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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숙경 Sep 15. 2023

열다섯 살 싱클레어의 불행

- 몇 년 후, 고대 사학과에 들어간 데미안을 다시 만났다네.

1972년. 열다섯 살이 되었다. 나는 고독해졌다. 아이들은 입시공부에 빠져 드는데 나는 공부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래도 성적은 과히 나쁘지 않았다. 나는 수업 시간에도 소설책들을 놓지 않았다. 간혹 선생들에게 발각되어도 ‘문학의 수재’ 정도로 인지되었던 나의 위치 때문에 묵인되었다. 

나는 방자해졌다. 이년 째 가쯔라기와 음악 선생 사이를 넘나들면서 수많은 이야기들을 만들어냈고, 나는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었다. 나는 자의에 의하여 작의적으로 고통받아야 했고, 슬퍼야 했으며, 온종일 음울한 표정으로 픽션과 현실을 짬뽕시켰다. 나는 나 스스로를 세뇌했다. 나는 나를 최대한 비극적인 경지로까지 몰고 가는데 성공했다. 그런 것을 두고 성공이라고 하지는 않겠지만. 그리하여 나는 불행해졌다.


그때 ‘데미안’을 만난다. 나보다 세 살 위인 그녀는 내가 이해하기 어려운 병명의 지병이 있었다. 학교를 몇 년 쉬고 나왔는데 나와 한 반이 되었다. 그녀는 책가방도 제대로 들지 못했고, 체육 시간에는 늘 교실에서 책을 읽었다. 그녀는 곧 나에게로 다가왔다. 매우 철학적이고 이지적이며, 수재 정도의 두뇌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언니가 가방을 들어주기 위하여 학교로 올 때까지 나는 그녀와 앉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는 나보다 책을 몇 배 더 많이 읽었고, 생각이 깊었다. 


그녀는 나의 데미안이 되었다. 그녀 앞에 서면 나는 어수룩하고 실수투성이의 싱클레어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필시 싱클레어 같은 나의 허약함과 느닷없이 찾아온 결핍에 대한 마음의 병을 꿰뚫고 있었을 것이다.

때로는 심오하지만 때로는 유치한 생각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중적인 나를 그녀는 잘 컨트롤하고 배려했다. 나는 그녀의 시니컬한 웃음소리, 시니컬한 목소리, 시니컬한 표정, 모두를 존경했다. 존경, 이라는 단어는 딱 어울린다. 내가 아무리 시니컬하려고 노력해도 나는 허술하고 어딘지 가짜 티가 났는데 그녀는 몸뚱이 전체가 시니컬했다. 나는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내가 그렇게도 시니컬해지려고 노력하는 중, 엄마가 돌아왔다.

엄마는 예전처럼 다시 부엌에서 음식을 하고, 잔소리를 하고, 그리고 한숨을 쉬었다.

나는 세상을 강하게 견디어내지 못하는 심약한 엄마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홀로 커가는 중이었다.

고등학교 원서를 쓸 때 엄마와 아버지는 다투었다. 엄마는 상업학교에 가서 취직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고, 아버지는 펄쩍 뛰었다. 쟤는 작가가 될 거야. 대학을 가야지!

주산이나 수학을 싫어하는 나로서는 상업학교에 간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었다. 아버지는 완강했다. 치맛바람이 대단했던 전력이 있는 엄마는 이내 수그러들었다. 


인문계 진학을 앞두고 학교 선택은 쉽지 않았다. 학교 측에서도 나의 진학을 두고 고민이 많은 눈치였다. 학교 성적은 형편없는데 학력고사 점수는 월등하게 잘 나오는 내 성적을 보고 담임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문제는 나 스스로 나의 실력을 믿지 못하는 것이었다. 나는 자신이 없었다. 공부는 더 이상 나에게 고민을 안겨다 주지 못했다. 다만 학교를 선택하는데 갈등이 있었던 것뿐이다. 나는 학교에서 권하는 급에서 두 단계 학교를 낮춰 시험을 치렀다. 시험장에서 생각했다. 이곳은 아닌 것 같아. 나는 떨지도 않고 꽤 건방진 표정으로 시험지를 훑었다. 모두 시시해 보였다. 예상밖으로 나는 낙방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뜻밖이었지만 나의 생각으로는 당연한 결과였다.


나는 잘 아는 친척 언니의 권유에 따라 집에서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있는 후기 학교를 택했다. 사대 부속고등학교였다. 그녀는 그 학교에서 장학생이었다. 언니는 갑자기 힘들어진 가정 형편을 들먹였다. 장학생이 되거라. 장학생은 무슨... 하지만 그곳에서 나는 공간적인 자유와 시간적인 자유를 동시에 누리게 된다. 





삼년 전인가, 데미안을 다시 읽었다. 이번에는 배수아 번역본으로. 

지금까지 살면서 데미안은 줄잡아 열 번 이상 읽은 것 같다. 그만큼 좋아했다. 


http://aladin.kr/p/2L9U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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