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숙경 Sep 15. 2023

하객들 -2

- 2023 아르코창작기금선정작

B작가가 일어선 자리에 누군가 털썩 주저앉았다. 보니, 작가에서 편집자의 길로 들어섰다는 R이었다. 

모두에게 어깨를 으쓱함으로 쌈박하게 인사를 끝낸 그녀가 보르헤스 재판본을 돌리며 또박또박 출간의 변을 늘어놓았다.

보르헤스를 읽으면 보르헤스처럼 글을 쓰고 싶어 지는데 보르헤스처럼 글을 쓸 수 없다는 것을 금세 알게 되고 그 후부터는 보르헤스를 넘기면 자존심이 상하고 마구 슬퍼지고 어느 때는 보르헤스 이름만 들어도 심장이 찢어지는 아픔을 느꼈다고,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인간들이 한둘이 아니라는 거. 그래서 위안이 되었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이냐고. 작가들은 보르헤스, 보르헤스, 하다가 온몸에 칼을 꽂은 채 죽어갈 운명이라고 체념하는데 그건 여러분들의 한숨 섞인 고백이지만 또한 나의 고백이기도 하니까. 작가의 작가가 되어 늘 당신들 자신을 멸시하게 만드는 보르헤스의 존재는 그리고 보르헤스의 소설은 작가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었다고 공시되어 있기에 이렇게 큰 활자본으로 다시 출간했다는 거.

둘러앉은 분들의 공감을 별로 얻지 못한다고 느낀 R은, 나이는 가장 어린 주제에 손에 닿는 대로 작가들의 등을 토닥였다. 알죠, 알고 말고요. 보르헤스가 우리에게 고통을 너무 많이 주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 고통은 글로 이어지지 못하고 술로 이어졌다는 것을.

어디서 전자담배라도 피우고 왔는지 한결 낯빛이 좋아진 B작가가 돌아왔다. 그래, 장편은 좀 써 봤어? 너 그쪽 문예지에는 발도 들이지 마라. 격 떨어진다. 요즘 젊은 애들 소설은 읽을 게 없어 모두 게이니 뭐니 하면서, 들.

B작가의, 예의 장광설이 다시 등장했다. 둘러앉은 작가들은 지루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작가와의 대화’를 이쯤에서 끝내고 싶었다. J작가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책 한 권 제대로 사주는 인간도 없는 글을 왜 쓰느라 이 난리인지 저도 모르겠어요.”


“모르긴 뭘 몰라!”


B작가의 목소리가 단호해졌다.


“할 수 있는 지랄이 그것밖에 없어서, 글 쓰는 것밖에 없어서 쓰는 거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거야. 할 수 있는 지랄이 쓰는 거밖에 없으니까!”


이런 지랄 맞은 이야기를 늘어놓는 B작가와의 인연이 지랄 맞게 길다는 사실. 우리는 모두 입을 다물었다.


“우리는 그렇게 지랄을 하다가 가는 거란다. 누가 말했는지는 잊었다만 이런 이야기가 있지. 무당 못 된 년들이 소설 쓴다.” 


마침내 식이 시작되었으므로 ‘무당 못된 년’들은 우르르 예배당 안으로 들어갔다. 

이제껏 나눈 이야기가 무색할 정도로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나란히 앉아 정면을 바라보았다. 제단 벽에는, 아, 탄성이 나올 만큼 아름다운 십자가가 걸려 있었다. 십자가가 저렇게 아름다우면 어쩌란 말인가. 고통의 자국이 보이지 않는 십자가 때문에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예배당 안에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가장 헛되어 보이는 결혼이라는 것을 하려는 남녀와, 남녀를 둘러싼 일군의 군상들이 비바람을 견디며 사방에서 달려와 고요히 앉아 있었다. 

사부님 때문에 하나같이 크고 작은 상처를 받은 사람들이었겠지만 마다하지 않고 달려와 주었으니 모두 착한 사람들이다. 

쓸데없는 대화로 식전의 시간을 버틴 우리들은 결혼식 내내 눈을 감고 있었다. 반장은 기어이 오지 않았다. 

이전 02화 하객들-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