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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 Jun 13. 2022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에 답하여

 어쩌면 보통날 2


목정원 작가의 <모국어는 차라리 침묵>은 이 첫 문장으로 시작한다. "좋은 작품을 보고 나면 집으로 돌아가 글을 쓰고 싶어 진다." 정확히 그랬다. 하재영 작가의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를 완독 한 뒤 나는 쓰고 싶어졌다. 그녀가 나고 자라 살아가는 집에 대하여 쓴 글에 내가 나고 자라 살아가는 집에 대해 덧붙이고 싶었다.


책을 읽다 표시해 둔 문장을 옮겨 쓰고 내 이야기를 그러모았다. 모든 종류의 삶은 개인적인 동시에 사회적이다. 그 핑계로 그녀의 글을 빚진다. 이 글은 친애하는 당신의 집에 답하는 친애하는 나의 집 이야기다.




그곳에 살지 않았다면 지금 나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 (p.7,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

 

나는 이사를   적이  번도 없다. 태어난 집에서 20년을 자랐고, 대학 시절은 이모네 집에서 하숙을,  집으로 독립을 하면서는 모든 가구를 새로 구입해 채웠다.  짐은   번도 타의에 의해 옮겨진 적이 없었고,  '공간' 항상 같은 곳에 존재해 있었다. '' 공간에 대한 애착 혹은 집착은 교과서를 무겁게 이고 지고 다닌 학창 시절로 대변된다. 교실의 사물함과 책상  서랍은 언제든 누군가에 의해 침범당할  있는 공용 공간이었으므로 마음 편히 짐을 풀어놓을 수가 없었다.  


나는 옆집과 담이 붙어 대문 열쇠를 잊으면 옆집을 통해 건너올 수 있었던 골목길 안의 주택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마당엔 왜소한 감나무 한 그루와 포도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녹이 슬어 헐거워진 이음새 덕에 언제나 살짝 열린 채였던 대문으로 오징어 가면을 쓴 함진아비가 박을 깨며 들어와 막내 고모의 결혼을 알렸고, 초등학교 입학 선물이라며 할머니가 주문한 피아노가 배송되었다. 초등학교 땐 학교 끝나고 같이 놀자는 친구의 부름이 넘어왔고 중학교 땐 축제 무대를 준비하는 노래가 대문 밖으로 흘러나갔다. 고등학교 땐 아픈 아빠가 서울에 있는 병원으로 떠난 뒤 검은 띠를 두른 사진으로 돌아왔고, 스무 살이 된 내가 서울로 대학을 가기 위해 대문을 넘었다.


20년간 같은 대문 안에서 언제나 나는 이사 가는 이웃을, 전학 가는 친구를, 떠나는 가족을 바라보는 위치에 있었다. 선택이 필요한 변곡점에서 변화 대신 안정을 택하는 기질은 어쩌면 이사 경험의 부재에서부터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아빠는 미술을 전공하고 독학으로 건축 디자인을 공부했다. 한때는 누군가의 집을 설계하는 일을 업으로 삼기도 했다. 의뢰가 있든 없든 아빠는 언제나 설계도면을 그렸다. 아빠가 가장 좋아하는 취미 생활이었다. 도면을 완성하면 엄마와 우리 자매를 앉혀놓고 이 집에 어떤 기발한 아이디어가 숨어 있는지, 구조는 얼마나 기능적이면서 독특한지 설명했다. (p.97,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


주중 아침, 대문 밑으로 밀어 들여보낸 일간지 신문을 챙기고 파우치에서 우유를 챙기는 것은 언제나 내 몫이었다. 어른들은 어린 나이에 신문을 챙겨 읽는 나를 기특하게 여겼지만 내 목적은 오직 TV 편성표였다. 네모난 편성표 옆에 오늘의 주요 프로그램 소개글을 읽고 하교 후 볼 프로그램을 선정하고 나서야 등교 준비를 했다.


가끔씩 신문 사이에 아파트 홍보 전단지가 껴 있는 날은 횡재였다. 아파트 구조를 보며 주택과 다른 공간을 상상하는 것이 재밌었다. 50평 아파트는 방이 네 개라 동생과 방을 따로 쓸 수 있을 것 같아 좋을 것 같다가도 너무 넓은 것도 같았다. 그렇게 따지면 34평 아파트가 적당할 것이었다. 현관문 옆 방을 내 방으로 하면 좋겠지? 안방과 거리가 좀 있으니 몰래 라디오 듣기 좋을 거야 하며 이리저리 방 사용 방법을 골똘했으나 항상 뚜렷한 답은 없었다.


그런 날 오후엔 종이 인형 놀이를 했다. 아파트 전단지를 펼쳐놓고 여기는 우리 집이야, 내 방은 여기고 저쪽 방은 인형 방이야 하며 드라마를 썼다. 뚜껑 없는 단면의 아파트 구조는 무대의 영역이었다. 집을 인지하는 순간부터 나는 쭉 주택에서 살았고, 다른 주거 형태가 우리 집이 된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었다. 끝내 여긴 우리 집이 아니라 인형의 집이 되었다.


지금도 꿈을 꾸면 나는 여전히 그 주택에 살고 있다. 꿈속의 나는 지금 나이인데, 장소만 여전히 그 집이다. SF나 로맨틱 코미디, 스릴러 등 장르도 가리지 않는다. 가끔씩 이목구비가 분간되지 않은 얼굴을 한 할머니나 아빠도 '있는 존재'로 등장하기도 한다. 꿈속에서 나는 그 집에서 사랑하고, 헤어지고, 쫓기고, 쫓아가고, 울고, 웃는다. 내 몸은 스무 살에 그 집을 나섰는데, 내 영혼은 아직도 그 대문을 넘지 못했다.


집을 떠나는 것, 가능한 멀리 떠나는 것. 그것이 스무 살의 내가 원하는 전부였다. 한 번이라도 국경을 넘은 적이 있었다면 오로라를 볼 수 있는 레이캬비크나 남태평양 아래로 가라앉고 있는 투발루 섬으로 가기를 꿈꾸었을까? 나는 그렇게 넓은 세상을 상상하지 못했다. 가고 싶은 곳은 서울이었다. 고작 거기가 내가 갔던 곳들 가운데 가장 멀고 넓은 세상이었다. (p.51,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


고등학교 3년을 버티게 한 목표는 오직 서울이었다. '지긋지긋한 이 동네, 이 도시를 벗어날 거야'보다 '이왕 대학 가는 거 서울로 가야지. 저 넓은 곳에서 한 번은 살아봐야지'했다. 지루한 수험 생활은 서울 소재 대학 합격 통지서를 받는 것으로 끝이 났다. 정말 서울이었다.


생업에 바쁜 엄마는 대학가 근처를 탐방하며 자취할 방을 찾아줄 시간이 없었고, 서울 살이의 로망만 있었던 나는 기숙사나 학숙 신청을 미뤘다. 그렇게 아무런 준비 없이 입학에 가까워지던 중 살 곳을 구해야 했고, 일단 서울에 살고 있는 이모네 집으로 가게 됐다.


이모네 부부와 두 사촌동생이 살고 있는 강동구의 작은 아파트의 방에서 4년 내내 대학을 다녔다. 사촌동생이 혼자 쓸 수 있었을 수도 있던 방을 꼴사납게 차지했다는 불청객의 마음을 가진 채였다. 사실 아무 연고 없는 서울에 딸을 혼자 보내는 것이 걸려 내 거주에 대해 이모네 부부와 사전에 이미 얘기를 마쳤고 그에 따른 금전적 지원을 해주었단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으나 미리 알았더라도 불편한 마음을 거둘 수는 없었을 것이다.


스무 살의 자유를 맞닥뜨린 친구들과의 저녁 자리에 참석하는 대신 말없이 내 귀가를 기다리던 이모네 가족이 있는 집으로 향했고, 하루 종일 집에 있어야 하는 주말엔 아르바이트를 했다. 방학을 맞이하면 부리나케 고향으로 내려왔고, 방학 내내 보란 듯이 집에만 틀어박혀 있다가 개강 하루 전에 서울로 올라오기를 반복했다. 학교를 다니고 아르바이트를 하고 가끔 전시회를 보러 다니는 것 외엔 아무런 재미를 붙이지 못했다. 그럴싸한 자격증 하나, 높은 어학 성적 하나, 그 흔한 인턴 이력조차 만들어 놓지 않은 채 졸업했고 그렇게 곧장 고향으로 내려왔다.


서울에서 나는 집이 없었다. 잠깐 남의 방을 빌려 썼을 뿐이다. 서울에서 나는 언제나 불청객 혹은 이방인이었다. 속해있지 않고 걸쳐 있었다. 불청객 혹은 이방인으로 바라보는 서울은 내가 평생 살아가야 할 도시로 보이지 않았다. 언제고 불편히 피해야 할 도시 같았다. 거주의 형태가 달랐다면 결과가 달라졌을까.


모든 가정은 의미 없다.


나는 한 존재를, 한 시절을 잃고 이 집에 왔다. 이곳에서의 시간은 슬픔과 상실을 안고 시작되었지만 그조차 이 공간에서 만들어갈 나의 일부라는 것을 안다. 이제는 여기가 내 삶의 새로운 배경이 될 것이다. (p.181,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
책장은 실용성 없는 물건인 책을 수납한다는 점에서 사치스러운 가구이자, 큰 무게와 부피로 인해 작은 집에는 거추장스러운 가구였다. (p.75,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


고향으로 돌아와 직장을 잡고 엄마 집에서 살던 나는 코로나 시기에 맞춰 독립했다. 리모델링을 마친 20평대의 구축 아파트가 내 명의가 되었다. 내가 온전히 누릴 수 있는 공간이 방 하나에서 집 전체로 늘었다. 안방엔 침대와 협탁을, 옷방엔 옷장과 서랍장을, 남은 방 하나엔 책장을 넣었다. 작은 방 하나에 침대와 책상과 옷장과 책꽂이를 꾸역꾸역 밀어 넣은 채 지내왔던 과거와 단절이라도 하듯 공간을 사치 부린 가구 배치를 했다.


본가에서 사용 중이던 와인 셀러를 제외한 모든 가구와 가전을 새로 구입했다. 일주일 휴가를 냈고, 그 휴가 기간에 배송을 몰아서 받았다. 소파와 식탁, 침대와 협탁 등 넉넉하지 않은 예산 내에서 고르고 고른 가구가 도착해 자리를 잡았다.


게 중 가장 신경 써서 고른 것은 책장이었다. 책을 꼭 사서 봐야 하는 사람이라 소유하고 있는 책의 권 수가 꽤 되었고, 내 집이 생긴 만큼 앞으로 더 많은 책을 구입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인스타그램에서 우연히 본 어느 파리 집의 낮은 책장과 그 위에 쌓인 책더미의 이미지가 내내 어른거려 그와 가장 비슷한 디자인의 책장을 선택했다. 프라하 프란츠 카프카 박물관에서 산 카프카 포스터와 체스키 크룸로프 에곤 쉴레 아트센터에서 산 앉아 있는 여자 포스터를 액자에 담아 책장 위에 얹었고 여행과 미술, 소설 등의 장르를 분류해 정리했다. 가장 비실용적이면서 가장 거추장스러운 가구를 가장 만족스러운 형태로 꾸렸다.


9시에 출근해 6시에 퇴근하고, 매달 월급을 받고, 대출을 갚고, 아파트 관리비를 내고 공과금을 헤아리며 산다. 무슨 일이 있든 늘 엄마가 옆 방에 있던 삶에서 내가 직접 결정해야 하는 1인분의 삶으로 옮겨왔다.


내 삶의 배경을 처음으로 직접 선택했다. 이 오래된 아파트가 나의 새로운 배경이 되어줄 것이다.


나의 기억은 집이라는 물질적 환경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중략) 집에 대해 쓰는 것은 그 집에 다시 살아보는 일이었다. 간절히 돌아가고 싶은 곳이 있었고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곳이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돌아가고 싶거나 돌아가고 싶지 않은 것은 공간이 아니라 시절일 것이다. 과거가 되었기에 이야기로서의 자격을 부여받은 시절 (p.198,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


한 집에서 20년을 살았고, 누군가의 집에 얹혀도 살았다. 두 돌 된 조카와 함께 살았고, 이제는 혼자 산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주택을 아직도 꿈에서 만나면서 특별한 날이 아닌 이상 본가에 출입하지 않는다.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 첫머리에서 묻는다. 집은 나에게 무엇인가?

내가 건너온 네 곳의 집은 시절 인연, 그때 그래야만 했던 시간과 장소와 시절의 집합이었다.


앞으로 또 어떤 집에서 살아갈까. 아직 삶은 현재 진행형이기에 단언하지 않으려 한다. 나를 형성했고, 형성하고, 형성해 갈 배경의 시절 집합이 되어주겠지.


어떤 책은 읽기에 그치지 않게 한다. '추억이란 이름으로 과거를 뭉뚱그리지 않기(친애하는 나의 집에게)' 위해, '삶의 특정한 순간을 다시 한번 살아내기(친애하는 나의 집에게)' 위해 쓰게 한다. 이 글은 친애하는 당신의 집에 답하는 친애하는 나의 집 이야기였다. 계속 덧붙여 써 갈 나의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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