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여덟은 모든 걸 아는 것 같으나 아무것도 모를 때
12년의 학창 시절이 끝나간다.
틴에이저 시절도 끝나간다.
50년 전쯤의 고 3은 저렇게(한 짓도 유치하고 그 시절을 쓰는 스타일도 유치해서 부끄럽네)도 살았는데
지금의 고3 아이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생활을 할까?
이 글을 올리며 잠깐 생각해 보았다. 잘 모르겠다.
철이 없어 그땐 몰랐어요
우리 시대에 유행했던 유행가 첫 소절이다. 왜 저렇게 살았는지 모르지만 철이 없었던 것은 확실하다.
머릿속에 뭔가 좀 들어있는 것 같기도 하지만 하는 짓은 유치하고 철이 없었다.
이 나이까지 살아보니,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유치한 것이 럭셔리해지거나 저절로 철이 들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겠다. 어쨌든 시작합니다.
1975년. 학교생활을 할 수 있는 마지막 해. 더 이상 나는 학교에 갈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하교 길에 몇 번 쓰러지는 일이 생겼다. 영양실조였다. 나는 핏기 없는 얼굴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모든 것이 누렇게 떠 보였다. 일기장은 나날이 두꺼워져 갔다. 학교에서 개인문집을 만들게 했는데 나는 ‘通路’라는 제목을 붙였다. 통로가 없었던 나는 사념이 가득한 글을 빼곡하게 써넣었다.
악착같이 고수하려고 했던, 내가 태어난 집에서 집 달리에 의해 쫓겨났다. 나는 콩댐으로 반질거리는 방을 워커발로 유린하는 사내들을 무심하게 바라보았다. 길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진 세간들은 일주일이 넘도록 먼지에 쌓이고 비를 맞으면서 누추해졌다. 나는 친구의 집으로 갔다. 그곳에서 친구 집 식모가 싸주는 도시락을 들고 학교에 가고, 친구와 함께 공부하고 친구와 함께 잠을 잤다.
국전에 여러 차례 입상했고, 학교 근처에서 큼직한 화실을 운영하는 미술 선생이 말했다. 미대에 가거라. 내가 그냥 지도해 주마. 나는 그를 쫓아 화실에 갔다. 뒤상의 변기 그림이 있는 화실이었다. 집이 없는 나는 그곳에서 살고 싶었다. 그림을 그리고 먹고 자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나를 원하는가? 나는 도리질했다. 나는 아무래도 상관없었지만 이상한 스캔들로 창창한 그의 앞날을 망칠 생각은 없었다.
서울대를 나온 국어선생이 조언했다. 국문과를 가야겠지? 좋은 작가가 있는 곳을 찾아보아라. 그녀는 나의 혈액형을 알아맞힐 정도로 나를 파악하고 있었다. 그녀는 ‘빈처’에 대한 나의 독설을 유쾌하게 웃어줄 줄 아는 관용도 있었다. 그녀는 나의 재능을 사랑했던 것 같다.
나는 작곡에도 흥미가 있었다. 열 살 무렵부터 시를 쓰고 그 시에 곡을 붙여 혼자 자작곡을 불러왔던 나는, 음악노트가 아닌 커다란 작곡용 오선지 위에 음표를 그려 넣을 때 행복했다. 독창적인 작곡은 아니었지만 꽤 흥미 있는 작업이었다. 기분에 따라 다카포 같은 기교를 넣기도 했다.
바흐의 평균율처럼 수학적인 음의 배열에도 한동안 미쳐있었다. 코오르 위붕겐의 옥타브 너머까지 떨어진 음과 음을 통박으로 기어이 잡아냈을 때, 나는 희열을 느꼈다. 특히 국악의 오음계는 대단히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이름조차 아름다운 궁. 상. 각. 치. 우.
나는 눈에 보이는 사물에게 오음계를 붙였다. 나는 우(책가방)을 들고 상(집)을 떠나 각(학교가는 길 중간에 있는 오롯한 들길)을 걸으며 궁(사랑하는 남자)을 그리워한다, 이런 식이었다.
당시 대학에 가고 싶어서 안타까워했는지 알 수 없다. 나는 고등학교에 입학할 때부터 포기했던, 그러므로 충분히 인지되어 있던 사항이어서 그다지 방황하지는 않았다. 나는 데미안의 시니컬에 바짝 다가서고 있는 중이었다.
영양실조에 걸린 열여덟 살의 여자(소녀가 아니라 여자가 되어 있었다)는 첫사랑을 키워가기로 결심했다. 그것은 돈이 드는 일이 아니었다. 나는 그에게 편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몰래 키웠던 사랑은 서서히 드러났고 그에게 전해졌다. 그는 소문내지 않고 편지를 읽었다. 그때 그가 나에게 다시 편지를 돌려보내 않은 것은 전적으로 그의 불찰이었다. 그는 나를 미처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는 나에게 평생 시달리게 된다.
믿을 수 없게도 나는 어느 지방 사대 국문과에 합격한다. 학교에서는 그 해의 놀라운 일로 나의 합격을 꼽았다. 내 성적은 삼 년 내내 하위 10% 안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물론 대학에 가지 못했다. 시험만 치르겠다고 엄마에게 다짐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나에게는 ‘합격을 했지만 가지 않았다(혹은 가지 못했다)’라는 명분이 필요했다. 그만큼 나는 유치했다.
아버지는 푸르스름한 등록금 통지서를 양복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십몇 년이 지난 후에도 아버지는 그것을 고이 보관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슬픈 부적이었다.
1975년 10월 30일 영국의 락밴드 퀸이 싱글 앨범 <Bohemian Rhapsody>를 발표하였다.
몇 년전 퀸의 프레디 머큐리를 다룬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를 보면서 감회가 새로웠다.
70년대 후반 명동에 챔피언이라는 술집이 성황이었는데 아마도 퀸의 We are the Champions에서 비롯된 제목이라 짐작한다. 단골처럼 드나들었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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