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보통날 18
1. 누구세요?
갑자기 전 사원들의 사원증을 만들 예정이라며, 특정일까지 증명사진을 제출하라는 사무연락을 받았다. 사원증을 태그 해야만 입실 가능한 신식 사옥도 아니고, 그래서 반드시 사원증을 패용해야 할 필요가 없고, 그렇게 어느 사번부터는 사원증 발급도 중단된 상태였는데 구내식당 이용 방식을 바꾸면서 사원증을 일괄 발급해 사용하게 할 예정이라는 것이다. 입사 시 제출했던 사진은 10년도 훌쩍 지난 옛 얼굴이고, 가장 최근에 찍은 사진은 5년 전쯤 찍은 마음에 들지 않는 여권 사진이니 이참에 새로 찍어야겠다 싶었다.
이왕이면 보정 잘해주는 유명한 스튜디오를 찾아보자 싶어 검색하는데 어라? 네 컷 사진으로 증명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내 표정을 확인하면서 찍을 수 있는 증명사진이라니. 남이 찍어 주는 사진에서 제일 어색해지고 마는 뚝딱 인간에게 이게 웬 기쁜 소식인가. 사진관에서 찍은 것보다 떨어지는 화질은 원본 사진을 다운로드하여 보정을 하면 된단다. 가게 이름을 검색해 보니 집에서 10분 거리에 지점이 있다. 여기다. 내비게이션에 주소를 입력했다.
주말 이른 시간에 도착했더니 가게엔 나 혼자 뿐이었다. 아무렴. 이런 이른 시간에 네 컷 사진을 찍으러 홀로 오는 사람은 없겠지. 제일 안 쪽 기계에 들어와 결제를 마친 뒤 증명사진 촬영을 선택했다. 모니터에 '여기에 맞춰 서세요' 하는 상반신 실루엣이 나타났고 줄어드는 초 수를 의식하며 머리를 만지고 실루엣에 어깨 선을 맞췄다. 번쩍. 조명과 함께 여러 컷 찍었다. 찍은 사진들 중 최종 사진 한 장을 선택하려 모니터를 보는데 찍힌 모든 얼굴이 마음에 안 든다. 아니 얼굴이 마음에 안 드는 게 아니라 이건.
'이게 나라고? 내가 이렇게 생겼나?'
매일 거울로 보는 얼굴이지만 한 장의 멈춤 사진으로 보는 내 얼굴은 모르는 사람을 보는 듯 마냥 낯설다. 내가 가진 수많은 얼굴들의 단면. 타인들이 보고 있을 얼굴. 내가 가장 모르는 게 나고, 영원히 가장 모르는 게 나겠지. 어떻게 웃는지, 어떻게 우는지, 어떻게 진중해지는지, 어떻게 화를 내는지, 어떻게 즐거워하는지 그 얼굴을 정면으로 영원히 보지 못할.
출력된 사진에 있는 큐알 코드를 찍어 원본 사진과 함께 촬영할 때의 모습이 담긴 영상을 저장했다. 잠시 타인이 되어 사진 속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2. 베스트 드라이버
올해 여행 계획을 모두 세웠다. 어떤 날 어떤 도시에 도착해 어떤 날 어떤 도시에서 나올지 확정했다. 작년엔 어디든 여기가 아닌 곳으로 가야 한다는 마음이 우선이라 모두 처음이 아니었던 도시들을 방문했는데 올해는 가고 싶은 곳이 생겨 그에 맞춰 계획들을 세웠다. 비슷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는 일상에 새롭게 끼어든 도시 이름이 있고 그 이름으로 인해 기대가 생긴다는 건 역시 행복한 일이다.
예정된 벚꽃 개화 시기보다 약간 늦게 출발하는 이번 달 말의 일본행. 항공기 출도착 시간에 맞춰 인천공항 터미널 주차장 예약을 마쳤다. 공항까지 차로 4시간 가까이 걸리는 거리에 살고 있지만 이번에도 직접 운전할 예정이다. 공항버스를 타고 기다리는 것을 포함해 많은 시간들을 단축할 수 있는 데다 짐에서 자유롭고, 배차 간격이 긴 공항버스 출도착 시간에 맞춰 전체 여행 일정을 조정할 필요가 없어서다.
작년 크리스마스 대구와 연말 부산에서 있었던 지오디 콘서트도 운전해 다녀왔다. 그중 대구 공연은 당일치기였다. 대중교통의 출도착 시간에 맞춰 일정을 짜고, 여의치 않으면 하루 휴가를 내 숙소를 예약하고, 그에 맞춰 비용을 더 쓸 수밖에 없었던 그때와 지금의 가장 큰 차이점은 내가 운전을 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내게 운전은 망설임의 거세를 가져왔다. ①번 버스를 탄다 ②번 기차를 탄다 만 존재했던 선택지에 ③번 직접 운전한다를 추가로 만들었고, 그 결과 ①버스를 타고 간다 ②기차를 타고 간다 ③버스도 기차도 여의치 않으니 가지 않는다의 답안지 중 ③번, 버스도 기차도 여의치 않으니 가지 않는다를 지웠다. 직접 운전한다는 선택지를 늘려 '가지 않는다'의 체념의 답안을 없앴다
처음 운전을 시작할 때 뭇 지인들이 그랬다. 운전을 하는 건 나만의 공간을 만드는 거라고. 그 말도 맞다. 그 말에 덧붙여 나는 운전을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운전을 할 줄 알면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것들이 늘어날 것이라고.
인천공항 주차장 예약이 잘 되었는지 확인했다. 차량번호 네 자리가 잘 적혀 있다. 이제 안전하게 운전하는 일만 남았다.
3. 진짜 사랑 노래는
나는 아직도 MP3를 사용한다. 엄밀히 따지면 아이리버나 아이팟 같은 MP3가 아닌, 아이폰 공기계를 MP3처럼 사용한다. 스트리밍 사이트를 사용하지 않고 노래를 다운로드하여 아이튠즈를 이용해 업로드한 뒤 그 리스트만 듣는다는 의미로 여전히 MP3를 쓰고 있는 중이다. 등록된 곡 약 3천 곡. 결코 많지 않은 노래가 담긴 내 플레이리스트는 업데이트가 아주 느리고 내 성격처럼 무척 폐쇄적이다. 그 탓에 23년 1월에 발매돼 스포티파이 역사상 가장 빠르게 10억 스트리밍 기록을 돌파한 마일리 사이러스의 <Flowers>를 24년 2월에 들어서야 처음 듣게 되었다.
작년 이맘때 홍콩 퀸즈 로드 곳곳에 도배된 파란 바탕의 금발 여성 포스터 속 인물이 마일리 사이러스였고, 그 포스터가 <Flowers>의 앨범 이미지였다는 것도 드디어 알았다. 이 노래를 나온 지 1년도 훌쩍 지난 지금 듣게 되다니. 이제 그만 변화된 속도에 맞춰 살아야 하는 게 맞지 않겠냐며, 내 고인 물 MP3도 이제 그만 놓아줄 때가 되지 않았냐는 생각을 했다. 그 정도로 좋은 노래였다.
뮤직비디오를 찾아보고, 공연 영상을 찾아보다 보니 노래의 좋음을 이야기하는 것 이상의 가십이 따라 나왔다. 이 노래는 마일리 사이러스의 전 남편인 리암 햄스워스를 저격하고 있으며, 뮤직비디오를 구성하는 이미지 역시 두 사람의 관계를 넌지시 은유하고 있다고 말이다.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끼워 맞추기인지는 모르겠으나 <Flowers>의 후렴이 브루노 마스의 <When I was your man>에 응답하는 가사라는 해석은 정말이지 진실 여부를 떠나 무릎을 치게 했다.
(<When I was your man>은 리암 햄스워스가 결혼식에서 마일리 사이러스에게 바친 노래라는 확인되지 않은 카더라가 있는 곡이다. 두 사람이 결혼식장에서 브루노 마스의 <Uptown Funk>란 곡에 맞춰 신나게 춤을 추는 영상은 남아 있다.)
브루노 마스는 <When I was your man>에선 아래와 같이 노래한다.
That I should have bought you flowers
네게 꽃이라도 사줬어야 했는데
And held your hand
그리고 손도 잡아줬어야 했어
Should have gave you all my hours
내 모든 시간을 너에게 쓸 걸 그랬어
When I had the chance
내게 그럴 기회가 있었을 때
Take you to every party
너와 모든 파티에 갔어야 했어
마일리 사이러스는 <Flowers>에서 아래와 같이 노래한다.
I can buy myself flowers
난 나에게 꽃을 사줄 수 있어
Write my name in the sand
모래 위에 내 이름을 혼자 적을 수도 있지
Talk to myself for hours
혼자 몇 시간이고 떠들 수 있어
Say things you don't understand
넌 이해 못 하는 것들을
I can take myself dancing
혼자서 춤추러 갈 수 있고
And I can hold my own hand
내 손은 내가 잡으면 돼
Yeah, I can love me better than you can
그래, 내가 너보다 더 날 사랑해 줄 수 있어
그러니까
너에게 꽃을 사줬어야 했는데
→ 난 나에게 꽃을 사줄 수 있어
너의 손을 잡아줬어야 했어
→ 내 손은 내가 잡으면 돼
내 모든 시간을 너에게 쓸 걸 그랬어
→ 모래 위에 내 이름도 혼자 적을 수도 있지 넌 이해 못 하는 것들을 혼자 몇 시간이고 떠들 수 있어
너를 모든 파티에 데리고 갔어야 했어 너는 춤추는 걸 정말 좋아했으니까
→ 혼자서 춤추러 갈 수 있고
내게 그럴 기회가 있었을 때 말이야
→ 내가 너보다 더 날 사랑해 줄 수 있어
로 마치 답을 하고 있는 것 같지 않나. 후회 가득한 자기 연민적 가사를 부술 듯 대꾸하는. 오랜 시간을 끌어왔던 어떤 사랑이 끝이 났고, 그 끝에 자신을 더 사랑하겠다고 결연하게 내뿜는 의지가 이 달큼한 선율에 녹아 있다. 증명사진 속 내가 낯설듯 나는 사실 나를 제일 모르고 그렇기 때문에 삶은 결국 영원히 나를 인지하고 사랑해 가는 과정이라고 한다면 나는 이 노래에 평생을 떨릴 수 있을 것 같다. 이건 끝나지 않는 사랑 노래라서.
마일리 사이러스는 24년 2월에 열린 제66회 그래미 어워즈에서 베스트 팝 솔로 퍼포먼스와 올해의 레코드 두 개의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하이틴 스타로 등장해 오랜 시간 활동해 왔지만 24년에 와서야 첫 번째로 수상한 그래미였다. 마일리 사이러스는 베스트 팝 솔로 퍼포먼스 상을 받으며 "나비 잡기를 포기하는 순간 코에 앉은 나비 같은 존재가 <Flowers>였다"는 소감을 말했다. 내게도 <Flowers>란 곡이 나비다. Yeah, I can love me better than you can란 가사를 따라 부르다 불쑥 울컥하게 하는 이 순간을 가지고 날아온.
4. N3 합격증을 받았다
23년 12월 첫 주 일요일에 친 일본어능력시험 N3 시험의 합격증을 24년 3월 첫 주 월요일에 받았다. (일본어능력시험 JLPT는 N5부터 N1 레벨이 있고, N1이 가장 높은 수준이다. 그리고 시험의 결과지는 우편으로 발송해 준다. 합격/불합격 상관없이)
반짝 외워 시험 보고 끝이고 싶진 않아 회사 다니면서 틈틈이, 조금씩 자주 오래 외워가며 준비한 시험답게 만족스러운 고득점을 기록했다. 오래 걸려 받은 합격증인 만큼 액자에 넣어 서재 책장 위에 올려두었다. 책장 앞을 지나칠 때마다 한 번씩 시선을 던지게 된다. 꽤 뿌듯하다.
혹자는 N3 정도면 일본어를 할 수 있다고 말할 수준이 아니라고도 하고, 누군가는 N3가 딱 초등학생 수준이라고도 한다. 혹자는 일본어 기초 베이스가 없이 3개월 만에 합격할 수 있는 정도의 시험이라고 하고 누군가는 N2부터 시험을 보는 것이 맞다고도 한다.
고등학교 때 제2 외국어로 배웠던 언어라는 이유로 일상의 비일상성 중 하나로 택한 일본어 공부다 보니 꼭 특정 레벨의 합격증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독학을 하다 보면 금세 흥미를 잃을까 싶어 공부를 지탱케 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삼은 게 시험이었다. 혹자와 누군가에게는 대단한 것 아닌 합격일지 모르는 N3 시험공부로 인해 2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일본어를 읽고 쓰고 이해할 수 있는 폭이 확연히 달라졌다.
올해 최종 목표는 N1 합격. 일 년에 고작 두 번 있는 시험이기에 욕심 내지 않고 단계적으로 여름엔 N2, 겨울엔 N1 시험에 도전할 예정이다. 반짝 외워 시험 보고 끝이고 싶진 않으니 회사 다니면서 틈틈이, 조금씩 자주 오래 외워가며.
내년의 나는 올해의 나와 또 다른 언어의 폭을 가지게 될 것이다. 지금의 내가 재작년의 나와 달라졌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