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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숙경 Sep 15. 2023

바흐의 평균율을 듣는 밤 -2

-냉혹한 현실에 눈감은 로맨티스트의 어린 시절

몇 달 동안 집에 피아노가 두 대 존재했던 시간이 있었다. 

중학교에 갓 들어간 초봄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1965년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던 새카맣게 윤이 나는 호프만 피아노 옆에 상앗빛 색이 고급스럽게 빛나는 피아노가 나란히 방에 놓여 있었다. 정말 아름답고 품위 있는 피아노였다! 두 대의 피아노는 마치 협주곡이라도 연주하는 것처럼 작은방에 일렬로 놓였다. 1970년은 서울의 중산층이라 해도 피아노 구경하기 쉽지 않은 시절이었다. 그런데 두 대씩이나!


  하지만 그토록 아름다웠던 두 번째 피아노는 나에게 있어서 낯선 가난의 입성기념물이었다. 피아노가 세간을 밀치고 작은 방으로 들어오면서부터 나의 곁을 평생 떠나지 않은 가난이 나의 생 속에 침입했던 것이다. 아버지의 급작스런 파산으로 을지로에 있던 아버지 회사 녹음스튜디오를 정리하면서 겨우 건져왔을 거라고 눈치껏 어림짐작할 수 있었다. 


  책을 읽다가도 내가 피아노 앞에 앉기라도 하면 득달같이 달려들어 자리를 빼앗던 언니도 두 대의 피아노를 침울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두 대의 피아노의 뚜껑을 열면 일렬로 늘어선 희고 검은건반이 멀고 먼 길처럼 아득하게 길어 보였다. 이제는 싸울 필요가 없게 되었는데도 언니와 나 그 누구도 피아노에 손을 대려 하지 않았다. 집안을 감돌던 우울한 어떤 기운이 집에서 노래를, 음악을, 웃음소리를 야금야금 빼앗아가고 있었다. 몇 달 되지 않아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두 대의 피아노가 동시에 사라졌다. 그렇게 나의 행복한 유년은 끝났다. 그것의 기억은 너무도 생생해서 늘 현재형이었다.     

 

나는 나의 손때가 묻은, 검고 윤이 나는 피아노가 어디론가 실려 가는 모습을 바라본다. 높은 시 음의 건반은 누르면 다시 튀어나오지 않으므로 재빨리 다시 올려주어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채 그들은 피아노를 트럭 위로 싣는다. 한 사내가 피아노 뚜껑을 열고 뭉툭한 손가락으로 와르르 건반을 누른다. 나는 마치 내 몸에 손이 닿은 것처럼 놀란다. 


먼 훗날 울프 호프만의 ‘엘리제를 위하여’를 들을 때 밧줄에 매인 피아노를 떠올린다. 그래서 그 기억을 썼다. 


열 살 한 짝의 나이에 옥타브를 치느라 사슴 뒷발처럼 가뿐하게 건반 위를 날아다녔던 나의 여린 손가락이 기억하는 최초의 연주곡이다. 봉숭아 물들인 새끼손톱 밑에 앙증맞게 눌려있던 낮은 라음. 둔중하고도 묵직하게 연타음을 쳐야 했던 나의 새끼손가락, 그 손가락으로 감당할 수 없었던 스타카토와 테누토가 섞인 운명의 라 음. 누를 때마다 걷잡을 수없이 슬펐던 라 음, 라라라라라...      

나는 문도에게 묻는다.

네가 믿은 신은 나에게 피아노를 돌려줄 수 있을까. 네가 믿은 신은 나의 생명을 연장시키고 산에 숨어있는 나의 아버지를 돌아오게 하고 나의 어머니에게 뜨거운 물이 나오는 부엌을 주어 다시는 환희 담배를 피우며 한숨을 쉬지 않게 만들고 그리고 동생들에게 플란더스의 개를 보여주면서 따스한 수프를 먹여줄 수 있을까.    

  

  이 밤 바흐의 평균율을 듣고 있어서 다행이다. 1997년에 울프 호프만이 발표한 엘리제... 를 먼저 들었더라면 문도 생각에, 두 대의 피아노 생각에, 아버지 생각에, 어린 시절 호프만 피아노 생각에, 아니 1997년의 내 생각에 펑펑 울었을지도 모르는데.      






Wolf Hoffmann - Blues For Elise

https://youtu.be/v8QtrY3iIg0?si=1a65uLKZ-vPgxaK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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