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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 Sep 11. 2022

태풍이 지나가고

 어쩌면 보통날 4


오전 4시


태풍 힌남노의 영향권에 돌입했나 보다. 물을 마시러 깼는데 양감이 있는 바람 소리가 심상치 않다. 짙푸른 새벽의 가로수는 이러다 곧 기역 자로 꺾일 것만 같다. 별 일 없이 지나가야 할 텐데. 창 밖의 소음에 모든 주의가 집중된다. 침대에 모로 누워 눈을 감았다. 어디서 눈만 감고 있어도 수면의 90%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던 것 같은데. 다시 잠에 들긴 어려울 것 같아 차선의 방법을 따르기로 한다. 휴대폰에 손이 가지 않도록 액정을 뒤집어 침대 끝 쪽에 밀어두었다. 


중학교 3학년 때, 국어 선생님은 자주 책 읽기를 시켰다. 교과서에 실린 문학 작품을 번호 순서대로 돌아가며 읽게 했는데, 읽다가 틀리면 다음 번호로 넘어가는 방식이었다. 아마도 16번 언저리였던 내 차례는 생각보다 금방 돌아오곤 했다. 나는 꽤 많은 문장을 틀리지 않고 읽어 나갔고, 가끔은 다음 친구를 위해 일부러 틀리기도 했다. 솔직하자면 나는 책 한 권 전체를 내 목소리로 읽어내고 싶었다. 


그즈음 교내에서 처음으로 독서 퀴즈 대회가 열렸다. 각 반 별로 대표 학생 1명씩 참가해 가장 많은 문제를 맞히면 우승하는 대회였다. 국어 선생님은 이 대회의 진행자로 나를 선택했고, 아마도 나는 제안 즉시 하겠다는 답을 했던 것 같다. 여기서부턴 기억이 확실치 않은데 잊고 싶은 것들은 때를 상관하지 않고 불쑥불쑥 끼어드는 데에 반해 잊지 않았으면 하는 것들은 그 사실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잊혔기 때문이다. 그때 남학생 1명과 함께 진행을 했었던 것 같은데 그 애는 P였던가, C였던가. 



오전 8시


전쟁이 나도 출근 걱정을 할 한국 사람이라지. 아파트 입구 조명이 떨어져 잘게 깨져 있는 바닥을 조심히 걸어 주차장을 향했다. 사무실에 도착하니 늦게 출근하라는 권고가 있었음에도 모든 부서원들이 이미 출근해 있었다. 내가 출근 등록을 한 시간은 8시 30분. 어제와 같은 시간이다.  



오후 1시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빠르게 먹고 대형 서점에 들렀다. 평일이지만 연휴를 앞두고 있는 시점이라 서점은 꽤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며칠 전 영화를 보러 나온 김에 구입한 <액체 상태의 사랑>이란 에세이가 무척 좋아서 비슷한 책을 구입하고 싶었다. 페이지를 오랫동안 넘기지 못하고 몇 번을 다시 읽게 한 문장들이 콕콕 박혀 있는 책이었고, 이런 책을 만나기란 흔치 않은 일이다. 그때 비슷한 디자인의 책들이 함께 꽂혀 있었던 걸로 보아 시리즈로 나오는 것 같았는데. 분명 저쪽 서가였었지. 망설임 없는 걸음으로 단박에 원하는 코너에 도달했다. 여러 권의 책을 펼쳐 몇 문장씩 읽어본 뒤 마음에 드는 책을 골라 계산을 마쳤다.


도서관에 가는 게 멋있는 일이라 생각하던 학창 시절. 쉬는 시간이나 식사 시간에 짬을 내 학교 도서관에 가는 걸 즐겨하던 때가 있었다. 막상 책을 빌리는 일 없이 새로 나온 책은 없나 하며 그저 도서관을 둘러보는 걸 좋아했던 때. 그때 나를 따라나선 같은 반 친구가 내가 책을 골라 들고, 페이지를 펼치고, 문장을 읽어보는 옆모습이 예뻐 보였다고, 한참 뒤에 털어놓은 적이 있었다. 내가 들은 말 중 가장 큰 울림이 있던 칭찬이었다. 


오늘 산 책은 <카사노바 호텔>, <나는 내가 싫고 좋고 이상하고>, <꼭대기의 수줍음>. 요즘 읽어 보고 싶다고 고르는 책들 중 상당수가 시인이 쓴 산문이다. 시어 그 자체의 아름다움보다 단어로서의 이해가 필요한 나는 시를 받아들이는 데에 어려움을 많이 느끼는데, 그렇기에 시인이 쓴 산문이라도 읽어내려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조금 여유가 있어 백화점 내에 위치한 스타벅스에서 커피 한 잔을 마셨다. 책을 바로 읽어보려 꺼냈지만 주변인들의 모습에 시선을 빼앗겼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단발머리 위로 까만 프라다 벙거지 모자를 쓴 마른 남자는 콘센트가 있는 자리를 찾고 있고, 골프 웨어를 입은 중년 여성은 아버지와 통화하며 카페의 위치를 설명하고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커트머리의 중년 여성이 단발머리의 마른 남자를 찾아와 함께 나갔고, 하얀색 바지에 하얀색 카라티를 입은 세련된 중년 남성은 골프 웨어를 입은 중년 여성의 아버지였다. 나도 모르는 새 각자가 기다렸을 상대를 어떤 스테레오 타입으로 대상화하고 있었나. 줄곧 의외란 단어가 스쳤다. 


한낮의 백화점, 그 안의 빈자리 없이 북적거리는 프랜차이즈 카페. 우리는 잠깐의 공간을 공유할 뿐 결코 서로를 알지 못한 채 평생을 살아갈 거다. 당신은 나를 영원히 모른다. 그런 미미함에 가끔 서글플 때가 있다. 



오후 3시


엔진오일 교체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무엇 무엇의 교체도 더 추가되었다. 곧 있을 파리 여행을 여유롭게 하기 위해 요 근래 지출을 줄이고 있었는데 갑자기 숭덩 큰돈을 썼다. 전체 교체에 한 시간 반 정도 걸린다고 해 대기실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친구 S는 내가 연애를 잘 못하는 이유로 상대가 아홉 가지 장점이 있어도 한 가지 단점이 있다면 아홉 가지 장점을 상쇄하고 한 가지 단점에 집중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연애는 아홉 가지 단점이 있어도 한 가지 장점으로도 시작될 수 있는 것이라고. 몇 해 전 지나가듯 들은 말인데 왜 지금 불쑥 생각이 났을까.



오후 7시


선배 C의 생일. 번개로 저녁 식사 자리를 잡았다. 최근 독립한 지 얼마 안 된 선배가 집에서 다양한 음식을 만들어보는 것이 생각나 여러 식료품과 와인을 세트로 묶어 파는 랜덤 박스를 선물로 구입했다. 와인 한 잔을 하는 자리라 동생 차를 얻어 타 약속 장소로 향했다. 


미리 도착해 있던 동료 Y와 함께 케이크와 선물을 전달했고 음식을 주문했다. 빨간색 벽에 레트로 포스터가 걸린, 이국의 작은 레스토랑을 떠올리게 하는 소담하고 조용한 분위기의 식당이었다. 같은 회사에서 근무하기에 공유할 수 있는 이야기들. 누군가를 묘사하기 위해 사전 정보를 먼저 전달하지 않아도 되는 사이. 큼직한 고기를 덩어리째 썰어 소분하듯 토막토막 찾아오는 시절 인연. 와인 한 병을 나눠 마시며 우리의 대화는 침대 헤드 방향을 어디에 두는 것이 좋은지로 시작해 어떤 책을 재밌다고 고르는지를 지나 가을의 피크닉을 계획하는 것으로 끝났다. 


식당 안의 마지막 손님이 되었다. 늦지 않게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하고 헤어져 집으로 돌아가는 길. 물기를 앗아간 밤의 공기가 서늘하다. 무작위로 흩날려 떨어져 있던 나뭇잎들이 거리 끄트머리에 소복하게 모여 쌓여 있다. 노동력이 빚어낸 작은 언덕. 태풍이 땅을 훑고 지나 먼바다로 향하고 나면 태풍은 소멸하는 걸까 다시 태어나는 걸까, 태풍이 지나는 동안 비둘기들은 어디에서 몸을 피했을까. 그걸 이제야 생각한다. 대부분의 생각들은 떠올랐어야 할 시점을 지나 찾아온다. 



자정


냉장고에 오랜 시간 넣어두었던 캔맥주 하나를 꺼내 마셨고, 오늘 야구 경기의 하이라이트를 챙겨봤다. 구독하고 있는 유튜브 채널에 업로드된 영상은 내일 보기로 하고 기상 알람을 체크했다. 


막 읽기 시작한 <꼭대기의 수줍음>에 다음의 문장이 있었다. '어느 날 우리의 창밖이 무척 온화한 햇살로 반짝이고 있어 아름답다 느낀다면, 우리가 보이는 것 이상을 보고 있다는 뜻이다.' 좋다. 페이지를 찍어 인스타그램에 업로드했다.


본가 베란다 새시엔 투명한 테이프가 큰 엑스 자로 붙어 있다. 태풍 볼라벤이 오기 전 창문 흔들림을 방지하겠다고 붙인 것이었다. 뜯어낼 타이밍을 놓친 큰 엑스는 마치 언제든 다음 태풍을 대비하는 듯한 모양새로 박제되었다. 


중학교 때 교내 독서 퀴즈 대회를 함께 진행했던 남학생은 P도 C도 아닌 J였던 것 같다. 얼굴도 이름도 명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지만 실루엣으로 아른거린다. 친구들은 삼삼오오 운동장을 가로질러 하교를 할 때 나는 연습을 위해 빈 교실을 향했던 걸음, 고요한 복도를 가로지르던 실내화의 마찰음, 책상 두 개를 붙여놓고 대본을 보고 있던 아마도 J, 선생님이 오실 때까지 어색하게 앉아있던 시간 같은 것들. 보이는 것 외엔 잊고 있던 것들.


태풍이 지나갔다. 금세 가을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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