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손엔 언제나 책 한 권이
실망. 실망. 대실망이었다.
생애 첫 자기계발서를 다 읽고 남은 건 배신감 밖에 없었다.
소설책이 아닌 다른 장르로 읽어본 첫 책은 지지리도 재미가 없었다. 심지어 책을 다 읽고 덮었을 때 무슨 내용을 읽었는지 기억나지도 않았다. 대충 읽은 것도 아닌데 말이다.
생소한 내용이 잘 와닿지 않긴 했다. 페이지 한 장 넘기는 것도 버거웠다. 그럼에도 나름 도움이 될 거라는 얄팍한 믿음 하나로 겨우 다 읽어냈지만, 남는 게 없었다. 재미도, 감동도, 기억도.
시간을 버린 것만 같았다. 이렇게 재미가 없는 책을 완독해 낸 내가 새삼 대단해 보이면서도 한껏 미련하게 느껴졌다. '역시 책은 그냥 소설책처럼 재밌는 것만 읽어야 하나', '이번 생에 책 읽기는 글렀나'라는 생각들이 머릿속을 메웠다.
그 후로 한동안 책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이전에 재밌게 읽었던 소설책마저도 읽기 싫었다. 어차피 '움직이는 도서관'에 실려 있던 기욤 뮈소 책도 다 읽은 마당에 더 이상 읽고 싶은 책도 없었다. 당분간은 활자 자체를 쳐다보고 싶지도 않았다.
내 인생의 첫 자기계발서는 그렇게 쫄딱 망해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생활관에서 한가롭게 티비를 보고 있을 때였다.
"아, 휴가 나가기 전에 살 빼야 되는데.."
옆에서 티비를 같이 보던 동기가 생활복 위로 존재감을 확실하게 드러내고 있는 통실한 뱃살을 만지며 푸념을 했다.
"허구한 날 그렇게 먹어대는데 살이 빠지겠냐고. 운동도 안 하고 맨날 누워만 있는데, 설마 진짜 살이 빠질 거라고 생각한 거야? 욕심도 많네."
라고 했어야 정상이다.
원래 같았으면 그 말이 바로 튀어나와야만 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난 그러지 않았다. 갑자기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고, 그게 날 멈추게 만들었다.
그건 바로 '좋은 인간관계를 만들고 싶다면 상대방의 입장을 충분히 헤아릴 줄 알아야 하며, 즉시 대답하기보다는 2초 정도 잠시 멈췄다가 한 번 더 생각해 보고 말하는 게 좋다'라는 것이었다.
스스로 생각해 낸 게 아니었다. 머릿속을 스쳐간 그 내용은 얼마 전에 읽었던 자기계발서에 실려 있는 내용이었다. 지지리도 재미없고 내용도 기억나지 않으며 남은 거라곤 배신감밖에 없었던 생애 첫 자기계발서 말이다.
실제 내가 한 거라곤 바로 대답하지 않고 잠시 주춤한 것뿐이었다. 하지만 바로 반응하지 않고 순간에 잠깐 머물렀더니, 처음 들었던 생각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처음 들었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말이 나왔다.
"휴가 언제 나가는데? 이따가 나 뛰러 갈 건데, 같이 뛸래?"
"오~ 웬일? 흠, 귀찮긴 한데.. 생각 좀 해볼게. 그래도 땡큐!"
역시 순순히 따라오진 않을 거라 예상하긴 했다.
어쨌든 만약 책에서 읽은 내용이 떠오르지 않았다면, 난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살이 빠지지 않아 고민인 동기에게 핀잔만 줬을 것이다. 그럼 다른 건 몰라도 최소한 고맙다는 말은 듣지 못했을 터였다.
동기에게 고맙다는 말을 들었다는 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내 생각이 아닌 것의 영향으로 인해 평소와는 다른 행동을 했다는 게 내겐 '사건'이었다.
확실히 책에서 읽은 대로 상대방의 말을 듣자마자 바로 대답하지 않고, 몇 초 만이라도 잠깐 멈췄다가 반응하는 건 유의미한 효과가 있었다.
쉽게 믿어지지가 않았다. 정말 내가 책에서 읽은 것 때문에 다르게 행동한 게 맞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그럴듯한 멘토도 없고, 부모님의 가르침은 더더욱 받지 못하며 자란 내게 그런 말을 해줬던 사람은 평생 아무도 없었다.
좀 의심스럽긴 했어도, 분명 내가 다르게 행동한 건 책에서 읽었던 내용 덕분이었다.
처음 자기계발서를 다 읽고 나서는 지지리도 재미없다고 생각했었다. 내게 도움이 될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에 기인하여 열심히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머릿속에 남는 내용이 하나도 없어서 허탈하기만 했었다.
근데 아닌 것 같았다. '기억에 남는 게 없다'라는 건 착각일지도 몰랐다. '책에서 읽은 내용은 어떤 식으로든 마음 안에 남아서 뭔가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작 책 한 권 읽었다고 정말 내가 변한 것인지, 아니면 그간의 경험들과 책에 실린 내용들이 만나 어떤 조합이 성립되는 바람에 일어난 작용인지는 알 수 없었다. 자세한 내막이 궁금했지만, 혼자 생각한다고 알아낼 수 있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살아생전 처음 겪어본 경험에 대한 의문을 풀 수 있는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그건 바로 다른 책을 좀 더 읽어보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동안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움직이는 도서관'을 다시 기다리기 시작했다.
며칠 후, '움직이는 도서관'은 어김없이 초소를 방문했다.
오랜만에 난 그 앞에 다시 서게 되었고, 내게 도움이 될 것 같아 보이는 책들은 모조리 꺼내 들었다. 그동안 반신반의하며 책을 집어 들 때와는 마음가짐이 달랐다. 이젠 책 속의 내용이 궁금했다. 책을 알고 싶어졌다. '혹시 이게 나를 변하게 할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감이 일기 시작했다.
마음 한 켠엔 '책을 읽는다고 정말 달라질까'라는 일말의 의심이 조금 남아있긴 했었다. 그럼에도 일단은 읽고 보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이후로는 책을 옆에 쌓아두고 읽기 시작했다. 욕심은 또 많아서 책 한 번 빌릴 때마다 10권 이상씩 빌렸다. 정말 말 그대로 책을 미친듯이 씹어먹었다.
여전히 재미는 없고, 졸리는 건 매한가지고, 한 권을 다 읽고 덮어도 대체 내가 뭘 읽은 건지 이해가 가지 않을 때도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으로 읽은 모든 내용들은 고스란히 내게 스며들 거라고 무식하게 믿었다. 얼마 전 책의 영향으로 나도 모르게 다른 생각과 다른 행동이 튀어나왔던 것처럼 비슷한 일이 또 일어날 거라고 생각했다.
근데 정말 그런 일이 또 벌어졌다.
난 여느 때처럼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들으면서 책을 읽고 있었다. 그러다 조금 쉬고 싶어서 이어폰을 옆 바닥에다가 잠시 툭 던져놨었다.
근데 옆에 있었던 후임이 장난을 치며 놀던 와중에 갑자기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그러다 결국 이내 바닥에 있던 내 이어폰을 밟아버렸다. 이어폰은 내가 보는 앞에서 그대로 보기 좋게 박살이 나버렸다.
그때 그 장면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화가 나기도 전에 머릿속에 다음과 같은 생각이 일어났다.
'저건 내 물건이 아니다'
무슨 반사작용처럼 위와 같은 생각이 번개처럼 떠올랐고, 망가진 이어폰을 응시하며 그 상태를 잠시 유지했다.
후임은 내 앞에서 죄송하다는 말을 연신 내뱉으며 어쩔 줄을 몰라하고 있었다. 하지만 난 후임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저 마음을 흘려보내는 데만 집중했을 뿐이었다.
정말 신기했다. 내 이어폰이 어이없게 박살이 났는데도 괜찮았다. 스스로 최면 걸듯이 '저건 내 이어폰이 아니다'라고 거듭 되뇌이니까, 정말 아무런 짜증도 나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난 정말 괜찮아서 '괜찮아, 신경 쓰지 마'라는 말을 후임에게 건넸다. 하지만 그 후임은 그런 내 말을 당연히 믿지 않았고 죄송하다는 말만 계속 해댔다(새로 사주겠단 말은 곧 죽어도 하지 않더라).
귀찮았지만 사과하도록 그냥 냅뒀다. 솔직히 나 같아도 그런 상황에서는 내 입에서 튀어나온 '괜찮다'라는 말을 믿지 않았을 테니까.
내가 그런 기지를 발휘할 수 있었던 건, 그맘때쯤 읽었던 마음공부와 관련된 심리학책 덕분이었다. 그 책에서 '물건을 잃어버리면 원래 내 것이 아니었다고 생각하라'라는 내용을 읽었었는데, 그게 마음에 남아 있다가 적절한 타이밍에 반응을 한 것이다.
그때 난 인생을 통째로 바꿀 만한 깨달음을 얻었다.
아, 이래서 책을 읽는구나
그 당시엔 '내가 성장한다'라는 생각까지 하진 못했어도, '책을 읽음으로써 내가 점점 변하고 있다'라는 것만큼은 확실하게 체감할 수 있었다.
독서를 통해 난 조금씩 변해가고 있었다.
아마 그때쯤부터였을 것이다.
내 손에 항상 책이 들려있기 시작한 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