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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보 Jan 25. 2024

미안하단 말 한마디가 그렇게 어려워서

함께 아파할 줄 아는 법을 배우다

  

남자치고는 태어나서 주먹다짐을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내겐 지극히 당연한 일인데, 어디 가서 가끔 이런 얘길 꺼내면 믿지 않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다. 그럴 때마다 주먹다짐 경력이 없는 내 이력이 얼마나 흔치 않은 건지 실감하게 된다. 


허나 태어나서 딱 한 번, 고등학교 2학년 때쯤 난데없이 날아온 친구의 주먹에 얼굴을 두 대 맞은 적은 있었다. 


그 당시 상황은 이랬다. 


교실 뒤편으로 걸어가고 있던 내 어깨를 누군가가 붙잡고 돌려세우더니, 난데없이 얼굴에 주먹이 날아와 꽂혔다. 생애 처음으로 남이 내 얼굴에 손찌검을 한 날이었다. 


기분은 나빴지만, 왜 날 때린 건지부터 알고 싶었다. 그래서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물었다. 


"왜 때려?" 

그 친구는 내 얼굴에 한 번 더 주먹질을 하는 것으로 질문에 대한 대답을 했다. 여전히 의문이 풀리지 않았던 나는 한 번 더 되물었다.


"왜 때리냐고?"

그쯤 되니 주변 애들이 말리는 바람에 상황은 끝이 나고, 그 친구와 난 제자리로 돌아갔다.


아직도 그때 왜 맞았는지는 모른다. 사과도 받지 못했다. 그나마 예상해 봄직한 것은 무슨 안 좋은 일을 겪었는데 내가 잘못 걸렸거나, 혹은 그냥 또라이거나. 


요는 난 쉽게 반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상대방의 예상과 어긋나게 반응하는 건, 아니 반응하지 않는 건 내가 나를 지키는 나만의 방법이기도 했다. 보통 내가 가만히 있거나 상황을 흘리면 대부분의 일은 금세 해결되거나, 생각보다 쉽게 넘어가곤 했었다. 


정말 '반응'만 하지 않으면 별 문제 없이 넘어갔다. 물론 나도 인간이라 속으로는 화도 나고 짜증도 일어나지만, 겉으로 티를 내지 않고 잠시만 가만히 있으면 대부분은 괜찮게 넘어갔다. 


나름 삶의 지혜라면 지혜였다.



 

그러나 이 절대불변의 법칙 같은 처세술이 통하지 않는 존재가 한 명 있었는데, 바로 아내였다.


나도 감정기복이 없는 걸로 유명한데, 아내는 그런 나보다도 더 침착한 사람이었다. 그런 둘이 만나 함께 살아가니 웬만한 일로는 갈등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얼마 전에 아내가 임신을 하게 되면서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었다. 임신 후 아내 입술에 포진이 생겼었다(헤르페스 감염증이라고 하더라). 평소에도 입술이 자주 트는 사람이어서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었다. 근데 점점 심해지더니 입술이 엉망이 되었다. 


임신초기엔 호르몬의 영향으로 몸살이라도 앓는 것처럼 컨디션이 안 좋아진다길래, 먹을 수 있는 약도 없다길래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냥 옆에 있어주고, 집안일을 도맡아 하는 것 말고는 딱이 다른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게 최선인 줄 알았다. 


그러던 어느 날, 임신초기일수록 단순 포진은 태아에게 위험한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내용을 아내가 불안한 마음에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발견하게 되었다. 


알고 보니 임산부라도 무조건 모든 약을 못 먹는 건 아니었다. 입술에 연고 정도는 발라도 됐었다. 오히려 포진을 방치하는 게 더 위험했다. 그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던 내게, 입술이 엉망이 되어도 검색 한 번 해볼 생각을 하지 않던 내게 아내는 서러움의 눈물을 쏟아냈다. 


할 말이 없었다. 눈물을 흘리는 아내 앞에서 난 그냥 가만히 있었다. 평소처럼 말이다. '미안하다'는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도 상황이 안 좋게 흘러갈 것만 같았다. 아내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는 내가 답답한 모양이었다. 


그 당시 난 딜레마에 빠졌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선 어떤 말을 하더라도 좋을 게 하나도 없을 것 같은데, 그렇다고 입 다물고 가만히 있자니 그것도 현명한 처세는 아닌 것 같았다. 


문득 그 와중에 난,

스스로를 지키려는 '나'를 목격했다.  


바깥생활에서 나를 숱하게 지켜냈던 그 훌륭한 방어술을 아내 앞에서도 펼치고 있는 '나'를 제3자의 눈으로, 즉 관찰자의 시점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느낄 수 있었다. 


아내의 슬픈 감정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내 마음은 편안해지고 있는 반면에, 내가 되받아친 감정은 아내에게 다시 돌아가 슬픔이 곱절로 커지는 것을 말이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괜찮았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들끓는 상대방에 비해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는 데서 오는 남모를 승리감과 묘한 쾌감마저 느꼈을 것이다. 


유대관계가 없는 남들로부터는 얼마든지 나를 지켜도 괜찮았다. 그들이 상처를 입든 말든, 난 나를 보호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고 그 절차만 따르면 별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아내만큼은 예외였다. 


사랑하는 사람에겐 내 자아의 일부가 넘어가 있는 건지, 아무리 내가 괴롭지 않아도 사랑하는 사람이 괴로워하면 나까지 덩달아 괴로웠다. 그건 오히려 더 감당하기 힘든 감정이었다.  


내게 날아온 화살을 받지 않으니 그대로 되돌아가 아내의 상처가 더 커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내가 나를 지키는 방법이 무조건 다 통용되는 건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화살을 던지면 날 지킨답시고 쳐낼 게 아니라, 그냥 맞아주는 게 더 현명한 방법이라는 것을 느꼈다. 함께 아파하는 게 서로가 좀 더 덜 아픈 방향으로 흘러간다는 걸 알게 됐다. 아내와 마음이 이어진 이상, 나 혼자만의 안전은 의미가 없었다. 


그렇게, 때로는 일부러 다칠 줄도 알아야 한다는 법을 부부라는 특별한 관계 속에서 배워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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