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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 Sep 24. 2024

여름, 북유럽 fin.

여름, 북유럽 13


시간은 모두에게 공평하다. 각자의 사정은 관심 없이 모두에게 같은 속도로 흐른다. 시간은 오늘이 코펜하겐 마지막 날이고, 오후에 공항을 향해야 하고, 내일이면 집에 도착해야 하는 나의 사정은 아무런 상관없이 어제와 같은 빠르기로 흐른다. 1초, 1분, 1시간. 밤새 공정하게 달린 시간은 아주 태연하게 오늘의 아침을 밝혔다.


나갈 채비를 모두 마치고 마지막으로 캐리어를 잠갔다. 양팔에 힘을 꽉 주면 들리는 무게이긴 한데 바퀴가 뻑뻑한 게 잘 밀리지 않는다. 이럴 때마다 속으로 되뇐다. 오늘 잠깐 힘들면 앞으로 줄곧 행복할 수 있다고. 거의 캐리어를 끌다시피 옮겨 체크아웃을 마치고 지하 보관소에 가방을 맡겼다. 훅 가벼워진 몸으로 호텔을 나섰다. 이 호텔에 파랑새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몽매한 인간은 다시 거리를 나서는 법. 이른 아침을 먹기 위해 지하철을 탔다.


Marmorkirken역에서 내려 출구를 찾아 나왔다. 아침 해를 등진 푸른 돔의 프레데릭 교회의 전경이 바로 보였다. 맞다. 어제 아침과 똑같이 이곳으로 왔고 오늘도 역시 이곳이 목적지가 아니다. 프레데릭 교회를 등지고 오늘은 방향을 왼쪽으로 꺾었다. 아직 문을 열지 않은 가구점과 식당들을 지나 골목을 돌았다.


이 시간에 이 골목에서 유일하게 활기를 띠고 있는 스튜디오 키친Studio x kitchen에 도착했다. 벌써 아침을 먹고 있는 사람들과 음료 테이크아웃을 기다리는 손님들이 있었다. 넓지 않은 매장에 테이블이 서너 개 놓여 있고, 한쪽에 도자기 그릇들이 전시되어 있는 작고 소박한 카페였다. 추후에 그 서너 개 놓여 있는 테이블과 의자, 벽에 걸린 철제 서랍장 등이 아주 비싼 가구란 걸 알곤 깜짝 놀랐지만.


근처의 유명 베이커리인 주노Juno의 치아바타를 사용한 샌드위치와 아이스 라테를 주문하고 야외 좌석에 앉았다. 이 시간엔 나 같은 뜨내기손님보다 단골손님들이 방문하는 듯했다. 테이블을 부지런히 오가며 서빙하는 점원과 손님들이 편히 대화를 주고받는다. 이곳의 활기가 이 관계에서 오는 거였나 보다. 맛있게 먹으라는 인사와 함께 메뉴가 나왔다. 큼직한 야채가 빵 사이로 삐져나온 치아바타 샌드위치를 크게 베어 물었다. 파랑새는 한 마리만 있지 않았다. 이곳에도 있었다.




스튜디오 키친 매장을 등지고 앉으면 오른편으로 공원의 초입이 보인다. 다 먹고 나면 저곳을 산책해 볼까 하는데 세상에. 지도를 확인하니 저기가 바로 로젠보르성의 뒷마당인 왕의 정원이다. 그러니까 SMK 국립미술관에서부터 로젠보르성, 왕의 정원, 스튜디오 키친, 프레데릭 교회, 아말리엔보르 궁전이 거의 일직선상으로 위치한 것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1시간에 둘러볼 수 있는 거리. 여기를 여러 날에 걸쳐 쪼개고 쪼개 나누어 다닌 거였구나.


도시를 크게 보지 못하고 구역구역의 스폿들을 징검다리처럼 다니다 보니 이런 중복되는 동선이 나온 거라고, 이곳들을 한 번에 묶어 다녔으면 동선이 간결해졌을 거라고 생각하다가 알았다. 이곳 모두 시간을 내어 내부를 관람하고, 앉아서 쉬어보느라 이런 일정이 된 거란 걸. 하나씩, 조금씩 시간을 들인 과정의 결과가 이 여러 날이었다는 걸. 짧은 시간에 주파하는 것이 아닌, 같은 길을 한 번 더 지나며 코펜하겐을 익숙한 곳으로 만든 내 여행 역사가 그 중복된 동선에 남은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날들이었다.


아침 조깅을 하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 왕의 정원 한 바퀴를 돌고, 덴마크 디자인 뮤지엄으로 왔다. 의상, 조명, 패키지 디자인은 물론 덴마크가 자랑하는 가구 디자인, 그중 다양한 의자들의 컬렉션이 실로 방대한 곳이었다. 책에서만 본 유명 의자들의 실물을 보는 것만으로도 입이 떡 벌어졌는데 눈으로 보기에도 벅찬 가구들이 이따금 관람객들이 앉아볼 수 있는 곳곳에 놓여 있는 것이 놀라웠다. 의자는 결국 사람이 앉았을 때 빛을 발하는 가구다. 지나가다가 괜히 만져보고, 내가 저렴하게 산 의자의 원 디자인이 바로 이것이구나 하고, 하나만 소장하고 싶네 하며 앉아볼 수 있는 모든 의자를 일일이 거쳐 보았다.


호텔까지 가는 거리를 확인하니 대중교통을 타는 시간과 걸어가는 시간의 차이가 크지 않다. 그렇다면? 맞다. 나는 이럴 때 언제나 걷는 쪽을 택하는 사람이다. 아말리엔보르 궁전과 MACA 뮤지엄, 뉘하운 운하와 왕의 광장을 지났고, 스트뢰에를 가로로 길게 걸어 코펜하겐 시청을 찍고 호텔에 도착했다. 중앙역까지 평소 걸음으로는 10분도 채 걸리지 않는데 울퉁불퉁한 돌길에 무거운 캐리어를 밀고 끌고 들고 걷느라 거의 두 배는 걸렸다. 공항행 열차를 확인하고 플랫폼에 내려왔는데 잠깐 SNS를 확인하는 사이 어느새 사람들이 사라져 있다. 전광판을 확인하니 그새 플랫폼이 바뀌어있다. 이미 이 출발 기차는 놓쳐버렸다. 다음 기차 시간을 확인해 플랫폼을 이동했다. 마지막까지 이곳답구나. 웃음이 났다.


유럽 내 이동이 간편한 곳이라서인지 코펜하겐 공항은 대부분 셀프 체크인을 하는 듯했다. 딱 한 명의 직원이 일하고 있는 대한항공 카운터에서 캐리어를 부치고 출국 수속을 밟았다. 공항 탑승동엔 아르켓Arket을 비롯해 디자인 상점인 일룸Illums Bolighus과 레고 매장이 있었다.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구입하세요. 마지막 찬스입니다’하는 유혹을 간신히 물리치고 라운지로 들어왔다. 간단한 샐러드에 칼스버그 생맥주를 따라와 앉았다. 이제 한 시간 뒤면 탑승 시간이다.


아직 한 번의 환승이 남은 데다 한국에 도착하면 시차를 되돌려 하루가 더 지난다. 그러면 14일, 딱 2주의 여행이 마무리된다. 캠퍼들의 로망이라는 북유럽에 와서 광활한 자연 대신 사람 사는 모습만 잔뜩 보고 돌아가는, 언제나처럼의 나 같은 여행을 했다.




갈 때는 암스테르담 스키폴 공항의 설렘을 택했지만 올 때는 파리 샤를 드골 공항의 익숙함을 선택했다. 별도의 수속 없이 바로 인천행 탑승구로 향할 수 있어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남아 스타벅스로 향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하자 대뜸 한국인이냐 묻는 직원의 질문에 웃고 말았다. 우리 아아의 민족이라는 거 언제 이렇게 다 소문이 난 거지. 종이컵에 담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고 테이블 하나를 차지했다. 1년 전에 엄마랑 앉았던 같은 자리다.


해외여행이 낯설기만 한 스무 살 언저리의 나는 공항에 도착하면 눈이 바빴다. 사람들로 가득한 출국장, 다양한 도착지의 항공기 편명이 가득한 전광판, 활주로에 줄 서 있는 비행기 등. 떠남을 상징하는 풍경들에 아득하게 정신을 빼앗겼다. 방학 내내 한 아르바이트 월급을 이렇게 한 번에 쓰는 것이 맞는지, 혼자 잘 해낼 수 있을지 불안하던 마음은 그런 아득함 속에 사라졌다. 그때 나는 이런 공항이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그러니까 이런 여행이 별 거 아닌 듯 해보이는 사람들이 마냥 신기했다. 저 사람들은 대체 어떤 사람들이길래 1년에 한 번 겨우 올까 말까 한 이곳이 저렇게 익숙해 보이는 거지, 어떻게 저렇게 심드렁한 표정을 할 수 있는 거지 하고. 그로부터 십 수년이 지난 오늘의 내가 아마도 그런 얼굴을 하고 있지 않을까. 여행을 이루는 모든 것이 새롭기만 하던 시기를 지나, 익숙해지는 과정을 넘어, 여행의 가치가 반드시 필요한 사람이 된 지금, 그러니까 이런 여행이 별 거 아닌 듯해 보이는 ‘저 사람들’의 얼굴을.


탑승 전 면세점에서 샴페인 한 병을 골랐다. 돌아오는 공항에서 여행을 잘 마무리했다는 자축의 의미로 샴페인을 사는 걸 나름의 의식처럼 삼고 있기 때문이다. 면세점엔 세븐틴의 노래가 연달아 흘러나오고 있었다. 계산대에 샴페인을 놓으니 직원이 말하는 결제 수단의 ‘카드’가 아주 정직한 한국식 발음이다. 세븐틴 노래도 그렇고, 발음도 그렇고 한국어가 가능한 분인 것 같아 혹시나 하고 한국어로 답하니 기다렸다는 듯 "터치 말고 그거 안에 꽂으셔야 해요" 유창한 한국어 응대가 이어졌다. 발음도 아주 좋아 그걸 칭찬했더니 반응도 아주 겸손했다. "아휴, 감사합니다.”


탑승이 시작된다는 안내가 나와 줄을 섰다. 이제 정말 돌아가는구나. 미리 지정한 자리를 찾아 앉았다. 사람들이 부산스럽게 움직이며 자리를 찾고 짐을 올리고 하는 사이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비행기가 출발을 앞두고 활주로를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는 동안 까무룩 잠이 들었다.




파리에서 출발이 약간 지연되어 당초 예매해 놓은 고속버스 시간을 맞출 수 없었다. 짐이 빨리, 정확히 나오기론 세계 최고의 공항이 인천이라 조금 타이트하게 버스 시간을 예매했더니. 역시 조금 여유를 두는 편이 맞았겠다. 삶의 공간으로 오니 금세 방심해 버렸네. 비행기에서 내림과 동시에 기존 티켓을 취소하고 수화물 벨트에서 짐을 찾는 내내 맹렬한 새로고침을 해 바로 다음 시간 출발의 고속버스 1자리 취소석을 잡을 수 있었다. 티켓팅을 원 없이 해 온 덕질 경력을 십분 발휘했다.


수요일 저녁의 인천 바다는 고요하게 흐르고 있었다. 어두워지는 하늘을 멍하니 바라봤다. 여행을 출발할 땐 약간의 긴장이 있었는데 여행을 마무리한 지금은 아무런 상념이 없는 상태가 되었다. 오디션에서 준비한 만큼의 연기를 다 보인 참가자의 마음과 비슷하다. 할 수 있는 건 다 한 후련함이 있다. 억지로 잠을 청하려고 하면 더욱 말똥해지는 터라 피곤하면 눈을 붙였다가, 내일 출근해서 해야 할 목록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다가 했다.


그간 별 탈 없이 여행을 마쳐왔다. 많은 여행을 해 온 동안 운이 좋게 그동안 소매치기 한 번, 짐 분실 한 번, 비행기 캔슬 한 번, 아픈 것 하나 없이 여행을 했다. 평소 소소한 경품 하나 못 타는 지지리 운 없는 사람인데 내 운은 전부 여행에 쓰이고 있던 걸까. 만약 그렇다면 내 운은 지금처럼 애매한 경품이나 로또 5등이 아닌 여행이 무탈할 수 있는 데에 전부 다 쓰이면 좋겠다.


터미널에 도착해 마중 나온 동생의 차를 얻어 탔다. 핸드 캐리로 따로 빼놓은 동생과 조카의 선물을 건네주고 -이 핑계로 동생을 기사로 불렀고, 덕분에 가방을 좀 더 무겁게 꾸릴 수 있었다- 집에 도착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니 창문을 오래 닫아놓은 묵은 집 냄새가 훅 끼쳐왔다. 먼저 창문부터 열어 환기를 시키곤 뽑아 놓았던 콘센트를 하나 둘 원래대로 꽂았다. 정수기 아래에 어디서 샜는지 모를 갈색 얼룩이 넓게 져 있었다. 같은 정수기를 몇 년째 쓰고 있지만 한 번도 본 적 없는 흔적이다. 사람이 집을 2주 비웠다고 이런 차이가 생기나. 얼른 행주로 닦아냈다.


사 온 기념품은 테이블 위에 따로 쌓아두고 나머지 짐들을 정리했다. 그새 따뜻한 물이 채워진 욕조에서 반신욕을 하고 나왔다. 잠옷으로 갈아입고 핸드폰 알람을 열었다. 2주간 꺼두었던 출근 시간 알람을 켰다.


돌아왔다, 나의 자리로.

다시 떠남이 있을 출발 자리로.




2024년 8월 오슬로 ⓒ제이


2024년 8월 스톡홀름 ⓒ제이


2024년 8월 코펜하겐 ⓒ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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