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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숙경 Aug 18. 2023

응답하라 1973

-50년 전, 열다섯 살 소녀는 뭘 하고 있었나

어제 글을 올려놓고 보니, 하염없이 길게 늘어진 글들이 내가 보기에도 읽기 힘들었다.

오늘 3부로 고딩시절 몽땅 때려 넣으려 했으나 분량이 너무 많다는 판단(어제 판단했으면 좋았으련만)하에

1년 단위로 쪼개기로 다시 마음먹었다. 

틴에이저 시절은 인생 중 가장 에너지가 폭발하는 시기가 아니런가. 

세월을 헤아려보니 50년 전이라... 살다 보니 이렇게 오래 살기도 하는군. 

정부가 나이를 깎아주셔서 열다섯이 된 고딩 1학년 시절, 요즘 고딩 1학년은 뭘 하는지 모르지만 50년 전에는 이렇게 보내기도 했더란다^^


어쨌든 그리하여 3부 - 1

응답하라 1973, 시작합니다^^




1973년. 열여섯 살, 고등학교에 입학. 실은 학교에 다닐 형편은 아니었다. 부자는 망해도 3년은 간다,라는 말처럼 3년이 그렇게 지나자 집에는 남아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엄마는 거의 초능력으로 교복을 맞춰주고 등록금을 마련했다. 하지만 체육복을 사는 데까지는 두 달이 넘게 걸렸다. 버틸 만큼 버티던 나는 체육시간이 있는 어느 날 결석을 해버렸다. 노총각이었던 담임은 순진하고 착했다. 나의 결석 이유를 눈치챈 그는 출석처리를 해주는 것으로 나를 위로했다. 그의 배려 섞인 위로는 나에게 깊은 상처가 되었다. 기말고사에서 나는 반에서 꼴찌를 함으로써 그의 위로를 갚아주었다. 담임이 실망하는 모습이 통쾌했다. 


수업 시간에는 문고판 소설을 읽거나, 글을 썼다. 즐거운 수업시간도 있었다. 나의 글을 좋아하는 국어선생에게 나는 시 비슷한 메모들을 갖다 주곤 했다. 난해하기 짝이 없는 시 구절에 대하여 국어선생은 이상을 흉내 내는구나, 하고 격려 아닌 격려를 해주었다.


미술 시간도 흥미 있었다. 내가 그림을 그리면 미술 선생은 늘 내 뒤에 서서 나의 터치를 감상하곤 했다. 어느 땐 신음소리 같은 감탄사를 내뱉기도 했다. 나에게는 예술적인 끼가 잠재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음악 시간도 재미있었다. 미친개라는 별명이 있던 노총각 음악 선생은 강제로 합창부원을 차출했는데 절대음감이 있던 나도 합창단에 들어가게 된다. 나는 음을 정확하게 낼 수 있었고 화음을 만드는 과정을 좋아했다. 베토벤의 신의 영광(미션 스쿨이어서 성가곡을 많이 불렀다)을 원어로 부를 때는 가슴이 뛰기도 했다.


학교는 나에게 그다지 괴로운 학습기관이 아니었다. 내가 싫어하는 수업에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했고, 내가 좋아하는 수업은 철저하게 누렸다. 나는 늘 학교에 일찍 갔다. 어느 땐 수위 아저씨보다 먼저 정문에 도착할 때도 있었다. 인적이 뜸한 새벽길을 걸어가는(뒤늦게 첨부함: 그 새벽길은 지금 고대안암병원이 있는 그 언덕길이다. 당시에는 깊은 숲 속이었다) 그 재미로 학교에 다녔는지도 모르지만.


교회 고등부 모임은 전성기를 지나는 중이었다. 매력적인 선생들과 두뇌 명석한 선배들이 나의 지적욕구를 채워주었다. 유신체제 하에서 그곳은 정치 문화적으로 대단히 업그레이드되어 있었다. 당시 의식 있는 종교인들은 청소년들에게 대단히 적극적으로 현세의 움직임을 알리려고 했고, 그것은 종교 안에서 암암리에 이루어졌으므로 우리는 국가관이나 종교관 세계관 등에 대하여 체계적인 학습을 받을 수 있었다. 그것은 행운이었다.


김민기의 금지된 노래를 배우고, 마틴 루터 킹 목사의 We shall overcome을 비장한 목소리로 합창했다. 그곳에는 사이먼과 가펑클이 있고, 그리고 헤세의 나르시스 운트 골드문트가 있었다. 독서회 발표 시간에 헤겔에 대한 리포트를 낭독해서 주위 사람을 깜짝 놀라게 했던 기억도 난다.


당시 사회적으로 하이클래스였던 선생들은 우리에게 의미 있는 독서와 클래식, 그리고 기독교의 본질에 대하여 심도 있게 가르쳤고, 나는 그 모든 것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였다. 수재들이 많았던 선배들과의 토론이나 대화도 지적 성장에 일조했음은 물론이다. 뿐인가, 그곳에서 나는 결핍 덩어리의 남자를 만나게 된다. 엄밀한 의미에서 나의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이 되는.


교회 문집을 만들면서 나는 또다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나의 짧은 소설은 미처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동급생과 최고의 작품이라고 치켜세우는 선생, 의미 있는 미소를 보내는 선배들 사이에서 오래 동안 회자되었다. 너는 훌륭한 작가가 될 거다. ‘갈매기의 꿈’을 선물하면서 선생은 격려했다. 알겠지,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본다.


그리하여 나는 높이 날아갔다. 너무 높게, 먹이가 없는 저 높은 곳으로.




https://jsksoft.tistory.com/11231

참 많이도 불러제꼈다. 영어 가사도 쉬웠고 부르기는 더 쉬웠다. 교회 청소년실에서 남녀학생들이 동그랗게 모여 앉아 교회오빠가 기타 반주를 넣으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부르고 또 불렀다. 당시 교회는 사회, 문화의 선구자적인 면이 없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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