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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 Aug 31. 2022

딱 10 문단만 쓸게요

어쩌면 보통날 3


나는 나를 멀티형 인간이라고 쉽게 과신했다. TV 보며 밥 먹고, 영화 틀어놓고 유튜브를 보는 효율을 자랑하는 사람이니까. 그러나 공력을 들여야 하는 일은 한 번에 하나 하기도 벅찼다. 시인이 쓴 에세이 몇 권과 철학을 다룬 몇 권의 책을 읽는 동안 단 한 문장도 쓰질 못했다. 책 읽기와 글 쓰기는 각각 다른 멀티버스에 존재하는 듯했다. 일단 천천히 예열하듯 딱 10 문단만 써보자 싶었다. 이 정도로 가볍게 쓰는 건 다른 일을 하면서도 할 수 있겠지. 대뜸 제목부터 썼다. 10 문단을 쓰자 말고 10 문단만 쓰자 하니 별 거 아닌 것도 같다. 이렇게 벌써 한 문단이 끝났으니.


오늘도 욕실 수채 구멍에 머리카락이 한 움큼 얹어졌다. 이 정도면 탈모가 머지않았나 싶은데 매일 비슷한 양의 머리카락이 새로 자라는지 숱의 변화는 크지 않다. 탄생의 신비로움인지, 아직 닿지 않은 세월이 주는 유예인지. 직장인에게도 방학은 필요하고 무엇을 위해 매일 아침 이 전쟁을 치르는 것인가 자문한다.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하는데 일을 하기 위해선 돈을 써야 하고. 일단 10 문단이라도 써보자고 이 날 불현듯 생각했고 욕실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주우며 이런 별 거 아닌 일부터 써보면 되겠다 싶었다. 목적 없는 글쓰기만큼 무용한 게 어디 있으랴마는.


해외여행에 장벽이 없을 땐 휴가야 말로 한 해를 버티는 힘이었다. 일찌감치 예약해놓은 항공권이며 호텔, 심지어 레스토랑까지. 블로그 리뷰와 구글 지도로 잦은 답사를 하며, 그곳에 있는 나를 상상하는 재미로 날짜를 셌다. 여행을 통해 자아를 찾았다거나, 새로운 삶의 궤적에 대해 고민했다거나, 엄청난 글을 남겼다거나, 한 인간으로서의 철학을 완성했다거나 하는 드라마틱한 일들은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여기서의 나는 거기서도 똑같았다. 그저 매일 아침 조금 더 일찍 일어났고, 매일 조금 더 걸었고, 매일 조금 더 무언갈 봤다. 이국의 배경이라야만 드러나는 그 조금, 조금, 조금 때문에 나는 자주 비행기를 탔다.


올해 11월, 약 2주간 파리를 여행할 예정이다. 일찌감치 항공권이며 호텔, 심지어 일부 레스토랑도 예약을 마쳤다. 내 첫 유럽 도시이자 여름과 겨울을 모두 겪은 도시이자 짧은 썸이 있던 도시이자 구글 지도가 없어도 꽤 오랜 시간 버틸 수 있는 도시. 그간 새로 생긴 갤러리나 가보지 않았던 동네, 맛집으로 소개된 레스토랑들을 검색하면서 아주 오랜만에 진짜 여행을 준비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근 1년 내에 LA와 라스베이거스를 다녀왔음에도.


방탄소년단 콘서트 관람이 메인이었다고 해도 앞 뒤로 가고 싶은 레스토랑과 볼거리를 찾아 촘촘하게 짠 일정이었고, 현지에서도 쉬지 않고 걸었으며, TV에 LA나 라스베이거스의 배경이 스쳐 지나갈 때면 아련한 눈빛을 장착하게 될 정도로 각 도시를 사랑하게 되었으나, 그 도시들은 내 의지에 의해 방문을 결정한 것이 아니었다. 가고 싶은 곳이 아닌 가야 했던 곳. 타의가 침범해 일정 부분 여행을 당해버린 곳. 가고 싶은 도시를 선택해 A부터 Z까지 결정하고 설정하는 여행은 실제로 정말 몇 년만인 것이다.  


그래서 오랜만이고 또 예전처럼 설레는구나, 퍼뜩 생각하며 머리를 헹구었다. 매일 반복되는 출근 준비 루틴 중 유일하게 사유가 비집고 스며드는 시간. 어깨만큼 댕강 자른 머리카락이 푸석하게 말라간다.


책 값이 너무 비싸다. 장바구니에 다섯 권 정도만 넣었는데도 7만 원이 훌쩍. 게다가 요즘 책 성공 타율이 5할도 되지 않는다. 제목의 화려함에, 작가의 유명세에, 추천사의 유려함에 반해 구매했다가 취향에 맞지 않아 중고 서점에 가격을 후려쳐 파는 책이 절반 이상이다. 그래서 적립금을 포기하고 가끔 오프라인 서점을 찾는다. 직접 책을 펼쳐보고 몇 문장이라도 읽어보고 사려고. 전시회에서 작품을 보듯 표지를 살피고 노래 곡목을 찾듯 제목을 읽는다. 오프라인 시장이 많이 죽었다고 해도 대형 서점엔 언제나 앉을자리 없이 책을 읽고 고르는 사람으로 붐빈다. 책들만으로 가득한 서점에서 영감과 좌절은 동시에 다가오고 자극이란 이름 아래 한 몸이 된다. 메모해놓은 리스트는 온라인으로 구입하기로 하고, 당장 읽으면 좋겠다 싶은 에세이 한 권을 사서 나왔다. 인지하지 못한 새 여름이 많이 지나고 있다.


가장 많이 사용하는 SNS는 인스타그램. 오래 박제되는 피드 대신 딱 하루만 보이는 스토리는 매일 한 장 이상씩 올리고 있다. 매일 스토리를 기록해놓으면 밀린 다이어리를 쓸 때 "이틀 전 오후에 뭘 했더라?"란 질문에 답을 찾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최근의 일들은 잘 기억하지 못하고 오래된 옛날 일들은 상처까지 속속들이 기억하는 나이가 되니 스토리로 기록해놓은 사진과 글들이 큰 자산이 된다.


인스타그램 보관 기능을 활용하면 뜻밖의 과거를 건져 올릴  있다. <과거의 오늘>이란 제목으로 오늘과 같은 날짜의 과거에 업로드한 피드나 스토리 게시물을 확인할  있기 때문이다. 작년 오늘엔 애니메이션 <신비 아파트> 캐릭터 도장을  팔에 잔뜩 찍은 조카가 있었다.    먹은 지금의 조카에게 애니메이션이란 오직 <포켓몬스터> 뿐. <신비 아파트> 완전히 잊힌 상태다. 사랑은 쉽게 변한다. 순간의 진심이 순간에 영원했을 .


사실 요즘 덕질이 조금 시들해졌다. 새로 올라오는 영상도 잘 챙겨보지 않고, 모르는 떡밥들이 쌓여간다. 대신 야구를 딱 그만큼 더 열심히 보고 있다. 야구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연애를 시작했던 부모님 밑에서 야구를 업으로 삼은 동생이 있는 터라 어렸을 때부터 야구를 종종 챙겨봐 왔지만 6일 내내 세 시간이 넘는 경기를 빠뜨리지 않고 챙겨보는 건 올해가 처음이다. 직관도 두 자릿수가 넘었으니 어찌 됐든 방탄 덕질의 시들함을 야구 덕질로 메꾸는 중이랄까. 짧은 상하의를 입은 여자 치어리더와 예쁜 여성 관객들을 집요하게 쫓는 카메라 워킹이 여전히 존재하는 데다 야구를 좋아한다 하면 룰 모르는 얼빠 취급(솔직히 프로야구 선수 중에 '얼빠' 대상은 단연코 존재하지 않습니다)에, 여혐과 지역 비하와 창조적으로 상스러운 말들을 만들어내는 웹사이트의 본거지도 야구와 관련 있지만 어찌 됐든 야구란 스포츠 그 자체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계절을 넘어 길게 진행되어 높낮이가 있는 시리즈, 4할 타자 한 명으로도 2할의 아홉 타자로도 한 명의 다승 투수로도 벌떼 투수로도 굴러갈 수 있는 팀 색깔, 쓰리 볼이 주는 기회, 분위기와 흐름을 타는 경기, 기발한 응원가와 견제 구호, 영원한 강자도 영원한 패자도 없는 세계. 야구 없는 겨울과 봄이 벌써 두려워지는 이유다. 문단의 마치는 말. 저는 야구 보는 '여자' 아니고 야구 보는 '사람'입니다.


챙겨보는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이 없는지 오랜데 요즘 tvN <뿅뿅 지구 오락실> 프로그램에 완전히 꽂혔다. 1편부터 "이건 미친 조합이야" 싶었는데, 매회 그 강도가 더해지고 있다. 무엇보다도 좋은 건 화장하지 않고도, 편한 옷차림을 하고도, 입을 크게 벌리고 큰 소리로 웃고 떠들고 시끄러울 수 있는 여성들로만 구성되었다는 점이다. 미디어에서 더 많은 여성상을 보여주어야 한다. 마르고 뚱뚱하고 작고 크고 젊고 나이 든 다양한 남성들이 미디어에 나오듯 여성들도 그래야 한다. 더 우악스럽고 시끄럽고 제멋대로인 여성들이 TV에 많이 나왔으면. 마르고 뚱뚱하고 작고 크고 젊고 나이 든 다양한 여성들이 미디어에 많아졌으면.


야구 없는 날인 월요일의 재미는 jtbc <톡파원 25시>다. 직접 해외를 가지 못하는 대신 현지에 있는 유튜버나 유학생 등이 직접 찍어 온 영상을 스튜디오에서 보는 형태로, 이와 유사한 프로그램들 중 재미나 편집면에서 가장 재밌어 매주 본방 사수 중이다. 이번 주 방송은 여름 특집. 그중 마음을 쏙 빼앗긴 건 일본 가마쿠라 영상이었다. 10년도 더 전에 혼자 <슬램덩크>와 영화 <태양의 노래>의 배경지를 찾아보겠다고 바쁘게 여행했던 기억이 있는 도시여서다. 그때 찍은 사진을 싸이월드 앱에서 찾았다. 싸이월드 속 사진은 일종의 썸네일 같다. '저 에노덴에서 흐린 바다를 찍었던 사진이 있었는데'로 클릭하여 이어지는 여행의 기억들. 생각보다 더 기억은 힘이 없고, 생각보다 더 기록은 힘이 세다. 여행하며 꼬박꼬박 인스타그램에 사진과 글을 함께 기록해놓는 이유다.


딱 열 문단만 쓰자고 했더니 벌써 13 문단 째다. 그것도 문단을 더 늘리지 않기 위해 한 문단에 어떻게든 문장을 욱여넣어 겨우 줄여 만든 13 문단이다. 제약을 둬야 더 하고 싶어지는 신비하고 투쟁적인 인간의 성정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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