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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숙경 Aug 19. 2023

소망 없는 불행

-너무 어렸을 때 들이닥친 결핍, 으로 가득찼던 세븐틴

노벨상 수상자인 페터 한트케의 <소망 없는 불행>이라는 책이 있다. 산문집이라고도 하고 소설이라고도 하는. 그렇게 본다면 산문 쓰고 소설이라 불러도 상관없는 세상이 된 것 같기도 하다...

한강의 소설(이라고 말하는) <흰>을 읽어보면 더욱 그런 느낌이 오기는 하지.

페터 한트케의 소설(혹은 산문)은 제목부터 나를 매혹시켰는데 내용도 감동적이었다. 나에게는.

소망 없는 불행이 어떤 모습인지 참 잘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

나의 <소망 없는 불행>은 그에 비하면 사람 모습 중 눈썹만 하다는 생각...

그래도 올려야지. 화려하고 고독했던 세븐틴을.


2부 - 2 세븐틴


소망 없는 불행



1974년. 열일곱 살이 되었다. 나는 매력적인 열일곱 살이 되기 위하여 열 살 안짝에 읽었던, 그리고 아버지가 감동에 찬 목소리로 이야기해 주었던 일본 소설 ‘세븐 틴’을 다시 찾아 읽었다.

나는 가쯔라기를 잊었다. 아무리 상처를 많이 받았어도 풋사랑은 풋사랑이었다. 불행해지고 싶은 나는 나만큼이나 매우 불행해 보이는 한 남자(동갑내기 동급생이지만 나에게는 신처럼 보였다)에게 몰두하기 시작했다. 과한 액션으로 씻을 수 없는 상처가 생겼다는 것을 금과옥조로 삼은 나는 일체의 행동을 자제하고 은밀하게 사랑을 키워간다. 그 공간에는 나에 대하여 나처럼 은밀하게 사랑을 키워가는 또 한 남자가 있었다. 그 역시 내가 누군가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나에 대하여 동갑내기 동급생이지만- 신처럼 생각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는 나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나는 머리를 길렀다. 머리는 계속 자라 허리선까지 닿을 정도가 되었다. 머리를 기르면서 나는 자유를 느꼈다. 중학교 내내 나를 괴롭혔던 ‘귀 밑 일 센티’ 단발머리에서 벗어나서만은 아닐 것이다. 내 몸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자유. 그 자유는 폭을 얼마나 넓히느냐에 따라 삶의 가치와 방향, 끝이 달라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나는 더욱 자유했다. 내가 내 인생을 내 마음대로 살지 못한다면 그것이 내 인생인가!

그것은 무모함에 가까웠다.


나는 다른 문학책과 더불어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하염없이 지루했지만 일단 끝을 봐야겠기에 끝까지 읽었다. 하품이 나왔다.

학교에서는 문학과 음악과 미술이 나를 키우고 있었다. 그 세 가지 과목은 선생이 바뀌어도 여전히 총애를 받았다. 공부에서 자유로운 열일곱 살짜리 고등학생은 무엇이든 흡수했다. 학교에서 은근하게 가까워진 친구 두엇은 모두 문학과 음악, 그리고 미술 쪽이었다.

그녀들은 서로에게 눈에 뜨였고, 서로를 알아보았고, 그러므로 유치한 대화 따위는 나누지 않았어도 상당히 깊은 관계를 형성했다. 난독의 경향이 있는 나로서도 범접치 못할 독서량을 가지고 있는 아이, 거의 천재적으로 음악성이 있는 아이, 그 외 팝송과 무한한 쪽지 질에 미쳐있는 아이도 있었다.


나는 시니컬한 채 하면서 그녀들 앞에서 나의 얄팍함을 드러냈다. 미술대회나 전국 백일장 같은 곳에 나가 상을 타오면서도 부끄러웠다. 나는 상을 타는 것을 좋아하고 허접한 상이나 타려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그런 우스운 것들을 뒤쫓는 ‘유치한 아이’로 낙인찍힐까봐 두려웠다. 유치했던 것은 사실이다. 내가 유치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유치함을 넘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알고 있었지만 나는 실력이 없었다.


나는 정말 이 세상을 냉소적으로 바라보고 싶었다. 데미안처럼 온몸이 시니컬한 존재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지점은 내가 닿기 어려운 높은 곳에 있었다. 어렸을 때 동명이인이었던 일류 아이에게 받았던 상처가 스멀스멀 살아났다. 나는 이류구나. 일류는 되지 못하는구나. 나는 자학하기 시작했다.


느닷없는 가난을 견디지 못한 언니는 가출했다. 언니는 담임의 조언대로 간호대나 교대에 갔어야 했다. 하지만 허영덩어리였던 언니는 허영이 가득하다고 소문난 여자대학에 지원했고, 아버지가 죽을 힘을 다하여 등록금을 미리 마련했음에도 불구하고 떨어졌다. 언니는 자신의 허영심을 만족시킬 여력이 없는 자신의 실력과 집안사정에 대하여 절망했고 혐오했음에 틀림없다.

하긴 아무리 생각해도 환자의 뒤치다꺼리를 한다거나 조는 아이들에게 분필을 던지는 언니의 모습은 상상할 수 없었다. 언니는 신촌 어귀에서 패셔너블한 옷차림으로 활보해야 했다.


삼 년 뒤 가까스로 언니를 만났을 때, 나는 알았다. 결핍은 사람을 위대하게 변모시킨다는 것을. 결핍은 정말 위대했다. 그것을 품고 살려면 자신을 찢어버리거나 해체해 버려야 한다는 것은 훨씬 후에야 알았다.





http://aladin.kr/p/BFrxn

'소망없는 불행'은 너무 외로운 나머지 자살을 선택한 어머니를 어린 시절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관찰한 수필이다. 제목 '소망없는 불행'은 어머니의 삶을 일축한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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