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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 Jan 21. 2020

38. RM의 언어

방탄소년단 덕후 일기 38



조용한 연말을 보냈다. 회사 송년회는 점심 식사로 짧게 끝냈고, 친구들과는 간단한 안부 인사를 나눈 연말이었다. 나이가 한 살 한 살 먹을수록 소란스러움이 배재된다. 약속을 잡고, 시간을 나누는 일이 어떤 의무와 같아서다. 대화의 공통 주제는 좁아지고, 여러 곁가지들의 이야기를 배회하다 허무하게 끝나는 시간들을 이제는 억지로 하기 싫어진 탓도 있다. 그리고 사실, 이런 자리에서 나누는 말들에 내가 상상하지 못할 만큼의 에너지가 들어가는 걸 언젠가부터 몸이 먼저 알아채서다. 몸도 마음도 불편한 자리를 이젠 피하게 됐다.


술을 곁들인 밤. 집으로 돌아가는 택시 안에서 나는 보통 후회했다. '아, 너무 많이 말을 했나' 하고. 잠깐의 정적을 참지 못하고 어떻게든 말의 물꼬를 여는 역할을 자처해서였다. 웃고 떠들고 정신없는 자리 안에서 내가 버린 말들은 어디로 흘러 어떻게 고여있을까. 차창 넘어 스치는 네온사인을 보고 나는 보통 결심했다. '아, 다음엔 쓸데없는 말 많이 하지 말아야지.' 하고. 택시비를 결제하고 내려 집까지 걸어가는 짧은 걸음 동안 나는 마지막으로 다짐했다. '그냥 차라리 약속을 잡지 마'. 입을 무겁게 다물고 경청하는 내가 결코 상상이 안 되기 때문이었다.  


우린 매일 말을 하고 살고 있지만 막상 이 말이 가진 힘을 간과하는 일이 많다. 무심코 던진 말 하나가 사람을 살리기도 죽이기도 한다는 걸, 그런 말을 평소에 수도 없이 하고 있다는 걸. 그래서 많이 사유해야 한다. 그 찰나의 순간에도 안정적인 말을 하기 위해서, 상처 주고 상처 받지 않기 위해서. 


남준이의 언어, 남준이의 말에 자주 놀라고 감명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즉석에서 대답을 내놓아야 하는 인터뷰나 소감 등에서 "어쩜 이런 즉답을 이런 표현을 곁들여 할 수 있지" 놀라게 하기 때문이다. 남준이 오랫동안 사유했던 결과들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남준이의 가사는 이전에도 이미 따로 한 편을 빼어 쓸 정도(https://brunch.co.kr/@cantabilej/12) 로 익히 좋아하지만 오랜 시간 숙고하여 고치고 또 고치고 줄이고 또 줄였을 가사가 아닌, 남준이의 말에 대해 쓴다. 거르고 거른 가사와 달리, 순간의 즉흥성이 가미된 남준이의 말, 남준이의 언어에 대해서. 



1. 



방탄소년단의 2017년은 화려했다. <봄날> ,<Not today>에 이어 <DNA>까지. 코어 팬덤을 넘어 대중까지 사로잡았고, 북남미, 유럽, 아시아 전역을 도는 <Wings> 투어도 성공적이었다. 빌보드 본 시상식에선 탑 소셜 아티스트 상을 받았고 방탄소년단의 이름을 앞세운 기사들도 우후죽순 쏟아졌다. 바야흐로 방탄소년단의 세상이 열렸다. 그것도 활짝. 2017년 12월부터 2018년 1월까지 연이어 개최되는 시상식의 영광의 대상은 그렇게 방탄소년단에게 돌아갔다. 화려하게 터지는 축포 속, 당당한 걸음을 걷는 일곱 명의 걸음. 모든 시상식에서 보인 최후의 순간이었다. 


2017년을 마무리하는 가장 마지막 시상식이었던 서울가요대상. 대상엔 방탄소년단이 '역시' 호명되었다. <MIC Drop>의 복장을 한 멤버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서로 얼싸안은 뒤 무대로 올라왔다. 세상의 손가락질에 맞서 보란 듯이 성공한 자리에서 <MIC drop>의 의상을 입고 있었던 건 우리 모두가 느낀 희열이었다. 상패를 전달받은 남준이 마이크 앞에 섰다. 마이크 앞에서 깊은 숨을 내신 뒤 남준이 수상 소감을 말하기 시작했다.



    아미. 감사합니다.

    시작은 진짜 사소했었던 것 같아요 그냥 음악이 좋아서, 아니면 저를 표현하고 싶어서, 

    무대 위의 누군가가 있어서. 저뿐만 아니라 여기 있는 다른 여섯 친구들도 똑같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이제 저희를 여기까지 오게 만들었는데요, 

    아미 여러분들이 저희를 좋아하시기 시작한 이유도 굉장히 사소했었을 것 같아요. 

    우연히 동영상을 봐서, 음악이 좋아서, 아니면 퍼포먼스가 멋있어서.

    그러한 사소한 이유들이 이렇게 모여서 과분한 사랑이 되고..

    저희가 이번 앨범을 만들 때 이번 앨범이 저희에게 큰 분기점이 될 거라고 말씀드렸었는데요,

    그 분기점을 너무나 행복한 영광스러운 황금빛 분기점으로 만들어주신 거 같아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저희가 최근에 왜 우리가 이 무대에 서고 음악을 계속 만드는지에 대한 이유들을 

    서로 얘기해보고 있었는데요 항상 마지막에는, 그 이유에 여러분들이 있었던 것 같아요.

    저희가 이 일을 할 수 있는 이유가 되어주셔서 감사하고,

    저희도 여러분들이 살아가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는 이유가 되는 

    그런 멋진 방탄소년단이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앨범의 콘셉트를 구성하고 곡과 가사를 쓰는 남준은 방탄소년단 앨범 작업에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런 남준에게 늘 따라다녔을 질문은 앨범에 대한 성공 이전에 이 고된 작업을 계속해나가는 이유에 대한 궁금증이었을 것이다. 단순히 좋아하는 취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이제 그 의미를 넘어 생각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이 살을 붙여 불어나는 상황에 직면하면서 '대체 나는 왜 이 직업을 택해 이 지난한 생활을 계속하는 걸까' 생각했을 테다.


바야흐로 방탄소년단의 세상이 열린 2017년의 끝, 그리고 2018년의 시작점에서 남준이는 그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여러분이 들어주기에 이 자리에 있다고." 



2.



그렇게 시작된 2018년은 그럼에도 쉽지 않았다. 음악을 하는 이유를 생각해도 도무지 이 힘듦이 적응되지 않았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스케줄, 꿈꿨던 이상으로 커지는 인기와 영향력, 그에 비례하는 반대 의견들. 이제는 그때를 웃으며 반추하지만 2018년 초는 방탄소년단에게 정상의 어지러움에 바닥이 휘는 듯한 하루하루의 연속이었다. 


 <Fake Love> 앨범을 준비하던 멤버들은 <달려라 방탄> 야유회 편을 찍기 위해 서울 근교의 펜션을 찾았다. 무대 위에선 군무로 날아다니면서 구기 종목엔 영 둔한 터라 엉망진창 와장창인 족구와 배드민턴을 깔깔거리며 함께 했다. 잠깐의 쉬는 시간엔 눈을 붙이거나 게임을 했고, 다 같이 고기를 구워 밥도 맛있게 먹었다. 수많은 스태프들이 함께 하는 공식 스케줄이지만 오랜 시간 손발을 맞춰 온 사람들인 데다 모처럼의 여행 같은 시간이라 마음 놓고 있을 수 있었을 테다. 


늘 그렇듯 이런 야유회의 하이라이트는 캠프파이어와 함께 하는 편지 읽기. 멤버들에게 전하는 이야기를 짧은 시간 안에 시의 형식을 빌어 썼다. 왜인지 이런 공식적인 자리는 부끄럽지만, 막상 멤버들의 편지가 시작되니 각자 집중해서 듣는다. 어느덧 남준의 차례가 됐다. 



    제목: ㄱ한다


    기억한다.

    태형이의 반삭 머리, 정국이의 사슴 눈망울과 돌청 스키니 바지, 호석이의 회색 패딩, 

    윤기 형의 파란색 추리닝 바지, 석진이 형의 아재 개그 안 하던 시절, 지민이의 두툼했던 몸몸몸매

    기억한다.

    우리의 한강, 우리의 자전거, 우리의 GXXX 브이넥, 우리의 GXXX 치노 반바지, 우리의 쇼케이스,

    우리의 소불고기, 우리의 대기실 의자, 그리고 우리의 피 땀 눈물.

    그 모든 기억은 내 머릿속 서랍장 가장 깊은 구석에

    그 모든 기억은 한글 자음 ㄱ처럼 소중한 내 첫 번째. 그래서 나는 오늘도 기억을 ㄱ한다.



자신들의 처음을 한글 자음의 첫 자 ㄱ으로 비유하여 추억을 덤덤하게 말했다. 정국이는 언제나처럼 남준이의 표현에 감탄했고, 내내 가만히 듣고 있던 태형이는 벌떡 일어나 남준이를 포옹했다. 바로 다음 차례인 호석이는 부담감에 어찌할 줄 몰라했지만.


우리 지금 힘들지만 버텨내자는 상투적인 파이팅은 어느 곳에도 찾아볼 수 없는 담백하고 짧은 글이었다. 하지만 그래서 더 모두의 마음을 울렸다. 오랜 시간 함께 해 온 우리의 노력과 의지가 그 시간 안에 여전히 존재함을, 그렇게 함께 해 온 우리의 시간이 헛되지 않았음이, 그러니 앞으로도 꽤 괜찮을 거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괜찮아져서, 이제는 웃을 수 있다 말하는 멤버들이기에 이때의 남준이의 마음이 더욱 생각난다. 함께 했던 고생과 함께 겪은 우여곡절, 함께 누린 영광이 멤버들의 ㄱ의 기억으로 계속 쌓여갈 것임을 암시했던 남준. 멤버들의 ㄱ의 기억이 오늘 하나쯤 추가됐으려나.



3.



2018년 본보야지는 한낮의 뜨거운 태양이 쏟아지는 몰타를 여행했다. 팀을 바꿔 둘셋씩 여행을 하고, 숙소에 모여 음식을 나눠먹는 방탄소년단스러운 여행이었다. 모두가 함께 모여 먹는 마지막 저녁 식사. 식사 장소는 예상치 못했던 상공. 바로 <Dinner in the sky>였다. 


고소공포증에 발아래는 내려다보지 못해도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몰타의 밤이 생각보다 괜찮았는지 서빙되는 음식들을 곧잘 먹을 수 있었다. 소리 내진 못하지만 허공에 와인잔을 부딪히고, 서로 다른 메인을 시켜 한 점씩 나눠먹기도 했다. 저 멀리 몰타 시내의 불빛이 은은하게 보인다. 언제 이런 경험을 해보겠냐며, 방탄소년단이라 이런 경험도 할 수 있는 거라며 같이 기념 셀카도 찍었다. 


긴 여정의 <Love yourself> 투어를 앞두고 떠나온, 당분간은 없을 여행의 마무리는 역시나 편지였다. 저녁을 먹으러 떠나오기 전, 각자 나눠 받은 편지지에 자기 자신에게 보낸 편지를 썼다. 물론 이런 상공에서 읽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도리어 더 괜찮은 것도 같다. 까만 밤 가운데 우리끼리만 오롯이 솟아 있는 공간. 


늘 언제나 행복에 대해 말하는 정국이의 편지 낭독이 끝난 뒤 다음 차례로 정국은 남준을 지목했다. 이럴 때 정국이는 늘 남준이다. 다들 언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며, 'ㄱ을 기억하다' 같은 명 문장을 내뱉지 않았었냐며 한 마디씩 거든다. 다른 멤버들이나 팬들에게 보내는 편지가 아닌 자신에게 쓴 편지 탓인지 혹은 와인 탓인지 부끄러운 얼굴을 한 남준이 물 한 잔으로 목을 축였다.



    To. RM


    안쓰럽다.

    이런저런 것들에 치여 정작 즐겨야 할 때 즐기지를 못하는구나.

    솔직히 요즘은 자주 도망치고 싶은 것도 잘 알고 있잖아.

    소중하게 여기던 것들이 더 이상 소중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을 때 그때가 그 어떤 것보다 무서웠을 거야.

    생각과 잡념이 많은 것도 운명이려니 하면서 지내고 있지만,

    명심해. 저도 부러질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인정하자 인생이란 게 그냥 이런 건가 싶다.

    나는 이런 운명과 그릇을 갖고 태어났다고, 스스로에게 짐이 아니라 힘을 실어주자.

    여기 있는 모두가 제각기 마음에 크고 작은 모서리들이 있을 거야.

    아마 나는 원래 이런 모양이 될 운명이었던 것 같다, 그냥 아마도.

    이 일주일 동안에도 솔직히 수없이 집과 한국을 생각했지만

    진짜로 집과 안식처는 그곳에 있지 않다는 걸 너는 잘 알고 있잖아.

    늦은 새벽에 혼자 작업실을 나와서 수없이 걷고 서성이며 생각했잖니.

    그래서 수고했다. 이 정도면 잘 버티고 한 어른으로서 한 직업인으로서 잘 살아내고 있다고 

    그냥 어깨를 탁탁 두드려 주고 싶다.

    그리고 너무 걱정 마라 키가 커지면 그림자도 커지는 법이지만

    아직은 너는 키가 작아지고 싶은 사람이 아닌 걸 안다.

    너의 수고와 눈물을 나는 안다.

    누가 몰라주고 다 알 수 없는 거라 해도 나는 진짜로 알고 있다.

    수고했다 그리고 사랑한다. 그냥 많이.

    모든 방황이 사춘기처럼 널 지나쳐 가기를.


    - 남준이가



2020년 1월 17일. 정규 4집 <MAP OF THE SOUL : 7>의 발매에 앞서 <Black Swan>의 음원이 선발표됐다. 이전 앨범에서 팬들에 대한 사랑과 감사를 노래했던 <작은 것들을 위한 시>와 전혀 다른 분위기의 곡이었다. 사회적 자아로서의 나(persona) 이면의 나(shadow)를 다룰 이번 앨범이 단박에 기대됐다. 앨범 소개 글에서처럼 방탄소년단은 '자신의 깊은 내면으로 들어가 예술가로서 숨겨둔 그림자와 마주했다.' 


 “무용수는 두 번 죽는다. 첫 번째 죽음은 무용수가 춤을 그만둘 때다. 그리고 이 죽음은 훨씬 고통스럽다(A dancer dies twice — once when they stop dancing, and this first death is the more painful)” 

 - 마사 그레이엄(Martha Graham)


음악이 더 이상 나에게 큰 감동이나 떨림을 주지 못한다면, 그것이 한 번의 죽음일 테나 그럴수록 음악밖에 없음을 역설적으로 깨닫는 <Black swan>의 가사는 이미 이때부터 남준의 마음속에 늘 남아있던 그림자였다. 


그러나 다행히 아직은 키가 작아지고 싶은 남준이 아니다. 인간이 한 뼘 자라기 위해선, 진짜 내가 누군지 알기 위해선 사춘기 같은 어쩔 수 없는 고통의 시기를 지나칠 수밖에 없음을, 경중의 차이일 뿐 이 시기가 남준이만의 방탄소년단만의 것이 아님을 남준이가 자주 상기해줬으면 좋겠다. 걱정 마, 그때의 방황이 사춘기처럼 지나쳐 갈 거야.



4. 



짧은 시간 안에 쓰는 글이라지만 그래도 글은 말보다 정제된다. 어떤 주제를 담을까 고민할 시간이 주어진다. 그래서 말을 하는 자리에서의 남준이는 더욱 빛을 발한다. 그 정제되는 시간이 없음에도 유려한 말을 꺼내기 때문이다. 여기 고척돔에서 열린 <Wings> 파이널 콘서트에서 팬들에게 전한 남준의 말이 있다. 



    과거의 우리에게 안녕을 보내야 할 시점이 된 것 같아요. 사막과 바다.

    데뷔할 때 무서웠어요. 엄청 무서웠어요. 망할까 봐. 사람들이 싫어할까 봐.

    그래서 우리끼리 이렇게 "야, 어떡하냐" "이번엔 어떡하지" "이렇게 하면 좋아해 줄까" 

    "이렇게 하면 싫어할 것 같은데" 그런 얘기만 하고 그랬었는데.. 

    안고 갈 거예요. 저는 잊고 싶지 않아요. 그랬던 기억들 다 잊고 싶지 않아요.

    왜냐면 그것도 저희 일부고 그냥 과거의 우리지만 그래도 잊고 싶지는 않고, 

    앞으로 분명히 아픔이 있을 거예요 시련도 있을 거고. 

    근데 이제 알아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믿고 좋아해 주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프지만 아프지 않고 슬프지만 슬프지 않고 두렵지만 두렵지 않을 겁니다, 방탄소년단은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여러분께 꼭 하고 싶었던 얘기는 편지나 이제 가끔 주시는 말들을 보면 그런 말씀들을 

    해주세요 요즘 너희가 잘돼서 좋은데 내 삶은 아직, 내 꿈은 아직 제자리걸음인데 

    너희들이 멀리 가는 것 같아서.. 나랑 같이 시작했는데 혹은 이렇게 하는데 멀리 가는 것 같아 

    약간 마음이 너무 좋지만 마음이 뒤숭숭하다.

    근데 저희도 저희를 믿지 못했어요 우리가 할 수 있을 거라고, 우리가 잘 될 거라고. 

    "우리가 체조경기장에서 죽기 전에 공연 한 번 해보고 은퇴할 수 있을까 아니 모르겠어" 

    제가 해드리고 싶은 말씀은. 저희 정말 처음에 다들 꼬질꼬질하고 그랬어요 저희도 해냈습니다

    저희를 알아봐 주신 여러분들이라면 여러분의 꿈, 여러분의 삶, 여러분의 인생에 

    언젠가 저희의 존재가 저희의 음악이 저희의 무대가 저희의 사진 영상이 여러분한테 아주 조금이나마 

    아픔이 100이라면 그 아픔을 99, 98, 97로 만들어줄 수 있다면 그걸로 저희의 존재 가치는 충분합니다. 

    정말 사랑합니다.



이토록 방탄소년단으로서, 아이돌로서, 음악인으로서, 팬들의 사랑을 받는 위치로서 자신의 역할을 늘 생각하는 자가 있을까. 사막과 바다는 이제 안녕했지만 남아 있는 길이 마냥 꽃밭이 아닐 것임을 이미 알고 있던 남준이는 그럼에도 팬들에게 위안을 건넸다. 


덕깍지 제외하고도 이 말은 해야겠다. 이게 우리 남준이에요.



5.



<Speak yourself>의 파이널 콘서트는 <Love yourself>의 시작과 같은 곳, 서울 잠실 주경기장에서 개최됐다. 내내 뛰고 소리를 지르느라 시간이 어떻게 가는 줄 몰랐던 첫째 날과 둘째 날의 콘서트를 지나 마지막 콘서트는 이상하게 침잠하는 순간들이 울컥울컥 찾아왔다. 마지막이라는 세 글자가 주는 무게감 때문이었다. 나 같은 한낱 덕후도 이러는데, 2년간의 투어를 했던 멤버들은 어떤 마음으로 이 무대에 섰을까. 


긴 투어가 끝나는 소회를 밝히는 멤버들의 인사. 생각지 않았던 석진이의 울먹이는 목소리에 이미 눈물샘이 터져버렸는데, 마무리 멘트를 하기 위해 마이크를 잡은 남준이의 마지막 인사에 뿌연 눈으로 멍하게 있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 이년 반동안 우리 스스로를 사랑하기 위해서 견뎌 온 방탄과 아미를 위해서 박수 한번 쳐줍시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생각해보면 16년도에 했던 <Reflection>의 마지막 구절이죠. 

    "I wish I could love myself"라는 구절에서부터 계속 생각을 했었어요 나를 사랑하는 게 대체 뭔가, 

    그래서 나도 모르겠으니까 우리 같이 찾아보지 않을래 해서 시작된 여정이었고 

    화양연화라는 큰 많은 좋은 피드백들을 얻었던 기획 뒤에 온 기획이라 사실 많은 분들이 

    함께 해주실 수 있을까 그런 고민을 했는데 

    그래서 넌 너를 사랑하냐고 나에게 묻는다면 전 아직 잘 모르겠어요 

    그치만 왠지 그럴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그래서 <Love yourself> 이 콘셉트는 여기서 한번 끝나지만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는 그 방법을 그 길을 앞으로 계속 찾아가는 여정을 끝나지 않으니까 

    우리 앞으로도 이렇게 손잡고 같이 우리 스스로를 더 사랑할 수 있게 저도 함께 했으면 좋겠습니다. 알았죠?

    이 많은 시간 이 많은 일들 뒤에 지금 이 <Love yourself>가 끝나고 김남준이 김남준일 수 있었으면 좋겠고

    방탄이 방탄이 방탄일 수 있었으면 좋겠고 또 여러분 한 분 한 분의 이름 누군가 김 모모 이모모 박모 모가 

    아미의 이름 아래 여러분이 여러분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거 꼭 알아주시고요. 

    여러분 덕분에 저는 여기까지 살아올 수 있었어요 믿어주세요 앞으로도 저희의 단 한마디 

    단 가사 한 줄이라도 여러분이 여러분을 사랑하는 데에 도움이 됐길 바랍니다.

    앞으로 저희가 어떤 모습으로 돌아오더라도 같이 같이 합시다. 

    안 울려고 했는데 앞으로 2018 Love yourself Speak yourself 투어 못해서 서운할 거 같아요.

    사랑이라는 말보다 더 좋은 말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진짜 정말 사랑합니다 알아주세요. 

    이제 핸드폰 플래시로 저희를 비춰주시겠습니까?

    저희의 작은 우주 많은 사랑이 되어준 여러분께 드리는 저희의 노래입니다.



자신이 만들어낸 앨범에 대해서, 공연에 대해서, 이 과정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애정이 있는지, 방탄소년단이라는 이름에, 아미라는 존재에 얼마나 많은 애착이 있는지, <Love yourself> 시리즈의 말미에 남준은 눈물로 자신의 마음을 전달했다. 


3일의 콘서트를 다녀와서 쓴 덕후 일기에서 나는 남준이의 이 마지막 멘트에 대해 '의도치는 않았지만 자신을 사랑하는 데에 아미를 이용하고 있는 것 같다며 그러니 여러분을 사랑하기 위해 필요하다면 제발 자신들을 이용해달라던 남준이의 말이 내내 맴돌았다. 우리는 서로를 알았고, 알고 싶어 했고, 그랬기에 보다 나아진 사람들이다. 그 이상의 말과 이유가 필요 있을까.'라고 썼다. 


방탄소년단의 앨범으로 내 하루가 얼마나 풍성해졌는지 남준이는 상상도 못 할 것이다. 나를 사랑하는 것이 삶의 이정표가 되고, 멤버들이 전하는 안부로 위안 삼고, 웃음과 동력이 생기는 이 일상을 감히 어떻게 설명할 수 있으랴. 팬들이 남준과 방탄소년단에게 작은 우주 속 사랑을 전하고 있다면 남준과 방탄소년단은 팬에게 그 우주가 속한 대우주를 선사했다. 사랑이라는 말보다 더 좋은 말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은 남준에게 고스란히 돌려주어야 한다. 그건 우리가 찾고 싶은 말이니까.



-



2019년 12월 31일에서 2020년 1월 1일로 넘어가는 밤. 'New year's rockin eve' 무대에 서기 위해 뉴욕에 체류하고 있는 멤버들이 라이브 방송을 켰다. 현지 시간으로 오전 10시 즈음으로 아직 채 덜 깬 얼굴로, 잠옷을 입은 채로, 꾸밈없는 모습으로 브이앱 전용 카메라 앞에 옹기종기 앉았다. 


아미와 함께 해피 뉴 이어를 외친 뒤 각자 2020년 목표로 삼은 것에 대해 이야기 하기 시작했다. 믹스테이프 발표, 영어 공부, 악기 연주 등의 목표 뒤, 남준이는 독서를 얘기했다. 대기 시간에 책을 많이 읽으려고 한다며, 지금은 억지로 읽는 것도 많지만 더 열심히 읽어보겠다고. 지금도 항상 책을 읽고 있다며, 진짜 대단한 것 같다는 멤버들의 추임새가 이어졌지만 남준은 운동과 독서를 통해 마음과 몸의 양식을 잘 쌓아보겠다는 깔끔한 목표를 세웠다. 


잠깐 눈을 붙이고 핸드폰 게임을 하는 편이 훨씬 편할 텐데도 남준이는 읽고 쓰는 행위를 멈추지 않는다. 이걸 습관으로 삼은 사람만이 할 수 있다. 위버스나 공카에 이따금씩 찾아와 자신의 이야기를 남겨주는 남준이가, 늘 말로 고마움을 전달하는 남준이가 있어서 좋다. 


이 글 첫머리에 쓴 문장 하나를 다시 가져와야겠다. 남준이가 내뱉는 말엔 남준이 오랫동안 사유했던 결과들이 담겨있다. 그래서 남준의 언어가 더욱 소중하다. 그새 더 커져있을 남준이의 철학, 그것이 드러나는 순간을 올해도 기꺼이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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