지도 않은 시간을 운전했다. 목적지에 도착했지만 카페로 보이는 건물은 보이지 않았다. 기어를 'D'에서 'P'로 옮기는 찰나에 '네비를 잘못 찍은 건가'싶었다. 하지만 아내의 반응을 보니 잘못 찾아온 건 아니라는 직감이 들었다.


알고 보니, 카페는 2층에 있었다. '카페는 1층'이라는 선입견은 언제부터 머릿속에 자리 잡았을까.


2층으로 걸어 올라가 카페문으로 보이는 문을 열고 들어가니 요즘 길가에 많이 보이는 '이쁘기만 한 카페'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처음 방문한 카페였지만, 주문을 채 마치기도 전에 '재방문 의사'를 자극했다.


넓지 않은 공간임에도 6.2 : 3.8 정도의 비율로 공간이 조성된 카페였다. 다시 말해 손님테이블이 그리 넉넉하진 않은 곳이었다. 오히려 그래서 더 좋았다. 극단적으로 손님들 공간을 넓힌 카페는 왠지 마음이 편치 않았다.


플레이리스트는 담아가고 싶을 정도로 좋았다. 볼륨이 살짝 큰 건 전혀 문제 삼고 싶지 않을 정도로. 한 가지 아쉬운 건 메뉴 가짓수가 적었다는 것 정도.




마음이 편안했다.


감각을 머금기에 딱 좋을 만큼.


찰나의 순간들이 시간의 힘으로 흘러가는 게 아니라, 나의 허락을 맡고 지나가는 듯했다.


자극을 끌어내려 나서지 않고, 오는 자극을 온전히 느끼려 했다. 바닐라 라떼 한 잔과 함께 세상을 천천히 음미하고 싶었다. 볼륨이 약간 크면서도 잔잔하게 느껴지는 음악과 함께.


마침 아내는 내가 찍어 보낸 카페 사진들을 인스타에 업로드 중이었다.


조용히 지난날을 떠올리기 딱 좋았다.


2023년 = 글쓰기


나의 2023년은 글쓰기로 가득 채운 한 해였다. 그 외 여러 가지 중요하고 잊지 못할 사건도 있긴 했지만, 비중으로 따지면 글쓰기를 따라올 만한 화두는 없다.


글쓰기는 작년부터 시작했지만, 제대로 꽃을 피운 건 올해였다. 브런치를 올해부터 제대로 시작했기 때문이다.


브런치는 내 본능을 자극했다. 덕분에 난 글쓰기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존재로 거듭나게 되었다.


아직 어딘가에 내놓을 만큼 대단한 성과를 이룩한 건 없지만, 글쓰기를 삶에 들인 것만으로도 운이 좋다고 생각한다. 좋아하는 일을 하며 일상을 보내는 데서 오는 기쁨과 보람은 삶을 한 층 더 충만하게 한다는 걸 몸소 체험 중이다.


2023년 내내 글 쓰며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보낸 시간들을 떠올리다 보니, 인상 써 가며 인스타에 피드를 업로드하고 있는 세상 바쁜 아내가 새삼 고맙게 느껴졌다.


나 혼자였다면, 절대로 발견하지 못했을 글쓰기였다. 나 혼자였다면, 절대 이 정도까지 쓸 수 없었던 글쓰기였다.


'우연히 내 앞에 나타난 것 같은 저 사람은 우연히 나타난 게 아님이 틀림없을 것이다'라고 혼자 몰래 생각해 본다.




신혼이지만, 크리스마스 이브라고 대단한 걸 하진 않았다. 아침 먹고 서점 갔다가 카페 한 곳 들리고 집으로 돌아와 저녁 먹고 나머지 시간은 조용히 보낸 게 전부다.


평소와 다른 점이 있다면, 글 쓴다고 밖에 나가 있지 않고 왠종일 아내 옆에 붙어 있었다는 거.


사실, 내 기준엔 완벽한 하루였다.


아내는 어땠을까.

 

매거진의 이전글 '여보, 옷장이 좀 비좁은데'라고 할 뻔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