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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숙경 Sep 14. 2023

쟌느

-1979년 즈음 이런 날이 있었다지? 오래전 나에게?


쟌느. 너의 나부끼던 길고긴 머리카락을 떠올린다. 아주 짧게 잘려있는 지금의 머리 모습과는 아주 달랐지. 

강 이쪽 끝에서 저쪽 끝을 향하여 너는 걸어가고 있었어. 9월이 막 오려고 하던, 아직도 무더웠던 한 여름의 깊은 밤.
빛바랜 아버지의 와이셔츠와 무릎이 헤진 청바지 차림으로 너의 가냘픈 몸을 가리고.


오가는 차량들이 아주 띄엄띄엄 헤드라이트를 밝히며 지독한 속도로 쟌느, 너의 곁을 스치고 지나가면 아, 쟌느, 너는 쓰러질 것처럼 위태하게 흔들렸지.
술을 많이 마셨던가, 그때? 누구와 마셨던가, 그때?

다리 중간 즈음에 쟌느, 너는 걸음을 멈추고, 낮의 열기가 아직 사라지지 않은 난간을 붙잡고, 꽉 움켜쥐고, 다리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잠시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는지 귀를 기울이기도 했다.
가로등 불빛은 너무 희미해서 다리아래는 깊은 어둠뿐, 보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쟌느, 그때 아마 너는 많이 취해있었을 거다. 점심도 거른 채 빈 속에 마신 술 때문에 조금은 고통스러웠어? 아니면 아주 많이?

허리를 구푸려 난간에 뺨을 대고 마치 누군가의 심장소리를 듣는 것 같은 모습으로 한동안 그렇게 서 있었어.
아마 쟌느, 그때, 그런 생각을 했을 거야. 다리 이쪽에서 저쪽 끝까지 걸어가면 그곳은 천국이다. 그러므로 나는 뒤로 돌아갈 수 없다. 다시는 되돌아가지 않을 테다. 내가 한 걸음씩 저쪽 끝을 향하여 걸어 갈수록 이제껏 살아온 나날과는 점점 멀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걸어야해. 저쪽 끝까지.
하지만 쟌느, 너는 걸을 수 없었다. 더 이상 한 걸음도 옮길 수 없었어. 너무 취한 데다가 다리는 너무 길었다. 가야할 곳은 분명히 보이지만 너무 멀었다.

다시 맹렬한 속도로 차가 너를 스쳐지나갔고, 다시 너의 길고긴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쟌느, 너의 인생에 허리춤까지 길었던 머리카락이 생존의 의미 전부였던 때였을 것이다. 너의 자유는 고작 머리를 기르는 것뿐이었던 때였을 것이다.
얼마동안 쟌느, 너는 다리위에 서 있었던 것일까. 

통행금지 사이렌이 불 때까지. 이제는 가고 싶어도 더 이상 걸을 수 없다는 사인이 울릴 때까지.

쟌느, 네가 할 수 없다는, 그 부자유를 핑계 댈 수 있는 사이렌이 불 때까지, 아, 쟌느.
어쩌면 쟌느, 네가 다리 위를 걸으며 고대하던 것은 다리 저쪽의 천국이 아니라, 더 이상 가면 안 된다는 사이렌이었는지도.
 
지금도 사이렌이 울리고 있다. 쟌느, 사랑해.
 






그 언젠가 죽자고 들었던 쟌느. 

들으면서, 그날 밤의 내가 떠올랐다. 

노래와 딱맞춤이었다. 

Françoise Hardy & Air---- Jeanne


https://youtu.be/b931FIuW6UE?si=oS9xmEQbk49UFE0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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