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집사 May 17. 2023

#1. 고양이가 죽고 나도 죽었다.

사지 않고 입양하는 세상을 꿈꾸기 시작하다.



반쯤 튀어나온 안구, 아스팔트 위로 흘러내린 장기, 갓길을 따라 흐르는 피…



2020년 11월의 어느 날, 퇴근길 광역 버스 안에서 나는 노랑이의 죽음을 목도했다. 그날따라 버스 입구 맨 앞자리에 앉고 싶었던 것은 왜였을까? 거기 앉지 말걸 하는 후회가 한동안 나를 괴롭혔다. 이미 세상을 떠난 아이를 꼭 그렇게 밟고 갔어야 했나 하는 버스 기사님에 대한 원망이 지금도 가끔씩 솟아오른다. 아이의 몸을 수습하여 동물병원에 가던 그때를 생각하면, 여전히 나는 오래전 일인데도 한심하게 눈물을 떨군다. 이런 걸 눈물 버튼이라고 하는 건가?


노랑이는 이름을 부르면 대답을 하던 다정다감한 고양이였다.


도시에 살면서 로드킬은 누구나 한 번쯤은 겪게 되는 일이고 누군가에겐 ‘그깟 고양이 하나 죽은 것’ 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노랑이는 그 유명한 시처럼,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고양이가 되었다. 잊히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었다. 이름 없는 아무개가 아닌 내 이웃이자 벗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처참한 마지막 모습에 나는 정말 많이, 아팠다.


노랑이는 소위 말하는 유기묘로 추정되는 고양이었다. 이름을 부르면 대답을 하고 사람을 좋아했다. 아파트 밥자리에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노랑이를 보며 나는 오랫동안 고민했다.

구조를 해야 하지 않을까, 근데 구조를 하더라도 임보는 누구한테 부탁하지? 또 비용 마련은 어떡하고? 일단 임보를 한다 하더라도 만약에 입양이 안되면 어쩌지?


고민은 결국 부메랑처럼 죄책감이 되어 돌아왔다. 고민만 하다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후회, 구조든 보호든 뭐라도 시작했더라면 이런 고통은 존재하지 않았을 테니까. 나는 무서웠다. 앞으로 또 이런 일을 겪게 되면 어떡하지?






요즘 쟤 때문에 잠도 제대로 못 잤어요.



노랑이를 계기로 나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나처럼 구조, 보호, 입양이라는 큰 산 앞에서 용기를 내지 못하고 가슴 한 구석에 죄책감을 안고 살아간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리고 생각보다 많은 동물들이 쉼터나 보호소에서 입양을 기다리다가 끝끝내 가족을 찾지 못하고 무지개다리를 건넌다는 것도 알게 됐다.


만약 펫샵이 아닌 쉼터나 민간 보호소의 입양이 활성화된다면, 노랑이와 같은 친구들을 좀 더 많이 구조할 수 있지 않을까? 입양과 관련된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해결한다면, 우리나라도 독일처럼 사지 않고 입양하는 문화가 정착될 수 있지 않을까?


노랑이의 죽음에서 끝없는 질문이 시작되었고, 나는 조금씩 내가 보지 못했던 ‘그들이 사는 세상’을 보게 되었다. 알아버린 순간, 알지 못했던 나로 돌이킬 수 없었다. 보지 못했던 세상을 보기 시작한 순간, 과거의 나는 죽고, 새로운 나는 굳게 닫힌 문을 철컥. 열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