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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보 Mar 07. 2024

할머니의 의지를 이어받은 아내

그런 아내를 본받는 나


우리 할머니는 어느 식당을 가든 식사가 끝나고 나면 테이블을 정리한다. 먹고 남은 음식들을 커다란 그릇에 모으고, 빈 접시들은 차곡차곡 쌓는다. 그렇게 직원이 한 번에 들어서 갈 수 있게끔 만들어준다. 그럴 때마다 가족들은 모두 할머니를 말리곤 한다. 안 그래도 된다고, 알아서 다 치운다고 말이다. 그럼에도 할머니는 아랑곳 않고 꿋꿋하게 항상 자리를 깔끔하게 정리하고 일어난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할머니와 비슷한 행동을 아내가 하고 있었다. 그래서 물어봤다.


"여보, 원래 식당 가면 그릇 같은 거 치웠어?"


"원래는 안 그랬는데, 자기 할머니가 그릇 치우는 게 보기 좋더라고."


그 말을 듣는 순간 갖가지 감정이 나를 스쳤다. 일단 반성되는 부분이 가장 컸다. 난 할머니의 그런 모습을 거의 평생토록 옆에서 지켜봤는 데도 따라 배우기는커녕 대놓고 핀잔을 주지만 않았을 뿐이지, 여느 가족들의 냉담한 반응과 크게 다르지 않은 태도로 대했기 때문이다.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와 같은 생각을 마음속으로 했었더랬다.


하지만 아내는 달랐다. 아내는 할머니와 식당 가서 밥을 먹은 적이 거의 손에 꼽으니까, 아마 할머니가 테이블을 정리하는 모습을 한 두 번 본 게 전부였을 터다. 그런데도 아내는 할머니의 행동을 좋게 보고서는 바로 따라 했다. 새삼 그런 아내가 참 대단해 보였다. 이미 그리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이 사람과 결혼하기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또 한 번 강하게 들었다.




이제 우리 부부는 식당 가서 밥을 먹고 나면 군말 없이 함께 테이블을 정리한다. 남은 음식들은 한 곳에 모으고, 그릇은 맞는 것들끼리 차곡차곡 쌓아 그 위에 수저를 놓고, 썼던 휴지들은 한 번에 버릴 수 있게 모아서 뭉쳐 놓는다. 할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할머니의 의지를 이어받아 머무른 곳을 깨끗이 하는 건 어느새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그런데 의외로 그로 인해 얻어가는 혜택이 은근 쏠쏠했다.


보람

'아름다운 사람은 머무는 자리도 아름답다'라고 했던가. 밥 다 먹고 자리를 정리하고 나면 남다른 보람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크게 힘드는 일도 아닐뿐더러, 깨끗하게 치워진 테이블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풍족한 기운이 차올랐다.


사진 찍고 싶은 충동은 보통 음식이 갓 나왔을 때만 일어나곤 했는데, 다 먹고 나서 깨끗하게 정리한 테이블을 보고 있자니 그럴 때도 찍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게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한편으로는 '여태껏 이런 좋은 기분을 할머니 혼자 느끼고 계신 건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만큼 다 먹고 남은 그릇들을 정리하는 건 기대 이상으로 행복감을 안겨주는 봉사이자 매너였다.


감사

내 기억으로는 할머니가 그렇게 자리를 치울 때면 감사하단 말을 전했던 사람이 몇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런데 아내가 할머니를 따라 하고, 그런 아내를 내가 따라 하고 난 후부터는 거의 매번 직원분에게 고맙단 말을 듣는다. 모르는 사람에게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듣는 건 생각 이상으로 기분 좋은 일이다.


한 번은 웨이팅 하는 사람들이 득실거릴 정도로 바쁜데 비해 직원이 턱없이 모자란 식당에서 밥을 먹은 적이 있었다. 그때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직원분(사장님의 딸로 추정된다)이 있었는데, 그분의 얼굴에는 '탈주'가 쓰여 있었다. 그런데 잠시 후 그 직원분이 밥값을 계산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정리한 테이블을 슥 보더니, 순간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지면서 '정말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건넸다.


그럴 때면 덩달아 나까지 기분이 좋아진다. 아마 아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때 느끼는 감정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특별하다. 그리고 또 소중하다. 확실히 나 혼자 잘 사는 것보단 다 같이 잘 사는 게 진정으로 행복에 이르는 길인 걸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기도 한다.


서비스

몇 주 전에 경주에 엄청 유명한 한식집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 아내의 능력(?) 덕분에 우린 오픈하자마자 대기 없이 바로 들어갈 순 있었지만, 식사를 끝내고 나오니 대기하는 사람들만 50팀이 넘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 정도로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었다.


전 국민이 다 찾아오는 것만 같은 유명한 맛집에서 일하는 분들은 유독 특유의 불친절함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게 느껴졌다. 너무 많은 손님들이 오가니까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여하튼 맛집을 찾아갈 때면 맛은 기대하는데 비해, 직원의 친절함은 생각지도 바라지도 않는 편이다.


더군다나 요즘은 장사가 잘 되는 집일수록 직원과 응대할 일도 잘 없다. 미어터지는 손님들을 응대하기 위해, 또 세상이 그만큼 발전한 만큼 사람 대신 기계를 쓰는 추세로 갈수록 기울어지기 때문이다. 이번에 우리가 찾아갔던 한식집도 테이블마다 주문용 태블릿 PC가 놓여 있었고, 서빙은 서빙로봇이 했다. 그래서 밥 먹는 내내 직원과 마주할 일은 없었다.


아내와 난 허기진 배를 금방 채우고 여느 때처럼 남은 음식들을 한 곳에 모으고, 그릇과 접시들을 가지런히 쌓아두고 이제 막 일어나던 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사장님처럼 보이시는 분이 음료수 한 병을 들이밀었다. 너무 당황스러운 나머지, 우리 부부는 사장님의 눈을 멀끔 멀끔 쳐다만 봤다.


"테이블도 정리해 주시고, 너무 감사합니다."


아내와 난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지그시 웃었다.


마음은 감사했지만 우린 둘 다 탄산음료를 마시지 않았기에 정중하게 거절했다. 그 말을 듣고 흠칫 놀란 사장님은 잠시만 기다려달란 말을 남긴 채 후다닥 뛰어가시더니 팩에 담긴 사과주스로 바꿔 주셨다. '그만큼 고마우신 건가', '이렇게 치우는 사람들이 그만큼 드문건가'하는 생각이 들면서 동시에 잔잔한 행복감이 안에서부터 피어나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할머니를 본받은 아내가 할머니를 따라 하고 그런 아내를 본받은 내가 아내와 할머니를 따라 하다 보니, 이처럼 뜻밖의 감사를 동반한 일이 꽤 여러 번 있었다. 대가를 바라지 않고 했던 일들이지만 돌아오는 대가는 상상 이상이었다.


아마 아내가 아니었다면 할머니가 남몰래 느껴왔을 법한 '베풂으로써 얻을 수 있는 귀한 감정'은 평생 모른 채 살아갔을 것이다. 할머니집에 놀러만 가면 동네 사람들이 이것저것 가져다주던데, 이젠 왜 그러는지도 어렴풋이 알 것먼 같다.


할머니는 위대했고,

아내는 현명했다.


두 분에게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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