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제이 Apr 14. 2024

봄날, 벚꽃, 그리고 나

어쩌면 보통날 19


봄. 해가 갈수록 짧게 느껴지는 계절. 일부러 시간을 내어 들여다보지 않으면 어느새 여름의 경계에 다다라버리고 사라지는 계절. 여행이라는 수단을 꺼내야만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계절. 그 계절의 봄. 나는 일본으로 향했다.


3월의 마지막 날. 간사이 공항에 도착해 짐을 찾고 나와 급행열차에 탑승하고 나니 어느덧 오후 여섯 시가 넘었다. 창 밖으로 어두운 하늘 밑 낮은 건물들이 빠르게 스쳐간다. 작년부터 시작한 일본어 능력 시험공부 덕에 이따금씩 정차하는 역 명의 한자가 히라가나로 제법 읽힌다. 열차 방향을 확인하고 난 뒤 이어폰을 꺼내 재생목록을 틀었다. 제일 먼저 선택한 곡은 요네즈 켄시의 감전. 이국의 노래가 내가 자리한 이곳을 더욱 선명히 느끼게 한다.


호텔에 도착해 짐만 두고 나와 제일 먼저 도착한 곳은 도톤보리였다. 난바 역에 도착하자마자 엄청난 인파를 마주하니 오사카에 도착한 것이 비로소 실감 났다. 구리코 간판을 등지고 양팔을 들어 포즈를 취하고 있는 관광객들과 음식을 먹기 위해 구불구불 줄을 선 사람들과 거리 위를 점령한 크고 번쩍이고 개성 있는 조형물들. 9년 만에 온 오사카지만 두 다리를 부지런히 움직이며 다녔던 몸의 여행은 경험 이상의 것이다. 여기는 여전하구나. 기념품 샵을 눈으로 훑고 지나친 뒤 타코야키에 생맥주 한 잔을 사 도톤보리 강이 내려다보이는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먹고 마시고 기념품 구입하는 것 외엔 특별히 할 것 없는 이곳이 오사카를 대표하는 이미지가 된 건 이 색들 때문이 아닐까. 마치 사이버펑크 세계로 들어온 듯 시공간을 어지럽히는 빨갛고 노랗고 파란 형광색들. 


그 색들이 강 표면으로 떨어진다. 물결에 이지러져 묘한 초현실주의 작품 같다. 기가 쏙 빨리는 이곳에서 유일한 안정감을 주는 것 풍경 같다는 생각을 하며 뜨거운 타코야키를 후후 불어 먹었다. 


오사카 기념 마그넷 같은 것들은 이전에 이미 충분히 샀기 때문에 화려한 기념품 샵들을 지나쳐 도톤보리 초입의 스타벅스로 갔다. 오사카 시티 머그 하나를 산 뒤 계산을 하려고 했는데 이 늦은 시간에도 음료 주문을 하려는 사람들이 많아 매장 바깥으로까지 줄 서 있다. 동선 안내를 하는 직원에게 이 컵만 구입할 건데 저 줄을 다 기다려야 하냐고 물었더니 이건 바로 계산을 해주겠다며 비어있는 포스기로 안내해 본인이 직접 결재를 해주었다. 정확하지 않은 일본어였지만 문장의 의미가 통했다. 완벽하지 않아도 되는구나. 손에 쥔 종이봉투가 가볍게 느껴진다. 간식으로 먹을 푸딩과 우유를 사서 호텔로 돌아왔다. 틀어놓은 현지 TV 프로그램의 내용을 대충 이해하며 캐리어 정리를 마쳤다.


호텔 조식이 포함된 예약이었지만 작은 카페에서 파는 소담한 아침 정식을 먹고 싶어 이르게 나섰다. 식당이 있는 곳은 사쿠라가와 역. 그러나 목적지를 사쿠라가와 역이 아닌 난바 역으로 설정했다. 도톤보리에서 걸어서 30분 정도면 도착할 수 있는 곳이라 아침 일찍 사진도 좀 찍고 산책도 할 요량이었다. 일요일 밤의 열기가 사라진 월요일 아침 8시의 도톤보리. 이른 여행을 시작한 여행객들 일부와 조깅하는 사람들 일부. 난간에 핸드폰을 올려두고 사진 몇 장을 찍었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 이런 날씨에 입고 싶어 부러 챙겨 온 흰 셔츠가 살갗에 닿는 촉감이 좋다. 상상했던 장면이 현실이 될 때. 양 귀에 이어폰을 꽂았다. 구글 지도로 방향을 체크한 뒤 걸음을 옮겼다.


테이블이 네 개, 1인 좌석이 세 개 있는 작은 식당인 <SAN>은 아침, 점심, 저녁 메뉴를 달리하여 팔고 있는 곳이다. 오사카 지역 맛집을 소개하는 현지 계정에서 보고 꼭 가야지 하고 저장해 놓은 곳이었다. 오픈 시간인 9시에 딱 맞춰 도착하니 당연하게도 첫 손님이었다. 창가에 면한 1인석에 신발을 벗고 좌식으로 앉았다. 도미와 올리브를 활용한 밥(메뉴에 적힌 かやくご飯은 '고기, 생선, 채소 등을 섞어 지은 간사이 지방의 밥'이라는 뜻이었다)과 계절 수프, 호지차가 포함된 세트에 샐러드를 추가해 주문했다. 구운 도미가 올라간 밥과 바지락이 들어간 국이 작은 나무쟁반에 담겨 나왔다. 생각보다 더 맛있어 마지막 밥 한 톨까지 긁어먹었다. 


소화도 시킬 겸 꽃놀이도 할 겸 우쓰보 공원을 향하던 중, 공사하고 있는 횡단보도를 피해 주유소를 거슬러 걸어가려고 했더니 공사 관계자가 본인들이 만들어놓은 임시 길로 걸어달라 정중히 말을 해 왔다. 이 조금의 융통성이 발휘되지 않는 곳. 역시 가깝지만 아주 먼 나라답다.


날씨가 맑다 못해 덥다. 그늘이 없는 우쓰보 공원에서 쉬는 건 불가능할 것 같아 공원 분위기만 슬쩍 느끼고 방향을 돌렸다. 홀홀한 여행이라 가능한 경로 수정.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는 것이 애매할 땐 역시 걷는 것이 최고다. 한참을 걸어 도착한 곳은 우메다 공중정원. 오사카만 벌써 네 번째지만 전망대로 유명한 공중정원을 지금껏 단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는 데다 점심 식사를 근처의 식당에서 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좋아하는 노래인 <공중정원>을 이왕이면 이 공중정원에서 듣고 싶었다.


뻥 뚫려 있는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니 끊임없이 오고 가는 열차와 낮은 집들과 자동차들이 꼭 장난감 블록처럼 보인다. 노을 질 때 올라오면 정말 예쁘겠지만 낮의 풍경도 충분하다. 원곡인 보아의 <공중정원>과 리메이크인 백현의 <공중정원>을 반복하며 들었다. '약한 듯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내일은 그렇게 또 변할 수 있는 건가 봐.' 새삼 이 가사 참 좋다 생각하며.


나고야 여행 이후 일본을 찾을 때마다 꼭 먹는 메뉴가 된 히츠마부시. 우메다 히츠마부시 빈초에서 기분 좋은 점심 식사를 마치고 포켓몬 센터와 닌텐도 스토어에 들러 생일이 막 지난 조카를 위한 선물을 골랐다. 벌써 2만 보 가까이 걸어 다리도 쉴 겸 지나가다 보인 예쁜 카페를 찾았다. 주문을 하자 직원 분이 아주 느린 일본어로 "여기에서 드시는 겁니까?", "영수증은 필요하세요?", "자리에 계시면 가져다 드릴게요"라 했다. 일본인은 아닌 것 같은데 일본어가 조금 가능하니 발휘한 나름의 배려인 듯했다. 커피를 가져다주면서는 로고가 보이는 쪽으로 직접 돌려주기까지 했다. 이런 작은 친절로 이 여행이 급속도로 좋아져 버렸다는 걸, 그 직원은 과연 알까.


당초 올해 간사이 지역의 벚꽃은 3월 중순에서 3월 말이면 만개가 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러나 누가 감히 자연의 시기를 확언할 수 있나. 예상과는 다르게 이곳의 벚꽃은 3월 말까지 피어나지 않았다. 4월 초는 벚꽃을 보기엔 약간 늦은 시기일 거라 생각했는데 도리어 벚꽃 구경에 딱 맞는 시기가 되어버렸다. 이쯤이면 내 여행 기간에 맞춰 개화를 늦춘 거라 과몰입해도 충분하다.


평일 오후의 텐노지 공원은 동물원이 위치하고 있는 만큼 가족 단위로 방문한 현지인들로 북적한, 근처 주민들의 쉼터가 되어주는 너른 공원이었다. 마치 뉴욕 센트럴 파크를 축소해 놓은 것 같다. 돗자리를 깔고 간식을 먹는 사람들을 지나쳐 OSAKA 네임 사인의 사진을 찍었다. 공원이 산책이란 단어와 어울리는 딱 적당한 정도의 크기다. 하루 내 뜨겁던 태양의 높이가 눈에 띄게 낮아졌다.


츠텐카쿠가 있는 신세카이 일대는 그 이름처럼 그 시절의 사람들에게 신세계였을 풍경을 선보이는 곳이다. 커다랗고 화려한 간판들이 가득해 작은 도톤보리라 해도 손색이 없다. 신세카이는 특히 쿠시카츠(꼬치 튀김)를 파는 식당들로 특화되어 있다. 모든 가게가 쿠시카츠를 팔고 있어 어디를 갈까 하다가 관광객들에게 유명한 식당과 현지인들로 가득해 문턱이 높은 식당을 지나쳐 제일 깨끗하고 깔끔해 보이는 식당을 선택했다. 생맥주 한 잔을 먼저 시킨 뒤 한국어로 잘 설명된 메뉴를 보며 먹고 싶은 튀김을 종류별로 골랐다. 한 번에 많은 양이 아닌, 먹고 싶은 것들을 하나씩 시킬 수 있는 건 홀로 여행객에게 아주 좋은 주문 방식이다. 가리비, 버섯, 돼지고기, 전갱이 등 막 튀겨 나온 튀김을 맥주에 곁들여 맛있게 먹었다. 


계산을 마치고 나오니 상점들의 간판에 불빛이 들어왔고, 츠텐카쿠가 보라색으로 바뀌었다. 짙은 파란색으로 변한 하늘. 까맣게 어두워지기 직전 보여주는 도시의 빛. 그 거리 가운데에 멈춰 몇 번이고 사진을 찍었다. 여행지로 늘 휴양지가 아닌 도시를 선택하는 모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연과 인간이 합일되어 만들어내는 풍경. 본래 가지고 있는 색에서 채도를 살짝 뺀, 가장 사랑하는 이 시간의 도시의 색. 좋아하는 노래를 몇 곡이나 꺼내 들으며 이 찰나의 소중함을 눈에 담았다. 이런 순간. 눈앞의 풍경 이 자체보다 이 풍경을 아름답게 여기는 마음 때문에 여행을 떠나온다.


이번 여행지로 오사카를 택한 건 봄이라는 이유 외에 유니버설 스튜디오 재팬이 있다는 것이었다. 오픈 시간에 맞춰 도착할 수 있게 바쁘게 출발했다. 오사카 역은 워낙 큰 역이지만 유니버설 스튜디오 행 글씨가 곳곳에 크게 적혀 있어 어렵지 않게 플랫폼을 찾을 수 있었다. 누가 봐도 놀이공원에 가는 복장의 사람들이 여럿 있어 제대로 찾아왔구나 싶었다. 유니버설 시티 역에 도착하니 입장 줄이 빼곡하다. 일단 아무 데나 줄을 서라는 안내에 따라 가까운 곳에 섰다. 뒤죽박죽 섞인 줄이 어떻게 조금씩 줄더니 가방 검사 줄에 맞춰 점점 정리가 되었다. 티켓 확인을 마치고 입장하니 숨통이 트이듯 수많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목적을 위해 일사 분란하게 흩어졌다.


유니버설 스튜디오 재팬에서 현재 가장 인기 있는 스폿은 단연코 닌텐도 월드. 그런 만큼 입장에 제한을 두고 있다. 입장을 확약하는 익스프레스 티켓을 미리 사거나, 현장에 도착해 정리권이나 추첨권을 통해 입장 허가를 받아야 하는데 이곳을 여러 번 올 수 없는 여행객에겐 입장의 불확실함보단 익스프레스 티켓의 확실함을 선택하는 수밖에. 입구에서부터 바쁘게 걸어 익스프레스 티켓에 명시된 입장 시간 9시에 맞춰 닌텐도 월드에 들어갈 수 있었다. 여기저기 노란 물음표 블록에서 띠링- 동전을 얻는 소리가 흘러나오고, 화염꽃이 움직이는 게 꼭 2D 세상에 들어온 것만 같다. 얼굴 근육이 저절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놀이공원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대부분의 놀이기구는 무서워 탈 수 없었고, 그나마 탈만한 놀이기구는 어린아이들과 경쟁하듯 긴 줄을 견뎌야 했기 때문이다. 학창 시절 놀이공원으로 소풍을 가면 놀이기구를 같이 타는 대신 친구들의 사진을 찍어주는 전담사를 자청했다. 어트랙션을 즐기지 않으니 일단 놀이공원을 찾은 횟수도 무척 적다. 그러나 홍콩에서 처음으로 디즈니랜드를 가 본 뒤 어트랙션을 타는 것만이 다가 아닌 놀이공원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캐릭터와 이야기가 주는 즐거움이 얼마나 대단한지, 잘 만들어진 공간의 힘이 얼마나 큰지, 이 세계관에 들어와 있다는 기분만으로도 충분할 수 있다는 것을. 


해리포터 월드도, 미니언 메이헴도, 명탐정 코난과 씽 온 투어도, 죠스도 즐기고 퍼레이드도 봤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은 이럴 때 할 수 있다. 나는 나로서 존재할 수 있는 곳. 역시 전 세계 모든 디즈니랜드와 유니버설 스튜디오를 다 방문해 볼 거야.


적당한 시간에 빠져나와 저녁은 우메다 우오신 초밥에서 먹었다. 그리고 호텔까지 걸었다.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이는 우메다 역인데 한 블록 정도만 걸어도 분위기가 이렇게 달라진다. 주변 직장인들만 아는 맛집 같은 작은 식당들이 있는 작은 골목들을 연이어 지나쳤다. 내일 비가 올 거라더니 공기에 물기 묻은 냄새가 난다. 이런 날씨는 태풍이 올 때처럼 두근거린다던 어느 만화 속 주인공의 대사를 곱씹으며 오사카 시청과 중앙공회당을 사진으로 담았다. 


독립을 통해 알았다. 갓 지은 흰쌀밥과 따뜻한 국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보통의 호텔 조식은 아메리칸 혹은 유러피안 스타일에 맞춰져 있지만 일본 호텔 조식엔 밥과 국, 다양한 반찬들이 꼭 준비되어 있다. 빵과 샐러드를 건너뛰고 밥과 된장국, 반찬을 담아 아침 식사를 했다. 각각의 다채로운 맛이 이른 시간이라는 걸 잊게끔 식욕을 돋우었다. 밥그릇이 우리나라보다 작다는 핑계로 한 공기 더. 창 밖엔 꽤 거센 빗줄기가 내리고 있었지만 이럴 때 가기 가장 좋은 곳이 호텔 근처에 있었다. 우산을 챙겨 호텔을 나섰다.


모네 특별 전시를 진행하고 있는 <나카노시마 미술관>은 이른 시간부터 관람객들이 꽤 많았다. 티켓을 미리 구입했기에 입장 줄에 바로 섰다. 에스컬레이터를 갈아타고 올라가니 이 세련된 미술관의 전경이 내려다보였다. 입구인 5층에 내려 전시장에 입장했다. 수련, 건초더미, 런던 국회의사당 연작 같은 익숙한 작품들도 있었지만 네덜란드 잔담이나 베퇴이유 체류 시절의 그림 등은 처음 보는 작품들이라 눈 바쁘게 관람했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지금을 영원으로 남기는 작가답게 작품에 담은 풍경의 시간과 색과 온도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마치 그때의 바람을 그때의 세기로 맞고 있는 것 같은 것 같은 기분까지. 모네 특별전은 웬만해선 다 챙겨보려 하는 편인데, 장수한 데다 다작을 한 작가답게 처음 보는 작품을 자주 마주한다. 꾸준히 하는 자만이 남길 수 있는 유산. 작품 설명 캡션을 읽는 내 앞을 지나갈 때 허리를 숙여 지나간 아주머니와 작품을 감상하고 있는 내 그림자를 밟지 않으려 크게 돌아가던 할아버지가 있었다. 작품에 더불어 인상 깊었던 관람법. 엽서와 마그넷 하나를 사서 나오니 빗줄기는 어느덧 많이 약해져 있었다. 


전철을 갈아타 고시엔 구장을 지나쳐 고베 산노미야 역에서 내렸다. 도쿄 여행할 때 많이 가는 소고기 덮밥 식당인 <레드락>의 본점에서 점심을 먹고 고베 개항 때 지어진 이국적인 주택들이 늘어선 기타노이진칸을 걸었다. 이 동네는 걸어 다닐 때 본모습이 드러나는 곳인데 빗줄기가 오락가락해 걷기가 쉽지 않았다. 그나마 여길 처음 온 게 아니란 게 다행인 걸까. 기타노이진칸 필수코스 중 하나인 스타벅스에서 고베 시티 머그를 구입해 나왔다. 투어 깃발을 든 가이드를 따라 한국 관광객들이 언덕을 올라왔고, 가이드는 현재는 스타벅스인 이 건물의 역사에 대해 설명했다. 


기타노이진칸 근처에는 일본 최초로 로스팅 커피를 소개한 것으로 알려진 <니시무라 커피>가 두 곳 있다. 그래도 역시 이왕이면 본점으로. 2층으로 안내받아 창가 자리에 자리를 잡고 기본 커피를 주문했다. 스트라스부르에서 본 유럽풍 건물을 밖에서 볼 때까지만 해도 몰랐는데 안으로 들어서고서 알았다. 여길 10년 전에도 왔다는 걸. 지도를 보며 걷느라 건물을 올려다보지 않았던 걸까. 복장을 갖춰 입은 종업원이 서빙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산미가 있는 블렌디드 커피의 맛이 진하다. 10년이라니. 그간 커피 맛이 더욱 익숙해진 사람이 된 것 말곤 달라진 게 하나도 없는 것 같은데 언제 이렇게 시간이 흐른 걸까.


비 오는 창 밖을 보며 생각했다. 10년 전엔 어떻게 여행을 했었나 하고. 지금처럼 구글 지도에 전적으로 의존하며 여행하게 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는데. 여행 전 반드시 가이드 북을 먼저 샀던 때니 그 지도를 들고 다녔나? 구글 지도에 주소만 검색해서 다녔나? 정말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저 산노미야와 기타노이진칸의 거리와 이 카페의 분위기와 이 커피잔의 모양만 생생하게 기억날 뿐. 과정은 금세 잊히는 것인 걸까. 결국 여행의 결과만이 남게 되는 걸까. 


캐릭터 하나가 이런 세계를 이뤄낸다. 하버랜드 역에 내리니 곳곳이 호빵맨이다. 덕분에 알맞게 가고 있는 건가 지도를 체크하지 않아도 호빵맨, 세균맨 등의 캐릭터가 몇 발자국 지날 때마다 바닥에 새겨 있어 어렵지 않게 방향을 잡았다. 역사 바깥으로 나와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도착한 호빵맨 박물관은 어린이들이 체험할 수 있는 공간 외에도 다양한 샵들이 들어선 종합 선물 세트 같은 곳이었다. 빵집도, 식당도, 옷집도, 미용실도, 기념품샵도 모두 호빵맨. 


고베 포트 타워와 해양 박물관이 있는 메리켄 파크를 건너다볼 수 있는 카페에 앉아 기념품으로 잔뜩 채운 가방을 내려다 놓고 커피를 마셨고, BE KOBE 네임 사인을 사진으로 담았다. 모토마치 역으로 걸어와 미리 봐 둔 식당에서 새우튀김 정식으로 저녁까지 먹고 오사카행 전철을 탔다. 급행이 아닌 일반 열차를 골라 탔더니 퇴근 시간임에도 차내는 한산했다. 빠르게 어두워진 열차 밖 풍경이 바쁘게 지나간다. 여행이라는 수단을 택할 때만 가능한 여유와 부지런함이 있다. 


다섯째 날 아침. 오전에 모네 전시를 보고 점심을 먹은 뒤 교토로 출발하려고 했으나, 모네 전시를 어제 본 만큼 점심까지 굳이 오사카에 있을 필요가 없어 일찌감치 짐을 쌌다. 교토로 가기 위해선 오사카 역으로 향해야 했는데 중간중간 에스컬레이터 연결이 끊어져 있는 지하철을 갈아타며 이동하긴 어려울 것 같아 택시를 불렀다. 지하철 한 정거장 정도라 가능한 사치. 친절한 기사님의 도움으로 오사카 역까지 편안하게 도착했다. 


오사카 역에서 교토 역은 급행 전철로 세 정거장이면 도착한다. 이 지리적 가까움을 생각하면 두 도시의 생김새가 완전히 다른 게 신기할 정도다. 비교적 직설적인 스타일의 오사카와 교토 화법이라는 말이 따로 있을 정도로 본모습을 감추는 교토. 30분 정도가 지나고 어느덧 교토 역에 도착했다.


이번 여행은 교토에서 마무리할 예정이라 교토 역에서 간사이 공항으로 가는 하루카 열차 티켓을 미리 예약해 놓았다. 인터넷으로 티켓을 예매하면 메일로 큐알 코드를 받는데 이 큐알 코드로 바로 탑승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역에서 실물 티켓으로 교환을 해야 한다. 굳이 이 과정을 한 번 더 거쳐야 하는가 싶지만 이 또한 일본이다 싶으니. 언제나 관광객으로 북적이는 교토 역이라 출발 당일 티켓을 출력하려면 시간이 지체될 수 있어 교토에 도착하자마자 이것부터 해놓아야겠다 싶었다.


역시나 티켓 발권기 앞에 긴 줄이 있다. 예매한 내역 페이지를 켜놓고 가장 뒷자리에 섰다. 인터넷으로 미리 구입한 사람들의 줄이 당일 발권 하는 줄보다 훨씬 길었다. 오사카에서 교토로 오는데 30분이 걸렸는데, 티켓 발권하는 데까지가 30분이 걸리는구나. 곧 내 차례라 타야 할 날짜와 시간을 다시 한번 체크하는데 갑자기 어떤 한국 아저씨가 "비행기 시간이 촉박한데 저 뒤에 줄을 서 있다"라고 말을 걸어왔다. 혹시 한국 사람이냐, 미안하지만 이러이러한 상황이다-로 시작되는 인사말은 가뿐히 건너뛴 채. 새치기를 용인해주고 싶지 않아 줄을 세우는 직원에게 사정을 대신 전달하니 별도의 창구로 안내되는 걸 지켜보았다. 이틀 뒤 오전에 출발하는 열차의 창가 자리로 좌석을 지정한 실물 티켓을 발급받았다. 적어도 당일 아침 초조해하며 누군가에게 "열차 시간이 촉박해서 그러는데" 할 일은 없어졌다.


아직 체크인하기엔 시간이 일러 호텔에 짐만 맡긴 뒤 나왔다. 제일 먼저 향한 곳은 에이스 호텔의 <스텀프타운커피>. 뉴욕과 런던의 에이스 호텔처럼 각자 노트북으로 바쁘게 무언가를 하는 사람들이 가득한 호텔 로비에서 커피를 마시는 호사를 누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따뜻한 커피를 주문해 카페 안이 아닌 에이스 호텔 로비로 걸어 나와 자리를 잡았다. 바깥으론 나무 창살의 고택이 보이는 게 분명 교토인데 호텔 내부로 고개를 돌리면 국적을 잃은 공간 같다. 오사카에서 교토로 오며 느꼈던 감상 같은 것들을 메모장에 적고, 교토 여행 일정 등을 정리하며 잠시 여유를 부렸다.


엄마와 동생도 데리고 갔던 적이 있던 <카츠쿠라>에서 씹는 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부드러운 돈가스를 먹고 일본의 대표 작가 중 하나인 무라카미 타카시 특별전이 진행되고 있는 <교세라 미술관>으로 이동했다. 티켓을 구입해 입장하니 벽을 크게 채우는 대작들이 가득하다. 무라카미 타카시는 무지개색 해바라기의 웃는 얼굴 심벌 정도만 알고 있어 이렇게 작품을 접하는 건 처음인데 막판엔 작품도 대충대충 보며 지나쳤다. 일본 만화를 보다 보면 갑자기 무서워져 책장을 덮어버리는 기분, 꿈에 나올까 무서운 잔상이 남는 느낌을 똑같이 느꼈기 때문이다. 미술관을 빠져나오니 정원엔 루이뷔통 트렁크 위에 손을 잡고 있는 아빠와 아이 조각이 있었고, 온통 금빛이라 마치 금각사의 현대 버전 같았다.


거리엔 벚꽃뿐 아니라 이름 모를 꽃들도 만개한 4월의 교토. 그냥 걷기만 해도 좋았다. 마루야마 공원은 노점들이 길게 늘어서 이 시즌에만 가능할 풍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벚꽃 맛이란 이름이 붙은 소프트 아이스크림 하나를 입에 물고 땅으로 무겁게 내려앉은 벚꽃나무마다 포즈를 취하고 있는 관광객들 곁을 지나쳤다. 


일본은 여러 철도 회사가 각자의 노선을 운영하고 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환승이 되지 않는다. 게다가 같은 역명이어도 노선 별로 출입구도 전부 다르다. 그래서 역 이름만 믿고 대충 출구를 찾아 나오면 방향을 잃기 쉽다. 교토 역까진 잘 도착했으나 아무 생각 없이 엉뚱한 출구로 나오는 바람에 한참을 돌아서 걷던 중 사람이 많은 카페를 발견했다. 조금 더 걸어야 하니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사서 나왔는데 나중에 찾아보니 호텔에서도 추천 카페로 안내해 줄 정도로 교토 내에서 꽤 인지도가 높은 유명한 카페였다. 헤매는 와중에 이런 발견이 함께 하면 발견을 하기 위한 반드시 있어야 할 헤맴이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호텔 체크인을 마치고 짐을 가볍게 정리해 둔 뒤 조개 육수를 베이스로 한 라멘을 파는 작은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일본의 주요 명소들은 벚꽃과 단풍 시즌엔 특별 야간 개장을 진행한다. 호텔에서 도보로 갈 만하면서 그동안 한 번도 안 가 본 곳 중에 라이트업을 보는 게 좋을 것 같았고, 그렇게 찾은 곳이 도지(東寺)였다. 철도길을 지나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주민들 틈에 껴 음악을 들으며 걷다 보니 금세 도착했다. 입장권을 사서 들어오니 하얀 조명이 벚꽃 나무와 오층탑, 목조 건물들을 비추고 있는 밤 풍경이 펼쳐졌다. 이 시기의 여행객에게만 보여주는 그림. 비슷비슷한 사진을 찍고 있지만 걸음을 자꾸 멈추게 하는 봄밤의 얼굴. 벤치에 앉아 벚꽃을 올려다보며 질릴 때까지 앉아 있었다. 


사진만 봤는데도 확신이 드는 곳이 있다. 여긴 반드시 가야 한다고. 정갈한 가정식을 파는 <TAN>의 소개글과 음식 사진을 보자마자 이곳이다, 싶었고 교토 여행 날짜를 정하자마자 일찌감치 아침 식사 예약을 해놓았다. 식당 근처 버스 정류장에 내리니 작은 내린천에 푸른 버드나무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건너편의 상아색 주택을 배경으로 몇 번이고 사진을 찍었는데 알고 보니 그 상아색 주택이 식당 <TAN>이었다. 식사는 나를 포함해 총 다섯 명의 분이 미리 세팅되어 있었다. 안내된 자리에 앉으니 통창 가득한 버드나무의 나뭇잎이 더욱 잘 보인다. 지역에서 나는 농산물을 활용해 그 농산물이 가진 본연의 맛에 집중한 식사가 준비되었다. 음식을 만든 사람의 따뜻한 마음이 느껴지는 기분. 밥은 몇 번이고 리필해 먹을 수 있었는데 두 그릇으로 아주 포만감을 느꼈다. 식사를 끝내니 2층으로 올라가 커피나 차를 마시며 충분히 쉬다 가라고 한다. 짐을 챙겨 2층에 올라가니 창가엔 테이블 좌석이, 중앙엔 큰 소파가 놓여 있었다. 네스프레소 한 잔을 내려 창가 자리에 앉았다. 식사뿐 아니라 쉼까지 제공하는 식당이구나, 여기는. 창 밖으로 빨간색 택시가 정차해 있다. 초록색의 버드나무와 빨간색의 택시와 목조 주택이 부드럽게 어울린다.  


주택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지나가는 노면 열차인 란덴 열차를 타고 료안지 역에서 내렸다. 돌과 모래로 꾸민 일본식 정원을 볼 수 있는 곳답게 서양 관광객들이 대부분이었다. 매일 이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 수행하듯 가꾸는 걸까. 자연을 활용해 가장 부자연스러운 정원을 만들어내는 일. 빨간 도리이와 벚꽃, 정원을 가꾸고 있는 직원들의 손놀림, 다다미가 깔린 방 등이 서양 관광객들에게 동양, 특히 일본에 대한 판타지를 전달하는 곳 같다는 생각을 했다. 


다시 시내로 나와 미슐랭 빕그루망에 이름 올린 <소노바>에서 청어가 올라간 냉소바와 고등어 초밥을 먹었다. 고등어 초밥을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어 개인적인 도전이나 다름없었는데, 씹을수록 고등어의 고소함이 잘 느껴져 생각보다 무척 맛있었다. 매끼 메뉴가 중복되지 않게 신중하고 고심해서 고른다. 식당으로 걷던 중 괜찮아 보이는 카페가 있어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샀더니 작은 카스텔라 빵 두 개를 덤으로 받았다. 간식을 먹으며 거리를 걷기. 무심히 자유로웠다. 


매번 '그래도 여긴 왔다 가야지' 하게 되는 곳이 있다면 역시 청수사다. 청수사로 올라가는 초입부터 인파가 심상치 않더니 모든 길이 북적여 한 걸음 내딛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사람들과 부딪히지 않게 종종걸음을 했다. 본당을 포함해 교토 타워와 교토 시내가 아기자기하게 내려다보이는 이 높이가 청수사의 가장 큰 매력일 것이다. 산책하듯 한 바퀴를 돈 뒤 오토와 폭포의 세 가지 물줄기에서 물을 받아 입을 축이고 니넨자카와 산넨자카를 넘어지지 않게 조심히 걸어 내려왔다.


어느덧 내일이면 돌아가는 날. 마지막으로 기념 선물을 사기 위해 가와라마치로 나왔다. 간단히 맥주 한 잔을 하기 위해 감자튀김을 전문으로 하는 가게를 찾았다. 주문을 하고 자리에 앉았는데 막 계산을 마친 어떤 커플이 진열된 맥주병들을 가리키며 "저 맥주들 전부 벨기에 거야. 우리 벨기에 사람이거든"이라고 말을 하는 걸 들었다. 벨기에 사람은 교토에 와서도 감자튀김을 먹는구나. 속으로 조금 웃었다. 


편의점에 들러 캔맥주 하나를 사서 가모 강가에 자리 잡았다. 교토 여행을 마무리할 때마다 거행하는 나만의 작은 의식이다. 특별히 좋아하는 노래들만 모은 재생목록을 플레이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어둠이 내렸다. 이래서 찰나 같은 게 찬란한 거라 하는 거구나. 호텔까지 거리를 확인하니 도보 40분. 이 정도면 걸어가면 되겠다. 오늘은 다시 돌아오지 않고, 이제 더 걷고 싶어도 교토에 머물 시간이 충분치 않으니까. 툴툴 털고 일어났다. 일주일 간의 여행 피로가 누적되어서인지 수제 맥주 한 잔, 캔맥주 한 잔을 마셨을 뿐인데 기분 좋은 취기가 오른다. 뉴진스의 <Hype boy>를 흥얼거리며 교토의 밤거리를 걸었다. 오늘 하루 3만 보에 가까운 걸음 수가 기록되었다. 맞다. 이건 체력이 아니라 여행력이다.


아침 일찍 체크아웃을 마쳤다. 교토역발 하루카 탑승 시간은 8시 45분인데 체크아웃을 한 시간은 7시 10분. 교토 역 근처에 오전 6시부터 오픈하는 라멘집이 있어 아침 식사를 할 요량으로 빨리 나섰다. 너무 일찍이라 혼자 머쓱하게 먹는 건 아닐까 싶었는데 이게 웬걸. 족히 20명은 넘어 보이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대기는 천천히 줄어 매장에 들어와 라멘이 서빙된 시간은 8시 10분. 가장 메인에 적힌 특제 라멘을 주문했더니 양도 무척 많은 데다 열차 탑승 시간이 촉박해 거의 대부분 남기다시피 했다. 간장 베이스 국물이 아주 맛있었는데 혹시나 입맛에 맞지 않았나 싶어 하진 않을까 하는 걱정을 안은 채 식당을 나섰다.


티켓에 명시된 하루카 좌석을 찾아 앉고 나니 출발 10분 전이었다. 간사이 공항행 하루카를 탑승하는 위치를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역 외 아침 식사라는 사치를 부릴 수 있었다. 결국 경험의 승리다. 몸에 새긴 여행의 흔적은 몸을 배신하지 않는다. 


공항에 도착해 일본 방문 필수품인 도쿄 바나나를 비롯한 선물용 과자와 로손 편의점에서 간단한 주전부리들을 구입했다. 간사이 공항에서 인천 공항까지는 2시간도 되지 않는 짧은 비행이라 비즈니스 좌석의 여유를 채 누리기도 전에 인천 공항에 도착했다. 


모든 여행엔 비용과 시간이 들어간 만큼 반드시 무엇이 남아야만 한다고, 무언가를 꼭 남겨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나한테는 그런 강박이 있고, 그 강박이 이 글을 쓰게 했지만 이것으로 충분하다. 여행이 여행으로서 마무리되는 것. 두 다리로 착실히 걸으며 짧은 봄을 부지런히 느꼈으면 되는 것. 


주차 대행을 맡겨놓았던 차를 찾았다. 집까지 손이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어 마지막까지 욕심을 내 간식을 구입했다. 조수석과 뒷좌석에 짐을 부린 뒤 운전석에 앉았다. 내비게이션에 집 주소를 검색하니 소요 시간이 4시간이다. 그럼 먼저 안전 운전을 해 집으로 가 볼까. 


봄날, 벚꽃 그리고 내가 있었던 일주일이 이렇게 지났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