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아르코창작기금선정작
비 내리는 늦가을 오후, 성당에 갔다.
사부님 딸의 결혼식이었다. 오래전 글쓰기 모임을 지도했던 사부님은 당시 거의 예수님 포스였다.
열두 명의 수강생을 마치 열두 제자처럼 거느리고 1차 강의, 2차 뒤풀이, 3차 좀 더 센 뒤풀이 이렇게 종횡무진 이끄시더니 얼마 전 과로(?)로 승천하셨다.
“한 번 스승은 영원한 스승! 의이리, 라는 게 있잖아. 어찌 되었든 다들 등단도 했으니.”
뭐든 잘 챙겼던 당시 반장은 갱신한 전화번호까지 어떻게 알았는지 연락을 해대는 통에 끌려오다시피 했다. 반장이 걸고넘어지는 ‘의이리’라는 게 진짜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오늘 출석 인원을 보면 알 수 있을까?
유다처럼 배신 때리고 다른 스승 밑으로 들어간 제자도 서넛은 되고 문학상 파들은 일찌감치 제자 레떼르를 떼고 저 혼자 잘난 척하고 있고 신춘 출신 중 등단작 이콜 은퇴작이 된 제자 둘은 전화를 받지 않는다고 하니.
하객들이 고풍스러운 성당 마당에 떨어진 젖은 낙엽을 밟고 내 곁을 스쳐 지나갔다.
어둡고 음산한 성당 로비에 들어섰다.
두꺼운 외투와 젖은 가방이 무거워 보이는 하객들이 우산을 접고 때로는 빗방울을 떨어뜨리면서 아는 얼굴을 찾고 있었다. 의이리고 뭐고 나는 그 누구도 모르는 사람으로 박혀 있다가 투명 인간처럼 사라지고 싶을 뿐이었다.
로비 구석에서 하필 B작가와 마주쳤다. 사부님과 동갑내기였던 수제자 왕언니였다.
화장기 없는 얼굴은 밤새 술 마시다 온 사람처럼 핏기가 없었다. 만지면 바스러질 것 같은 푸석한 머리칼은 어깨까지 내려와 그야말로 산발이었고, 너덜너덜한, 빛바랜 코트 밑자락은 흙탕물 범벅이었다.
식이 시작되려면 시간이 좀 남아있었고, '좀'은 삼십 분 가까운 시간이었고, 식을 기다려야 하는 시간치고는 길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녀의 옆자리에 앉았다.
“뭐, 좀 쓰고 있어?”
B작가가 바투 나에게 다가앉았다. 작가들 간의 금기어를 서슴지 않고 첫마디로 내미는 그녀는 예전부터 사부님 아바타였다는 걸 본인은 알고 계실까.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아니, 뭐, 그냥... 뭔가 쓸만하면 폴록에서 손님이 오고, 뭐 그렇죠.”
“하하. 폴록에서 온 손님. 그거 요즘 발표 못하는 작가들의 십팔번이라는데?”
“저도 날마다 폴록에서 손님이 온답니다.”
언제 나타났는지 신춘파 J작가가 계면쩍은 표정으로 꾸벅 인사를 한다.
“아니 이게 누구야? 오랜만이네! 어때 요즘 글은 쓰고?”
지금 B작가는 자신이 사부님이 환생한 듯 행동한다는 걸 전혀 모르고 있는 것 같다.
“글이야 매일 쓰죠. 날마다 폴록에서 손님이 와서 문제죠.”
J작가가 심드렁하게 말을 받았다. 날마다 도서관에 출근하여 읽고 쓰고 읽고 쓰고 하다가 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디 발표된 것도 없고, 책 한 권 변변하게 나온 것도 없으니 대체 뭘 쓴 걸까?
나의 이런 속내가 고스란히 드러났는지 그가 말을 이었다.
등단한 지 십 년이 넘어가는데 청탁을 받아본 일도, 인터뷰를 해본 일도, 문단에 친한 사람도, 아는 출판사도 없고, 해서 요즘은 그냥 자신의 블로그에 불어 터진 국수 가닥처럼 맛대가리도 없고 멋대가리도 없는 글을 줄줄 뽑아 올린다고 했다.
“이게 말이에요.”
그녀는 쑥스럽게 웃으며 자신의 손을 들어 보였다.
“글을 안 쓰면 중독 현상처럼 떨리거든요.”
“아니 그러면 투고라도 하지 않고!”
B작가의 말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J작가는 출판사에서 보내온 메일을 읽어 주었다.
... 선생님께서 투고해 주신 원고를 읽고 다방면의 가능성을 토론하였으나 저희 회사의 현재 출판 방향과 다소 맞지 않은 부분이 있어 반려하게 되었으니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훨씬 잘 맞는 출판사를 만나 좋은 책으로 나오기를 기원합니다. 총총.
같은 메일을 서너 번 받아본 경력을 어떻게 숨겨야 할지 표정 관리가 되지 않는 나에 반해 정작 J 작가는 심상한 표정이었다. 다들 이렇게 살지 않아? B작가님만 빼고요.
B작가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의 위크포인트는 사부님이었다.
피나는 노력 끝에 객관적인 입지는 사부님 윗길이 되었지만 부풀어진 스캔들은 어디까지 사실인지 알 수 없었다. 사부님 장례식 때 조사를 낭독했다는 것도 조사의 내용이 만만치 않았다는 것도 풍문으로 들었을 뿐이지만. 사부님은 B작가의 작가 인생에 고통과 상처를 주는 방식으로 존재해 B작가의 소설에 기여한 바가 크다고 하겠다.
그녀가 유령 같은 형상으로, 솔직하게 말한다면 영락없는 마녀의 몰골로 나타난 것이 놀랍지 않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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