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1. 남들과 조금은 다른 시작 ep.4
난 굳이 예식장에서 결혼식을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눈 깜빡하면 스쳐가는 짧은 행사를 위해, 평생의 한 번뿐이라는 핑계로 과대한 투자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결혼식을 돌잔치홀에서 치렀다. 돌잔치홀은 말 그대로 돌잔치를 위한 공간이었지만, 크기로 보나 구성으로 보나 비용으로 보나 결혼식을 올리기에도 적당하다는 판단이 들었다.
막상 돌잔치홀에서 결혼식을 해보니 의외로 좋은 점이 많았다.
우선 시간이 넉넉했다. 보통 1시간 정도인 예식장에 비해 돌잔치홀은 3시간을 쓸 수 있었다. 매니저님의 재량인진 모르겠으나, 결혼식을 두 번 치르고도 남을 만한 시간이었다. 덕분에 잔치가 끝난 후 식사하고 계시는 가족 및 하객분들과 여유롭게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하객들은 처음 앉았던 자리에서 장소를 이동할 필요도 없이 식도 구경하고, 밥도 먹을 수 있었다. 밥 먹기 위해 꼭 식이 끝날 때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배고프면 바로 식사를 해도 괜찮았다. 일찍 오신 분들 중에서는 식이 시작되기 전 미리 배를 채우고, 디저트를 먹으며 구경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한 자리에서 결혼식도 구경하고, 밥도 먹고, 결혼 당사자들과 인사까지 나눌 수 있었던 게 특히 좋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라도 그럴 것 같았다. 여느 결혼식장에선 거의 보기 드문 경우니까.
나와 아내는 배정받은 홀 입구에서 손님들을 맞았다. 돌잔치홀은 신부대기실이 따로 없었기에, 우리 부부는 결혼식을 찾아와 준 모든 분들을 함께 맞이할 수 있었다. 그게 참 좋았다. 나와 아내의 지인분들은 각자의 결혼 상대를 처음 보는 경우가 많았는데, 우리 부부가 함께 서 있다 보니 서로를 소개해주기에도 좋았다.
사진작가님은 그런 우리의 모습을 좋게 보신 모양이었다. 따로 부탁한 적이 없었음에도, 손님들을 맞이할 때마다 많은 사진을 찍어주신 걸 보면 말이다. 보통의 결혼식은 주인공과 사진 한 번 찍을라 치면, 신부의 지인이 아니고서야 본식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사람들 틈에 파고들어 찍는 단체사진이 고작이었다. 그에 비해 우리는 사진작가님의 헌신(?) 덕분에 지인들과 인사를 나누는 장면을 많이 남길 수 있어서 좋았다.
돌아가며 결혼식의 사회를 부탁하는 게 계모임을 하는 친구들 사이에 맴도는 암묵적인 룰이었지만, 부담을 주긴 싫었다. 더군다나 직접 준비한 식순이 일반적이지 않았기에 능숙하고 유연한 진행이 필요했다. 그래서 돌잔치홀에서 활동하고 계시는 MC분을 모셨다. 확실히 전문가답게 행사를 잘 이끌어 주셨다.
음악이 나오면 홀 뒤편에서 양가 부모님들과 우리 부부가 순차적으로 입장하는 것으로 본식을 시작하려 했었다. 입장곡은 아내가 고른 Redbone의 'Come and Get Your Love'라는 곡이었다. 마블영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1편에서도 나오는 유쾌한 음악이다.
그런데 돌잔치 홀이다 보니 중간에 입장할 만한 공간이 없었다. 아니, 테이블 사이로 공간은 있긴 했는데 비좁았다. 한 명은 족히 지나갈 수 있지만, 두 명이 여유롭게 지나가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에 사회자는 하객들에게 '자리 좀 만들어달라'며 센스 있게 부탁을 했다. 그랬더니, 중간 테이블에 앉은 손님들이 우르르 일어나서 테이블을 옮기며 입장공간을 함께 만들어 주는 진귀한 광경이 펼쳐졌다. 그 모습을 보며 사람들은 모두 웃기 시작했고, 덕분에 본식이 진행되기 전부터 홀 안은 활기가 맴돌았다.
한편, 입장하기 전에 부모님들에게 신신당부를 한 게 한 가지 있었다. 음악이 나오고 사인을 주면 '그때부터' 천천히 걸어가 달라고 말이다. 하지만 부모님들은 음악이 나오자마자 사인은 안중에도 없이 뛰쳐나가기 시작했다. 천천히 걷기는커녕 마치 누가 뒤에서 쫓기라도 하는 듯 거의 경보에 가까운 걸음으로 씩씩하게 걸어들 가셨다. 부모님들의 긴장감이 돋보이는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웃음이 나왔다. 비록 계획은 보기 좋게 말아먹었지만, 오히려 마음이 놓이고 덕분에 긴장도 많이 풀렸었다.
결혼할 당시에는 글쓰기에 막 열이 오르고 있던 시기였던 참이어서 성혼선언문은 직접 써서 만들었다. 낭독은 아버지에게 부탁했다. 왠지 우리 아버지는 그런 걸 좋아하실 것 같았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평소 강인해 보였던 아버지도 많이 떨리신 모양이었다. 성혼선언문을 낭독하시는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다음 순서는 아내가 준비한 편지낭독이었다. 가족, 친구들 그리고 직장동료들에게 그간 하지 못했던, 그리고 하고 싶은 말들을 전하는 순서였다. 아내의 편지를 바탕으로 영상은 별도로 만들었다. 편지내용과 아내가 전해준 사진들이 필름처럼 지나가는 장면을 유튜브로 조금씩 독학하면서 만들었다. 특히 난 자막에 신경을 썼다. 다른 결혼식에서 주인공들이 말할 때면, 무슨 말하는지 잘 들리지 않았던 적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아내는 편지를 읽으면서 눈물을 흘렸다. 무덤덤하게 준비하는 것 같았는데 막상 사람들 앞에서 직접 글을 읽어 보니 감회가 남다른 모양이었다. 그런데 하필 내 쪽에서 보이지 않는 왼쪽 눈에서만 눈물이 흘러서 주머니에 휴지를 미리 챙겨놨음에도 제때 닦아주질 못했다. 그게 지금도 아쉽다. 와중에 아내의 목소리와 영상 속 자막 싱크가 맞지 않았던 게 눈에 들어오기도 했다. MBTI는 몇 번을 검사해 봐도 'F'가 나오던데 다시 검사해 볼까 싶기도 하다.
그다음은 내 차례였다. 난 예전부터 소박하지만 하고 싶었던 게 한 가지 있었다. 그건 바로 잔잔한 음악을 깔고 한 손에 마이크를 쥔 채, 하객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담담하게 전하는 거였다. 우리 부부가 어떻게 만났고, 어떤 마음으로 결혼을 하기로 했으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건지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들을 말이다.
난 우리 부부의 축복을 빌어주기 위해 모인 분들에게 화려한 겉치레가 아닌, 깊은 속마음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들이 보지 못했던 우리의 '과거'와 앞으로 볼 일이 거의 없을 법한 우리의 '미래'를 상상이라도 해볼 수 있게끔 말로써나마 전해라도 보는 게, 새신랑으로서 하객들에게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예의라고 생각했다.
눈에 보이진 않아도 진심을 다해 전달하면 충분히 내 마음이 그들에게 가닿게 될 거라고 믿었다. 그 믿음을 바탕으로 배우자와 함께 살아가는 삶의 태도, 아내를 향한 마음, 건강한 관계를 지향하는 올곧은 자세, 평범한 일상을 사랑하고 시간을 소중하게 대하는 가치관을 드러내고자 애를 썼다. 약소하지만 그게 내가 정성스레 준비한 결혼식의 메인이벤트였다.
마지막 순서는 양가 부모님들에게 상패를 전달하는 것이었다. 나와 아내는 각자의 부모님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글로 썼고, 그 글이 새겨진 상패를 미리 주문제작 했었다. 돌잔치홀에서 결혼하는 것도 드문 일이지만, 본식 때 부모님들에게 감사패를 드리는 건 정말 더 보기 드문 일이지 않을까 한다. 가끔 우리 부모님이나 아내본가에 갈 때면, 지금도 여전히 훤히 잘 보이는 곳에 감사패가 보기 좋게 놓여 있다. 그걸 볼 때면 참 뿌듯하면서도 드리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래도 직접 짠 식순으로 진행한 결혼식이다 보니 어설픈 부분이 많았다. 그럼에도 잔치를 직접 이끌어가는 느낌이 들어서 좋았다. 사회자가 순서를 혼동하거나 영상의 템포가 어긋날 때면 수신호를 통해 맞춰가며 진행했었다. 그 과정에서 묘한 쾌감을 느끼기도 했다.
화려한 장식은 의미 없다고 생각했다. 결혼 당사자는 정신이 없어서 주변을 자세히 볼 겨를도 없을 테고, 하객들도 남의 잔치는 그리 큰 관심이 없을 거였기 때문이다. 나름 특별하게 식을 꾸미려 했어도 이미 다른 곳에서 수없이 봐왔던 진부한 절차에서 크게 벗어나진 못했을 터였다. 그래서 우린 그냥 우리 생각대로 결혼식을 만들었다.
타당하고 합리적인 근거를 빌미로 결혼식을 돌잔치홀에서 하기로 한 건 맞지만, 속으론 걱정이 되기도 했다. 뭐 우리 부부야 남들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는다 해도, 결혼식은 우리 둘만의 잔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좋았고, 편했다'라는 어른들의 후기를 듣고는 비로소 안심을 할 수 있었다. 다행이었다.
곱씹어볼수록 돌잔치홀에서 결혼식을 치른 건 정말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때의 추억을 떠올릴 때마다 모든 게 완벽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그야말로 가성비가 훌륭하고, 더할 나위 없이 담백했던 결혼식이자, 결코 잊지 못할 나의 생일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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