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에 이런 음악을 들으면 꼭 사단이 나더라~
새벽 두 시에 바흐 평균율을 듣고 있다.
클래식 구약성서라는 별칭에 어울리게 단정하고 절제되었고 대단히 수학적이다. 기하학적인 음의 변주는 자로 잰 듯한 음들의 거리에서 냉정함이 느껴진다. 그래서 더 좋다. 나에게 없는 것이니 더욱 쏠리는 것인가. 어느 순간에도 결코 뭉개지지 않는 저 음들은 한 밤중에 기숙사 사감처럼 나를 교육시키고 있다.
정제된 소금 같은 느낌. 대나무 통속에서 열몇 번 구워낸 죽염 같은. 불순물 하나 없는 순수한 음이다. 그것들은 각자 냉정을 유지하면서도 음들이 이어지며 묘한 슬픔을 자아낸다. 고독한 차가움이 이런 것일까.
해질 무렵 잠깐 피아노를 치면서 느낀 연장선이다. 우연히 펼친 악보가 하필 바흐 평균율 BWV 846이었고, 너무 오랜만이어서 손가락이 자꾸 튕겨져 나가는 바람에 그 짧은 곡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어쩔 수 없이 가운데 페달을 밟고 (옆집에서 듣지 못하도록 소리를 죽여) 연습을 몇 번 한 후에 겨우 제대로 소리를 냈는데도 하품 나는 속도로 건반 위를 벌레처럼 기어 다녔다.
이쯤 되니 욕구불만일 때 열 번씩 스무 번씩 두드려댔던 저 화려한 ‘꽃노래’는 이제 더 이상 칠 수 없게 된 것을 인정해야겠다. 문제는 그것뿐이 아니다. 층간소음이라는 복병은 이제 심각한 사회병폐로 확대되는 바람에 이전처럼 선뜻 피아노 뚜껑을 열게 되지 않는다. 더구나 내가 사는 곳은 연로하거나 아프신 어르신들이 많아서 명료하고 각진 음들이 뭉쳐서 내는 소리를 아름답게 들어주실 분이 과연 계실까 하는 회의가 앞선다. 결국 5년째 사는 이곳에서는 자의 반타의 반 피아노를 멀리할 수밖에 없었다.
벽 한쪽을 가구처럼 묵묵히 차지하고 있는 피아노를 볼 때마다 가슴께가 묵직했다. 사십 년 가까이 나의 영혼을 달래주던 피아노가 퇴물이 되어가고 있다니 세상 정말 많이 변했다. 저녁 내내 피아노 생각이 떠나지 않았나 보다.
내가 아, 그래서 이 밤 바흐를 듣는구나.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비로소 내가 이해되었다. 이렇게 내가 나를 이해하는데도 시간이 걸린다. 그렇게 자신을 이해하느라 평생을 보내기도 할 것이다. 어쩌면 끝내 자신이 어떤 인간이었는지 모르는 채 세상을 떠날 수도 있겠지.
피아노를 좋아했다. 조율된 음의 반듯함, 그것은 현이 가지고 있는 음폭의 여유와는 다른 정확함이다. 내가 G# 건반을 누른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G#의 해머를 두드린다는 것이고 그것은 반항할 여지없는 인과로 나타난다. 악보를 본다는 것은, 악보에서 지시하는 대로 음표를 누르고 표시된 음의 길이만큼 길게 눌러주고, 운지법에 따라 손가락을 움직이겠다고, 그렇게 따라가겠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악보에 그려진 대로 연주해야 가장 정확하고 원활한 연주를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고, 그러므로 특히 그것이 연습곡일 경우, 연습곡이므로, 더욱 정확하게 지시사항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 지시사항을 따르지 않으면 레슨 선생에게 가늘고 긴 지시봉으로 손등을 맞는다.
어릴 때 그 여리고 작은 손등을 많이도 맞았다. 하지만 그렇게 맞으면서 배운 덕분에 피아노를 칠 때 악보를 보는 습관을 갖게 되었고, 운지법대로 손가락을 움직이게 되었고, 메트로놈 박자에 익숙해졌고 청음이 발달했다.
세월이 흘러 피아노가 쓰레기 분리수거장에 버려져 있는 세상이 되었지만 음악의 기본이 되는 위치는 여전하다. 내가 좋아하는, 제목이 ‘피아노’인 영화는 명작이고 걸작이다. 피아노의 주인공에이다 역을 맡은 홀리 헌터는 극 중에서 에이다가 연주하는 곡을 모두 직접 연주했는데 그 노력은 칸과 아카데미에서의 여우주연상 수상으로 이어졌다.
헌터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어린 시절 피아노를 배우게 한 부모님과 피아노 선생님께 감사하다”는 소감을 남겼다. 나도 헌터는 아니지만 어린 시절 피아노를 배우게 한 부모님과 피아노 선생님께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계속)
소리가 존재할 수 없는 고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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