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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보 Mar 01. 2024

상견례는 술과 함께

PART 1. 남들과 조금 다른 시작 ep.2


장인어른은 애주가이시다. 장모님도 술을 웬만큼은 드신다. 우리 아버지는 술을 거의 드시지는 않지만, 독주를 선호하실 정도로 주량이 세고 숙취도 없는 편이다. 우리 엄마는 술을 매우 사랑한다. 그리고 대한민국 상위 0.1%의 하이텐션을 뽐낸다. 엄마의 평소 모습을 유튜브로 찍어서 올리면 실버버튼은 따놓은 당상일 것 같다는 생각이 될 정도다.


그런 이유로 상견례가 있던 날, 예약한 식당에 먼저 도착한 우리 부부는 사장님을 보자마자 다음과 같은 말을 건넸다.


"일단 술부터 주세요."


밑반찬도 깔리지 않았는데, 테이블 위에 소주 한 병, 맥주 두 병이 있는 장면을 보고 우리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살짝 어이없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한편으론 이게 맞나 싶기도 했다. 그럼에도 오늘 같은 날은 술의 힘을 빌리면, 안 되던 일도 잘만 될 것 같은 확신이 들었다. 사고방식이 유연하고 주도가 젠틀한 장인어른과 역대급 하이텐션을 자랑하는 엄마의 조합이 나쁘진 않을 것 같았다.


좋은 날 좋은 뜻으로 모인 상견례 자리에서 서로 헐뜯고 싸우기야 하겠냐만은, 이왕 어렵게 성사된 자리이니만큼 다들 최대한 즐겁게 즐기다 가셨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우리 부부는 살짝 뒤로 물러나 최대한 할 수 있는 만큼 어른들을 편하게 해드리고자 했다. 그날의 주인공은 우리가 아니라, 그동안 나와 아내를 낳아주고 키워주신 부모님들이었으니까.




양가 부모님들은 거의 비슷한 시간에 도착했다. 네 분의 옷차림만 봐도 마음의 무게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부모님들은 서로 어색한 티가 물씬 풍기는 부끄러운 인사를 나눈 뒤 자리에 앉으셨다. 동시에 테이블 위에 덩그러니 놓인 술병을 보고서는 네 분 다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장인어른과 장모님은 눈이 휘둥그레졌고, 아버지는 예상한 일이라는 듯 무덤덤한 미소를 지었다. 엄마는 예상대로 대놓고 좋아했다.


나름 좋은 취지로 술부터 시키긴 했지만 약간 걱정도 되긴 했던 게 사실이다. 밑반찬도 없는 테이블에 술병만 올려져 있는 그림을 부모님들이 과연 상상이나 해보셨을까. 우리 부모님은 그렇다 해도 장인어른과 장모님이 어떻게 받아들이실지 쉽게 예상이 가지 않아 신경이 쓰였다.


어쩌면 약간 홧김이기도 했던 그 돌발행동은 다행히도 좋은 결과를 낳았다. 확실히 술이 몇 잔씩 들어가니 다들 마음이 놓이시는 것 같았다. 처음 어색한 인사를 나눌 때와는 비교가 될 정도로 어느새 편하게 대화들을 나누고 계셨다. 방 안에는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평소 강인해 보였던 장인어른은 많이 긴장하셨는지 손이 떨리는 게 보였다. 점잖아 보이지만 한 번 터지면 말이 많아지는 아버지는 다행히도(?) 말을 아끼시는 듯했다. 평소 시끄럽지도 조용하지도 않은 무난한 타입의 장모님은 엄마 덕분에 흥이 잔뜩 오르신 것 같았다. 특히 엄마가 말아주는 소맥을 참 잘 드셨다. 나중에 알게 된 건데, 그날 장모님은 근래 들어서 술을 가장 많이 마신 날이었다고(소맥의 참맛을 처음 알게 된 날이라고도) 한다. 


신기하게도 양쪽 어른들은 나이가 같았다. 아버지와 장인어른이 동갑이셨고, 어머니와 장모님마저 동갑이셨다. 그에 더해 약간의 술까지 적신 덕분에 어색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편안한 분위기가 내내 이어졌다. 평소 어머니의 음주를 재료 삼아 잔소리를 지겹게 일삼던 아버지도, 그날만큼은 소주와 맥주가 난무하는 상차림을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듯했다.


그 좋은 분위기에서 나와 아내는 딱히 할 게 없었다. 그럼에도 음식을 먹기보다는 부모님들의 술잔이 비면 바로 따라드리고, 오가는 대화에 집중도 하면서 최대한 긴장을 놓지 않으려 애를 썼다. 그러다 문득, 그 와중에 음식을 아주 찰지게(?) 먹고 있는 아내가 눈에 들어왔다. 마치 옆 테이블에서 먹고 있는 남처럼 여겨질 정도로 아주 편하게 그리고 열심히도 먹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좋은 의미에서 참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왠지 그런 아내에게서 엄마의 낙천적인 모습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아마 기분 탓이었을 거다. 여하튼 그런 아내가 참 사랑스럽다고 생각하면서 다음과 같은 생각을 맘 속으로 되뇌었다.


'그래, 굳이 우리 둘 다 긴장할 건 없지'


그렇게 다행히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생애 첫 상견례 자리는 술의 힘을 빌린 덕분에 아주 무난하고도 즐겁게 보냈던 기억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우리 부모님도 그렇고, 아내 본가 부모님도 그렇고 시대가 흐른 만큼 사고방식도 유연하게 변한 분들이어서 좋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상견례 같은 자리에서는 확실히 옛 문화의 끄나풀이 조금이나마 드러나긴 했다. 이를테면 장모님이 딸 가진 부모 입장의 뉘앙스를 풍기며 살짝 죄송스러운 내색을 보였던 것처럼. 현실적으로 따지면 거의 가진 것도 없이 무료(?)로 장가가는 내가 더 눈치를 봐야 했었는데 말이다.


사회적인 조건이 풍족할수록 두 사람이 함께 살아가기 수월하다는 건 두말하면 잔소리다. 내가 평소에 책을 읽고, 많은 것을 감내하고, 이런 글을 쓰고자 하는 것도 어찌 보면 경제적으로 좀 더 여유롭게 살기 위해서인 것도 있으니까. 더군다나 그런 부분이 결혼생활에 있어서 꽤 상당한 영향을 차지하니까.


서로 사랑하는 마음만으로도 잘 살아왔던 시대에서, 서로 사랑하는 마음만으로는 결코 잘 살아갈 수 없는 시대로 변해가는 세월이 야속하게 느껴질 뿐이다. 그런 각박한 세상에서도 함부로 남을 저울질 하지 않는 나의 부모님과 아내본가의 부모님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와 연이 닿은 건, 그야말로 인생의 천운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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