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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가 민영이한테 그랬다며. 키가 172cm인데 괜찮겠냐고. 그에 일말의 망설임도 대답했지. 상관없다고. 비록 내 키는 170cm였지만 나보다 키가 크다는 게 다가오는 인연을 흘릴 이유는 되지 못한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막상 널 실제로 보니까 키가 크긴 정말 크더라. 내 키가 너보다 작은 거 알고 있었어? 몰랐다고 해두자. 그게 아니라면 172cm에 하이힐까지 신고 온 니가 잔인해 보일 것 같으니까.
근데 키가 문제가 아니었어. 너를 처음 봤을 때 가장 놀랐던 건 니가 웃는 모습이었어. 그렇게 환한 미소를 본 적이 없었는데. 심지어 저 멀리서 날 알아보고서는 한 손을 하늘로 번쩍 들어 손인사도 했잖아. 소개받은 남자에게 답장을 6~12시간마다, 그것도 단답형으로 하는 여자가 그런 모습으로 날 맞이할 줄은 몰랐지.
평소 파스쿠찌 같은 프랜차이즈 카페 같은 곳이 카페의 전부인 줄 알았건만 번화가 골목 구석에 그런 아늑한 카페가 있는 줄은 몰랐어. 너 때문에 알았지. 가끔 지나치는 곳에 위치한 걸 보고선 평소 주변을 얼마나 눈여겨보지 않고 휙휙 지나쳤는지 괜히 반성이 되더라. 한편 카운터에서 커피값 계산을 하려고 지갑을 주섬거리는데 니가 당연한 듯이 계산을 해버렸잖아. 부끄럽지만 나도 ‘데이트 비용은 남자가 내기 마련이다’ 따위의 고정관념이 있었나 봐. 니가 쿨하게 계산하는 장면을 볼 때 고마운 마음이 들기는커녕 충격만 먹었거든. 그때가 너의 첫인상에 이어서 두 번째로 놀란 지점이야. 20살인 애한테 첫 만남부터 커피를 얻어먹다니. 너보다 고작 4년 일찍 태어나서 그렇게 경험이 많은 건 아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그런 그림은 상상해 본 적이 없었어. 주변에서 그런 사례를 들어보지도 못했고.
될 대로 되란 심정으로 아무 생각 없이 널 만나러 갔는데 니 미소와 보기 드문 태도(태도라고 해야 할지 매너라고 해야 할지)에 완전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고 해야 할까. 그 정도면 충분했어. ‘만나보고 싶다’라는 마음이 들기에는. 눈치챘는진 모르겠지만 난 카페에서부터 전략을 바꿨어. 대체 뉘신지 낯짝이나 보고 오자며 있는 둥 마는 둥 하다 오는 것에서 적극적으로 날 어필하는 것으로. 이를테면 몸을 조금 더 앞으로 숙이고, 말을 귀 기울여 듣고, 평소답지 않게 리액션도 크게 해주는 식으로 말이야. 그날 너와 무슨 얘길 했는지는 솔직히 기억이 잘 안 나. 그때 그날을 떠올리면 대부분이 너의 미소뿐이야. 아, 큰 키도 조금.
아니나 다를까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가더라. 카페에서 한 번 보고 헤어지는 게 당연히 아쉬웠지만 달리 방도가 없었어. 너 퇴근 후에 만난 거라 시간이 좀 늦었잖아. 마음에 든다고 괜히 무리했다가 연이 끊기는 것보단 이쯤에서 점 하나 찍고 넘어가는 게 안전하다 생각했지. 넌 어땠을까. 조금이라도 아쉬웠을까. 그랬으면 좋겠다. 그날 너한테서 포착한 반응들을 곱씹어 보면 아무리 생각해도 그린라이트 같단 말이지.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그린라이트라는 내 생각이 맞다는 걸 확인이라도 시켜주듯 헤어지기 전에 결정타를 날렸잖아. 처음 만났을 때처럼 활짝 웃어 보이며 한 손으로 엄지와 새끼손가락을 쭉 펴서 전화 모양을 만들어 한쪽 볼에 갖다 대고는, 손목을 요리조리 돌리면서 ‘연락할게요’라는 입모양과 제스처를 보였으니 그 어떤 남자가 그걸 보고 그린라이트라고 생각하지 않겠냐고. 연락할 마음이 없었다면 그런 애프터서비스(?)는 결코 없었을 거라고 장담해. 그게 아니라면 난 인생을 헛살았다고 봐야지 뭐.
근데 참.. 그게 마지막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