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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현 Nov 08. 2024

한창 사춘기인데 이민을 가게 되었다.

하루아침에 끝나버린 어린 시절

Source: Pexels

어린 시절이 정확이 어느 날 끝났는지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난 자신있게 답할 수 있다. 


 겨울방학이 올 때마다 가족과 스키장에 가곤 했다. 흰 눈이 내리는 산 위에서 스키를 열심히 타고나서 먹는 라면은 그야말로 천상의 맛. 난 그런 생활이 정말 좋았다. 하지만 언제까지 계속할 수 있을까? 초등학교 졸업을 앞둔 어느 날, 나는 부모님에게 물었다.


'앞으로도 여기 올 수 있을까요? 중학생이 되어서도?'


부모님은 그저 웃으시기만 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올 수 없었다. 난 영원히 그런 시절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으니까.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추억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그 일은 학교를 마치고 온 어느 날에 일어났다.


나를 비롯한 친구들은 방학에 놀 계획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어디 가서 무얼 먹을지, 어떤 게임을 할지, 그 시기라면 누구나 나눴을 그런 이야기들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집으로 오는 길에는 가판대에 들러 떡볶이를 사 먹고, 도서관에서 새로 출간된 만화책을 빌려 집으로 갔다. 그날은 학원도 없어서 내 기분은 최고였다. 조금 이상했던 것은 평소에 출근하시는 아버지가 집에 계셨다는 것이지만, 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오늘은 학원도 없으니, 여차하면 외식하러 갈 수 있지 않은가? 오히려 좋았다.


걱정이 커진 건 밤이 되어서다. 10시, 11시가 되어도 어머니가 집에 오지 않으셨다. 나는 아버지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어봤지만 답이 없었다. 혹시 사고라도 난 건가? 하지만 12시가 되어 돌아오셨고, 곧 부모님은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면서 우리 형제를 거실로 불렀다.


'우리 다음 달에 이민 갈 거야. 중국으로.'


누군가에게 좋아한다는 말 정도는 들어야 이 감정이 다시 재현되지 않을까? 내 머리는 그야말로 백지가 되었다. 놀랐다는 말보 나는 '정신이 가출했다'가 더 정확한 그런 느낌이었다. 아버지가 지사로 파견이 되어 광둥 성 선전 시로 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난 그게 어디인지도 몰랐다.


'다음 주에 이사차량 오니까, 오늘부터 짐을 싸 두도록 해. 배로 실어 보낼 거니까 꼼꼼히 포장하고.'


솔직히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날 줄 몰랐다. 난 평생 그 동네에서 살 줄 알았다. 동네 친구들과 놀고, 집 앞 문구점에서 군것질을 하고, 지금 다니는 학원에 영원히 다닐 것 같았다. 머리 귀퉁이로 스키장의 추억이 스쳐 지나가기도 했다.


언젠가 동네를 떠날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순식간에 일어날 줄은 몰랐다. 추억이 담긴 놀이터, 수영장, 학교가 하루아침에 내 삶에서 퇴장했으니 말이다. 밤새 친구들과 전화 통화를 했는데 통화 시간을 보니 1시간이 넘어갔다. 그 통화와 함께 내 어린 시절은 순식간에 막을 내렸다. 맙소사, 이건 너무 빠르잖아. 하지만 인생은 시간표처럼 오지 않는다. 때로는 시간표가 통째로 없어지기도 하니까.

Source: Pexels


다음 날이 되자 내 유년 시절은 샅샅이 분해되었다. 어린이집 때부터 가지고 놀던 소파가 재활용차에 실려가고, 내 간식을 책임지던 냉장고가 중고로 거래되었다. 집의 추한 민낯이 드러나기도 했다. 소파가 사라진 자리에는 눈처럼 하얀 먼지가 있었는데, 마치 해탈한 노인처럼 보였으니까.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지는, 음, 별로 상상하고 싶지는 않다. 여러분들은 청소를 열심히 하기를 바란다.


'문구점 털이'를 하기도 했다. 저금통을 깨도 돈을 몽땅 싸들고 문구점으로 달려가 간식을 싹쓸이했다. 이제 못 볼 걸 생각하니 돈은 별로 아깝지 않았다. 평소 못 먹었던 간식까지 먹다 보니 배탈도 났지만 아무렴 상관없었다. 이 맛을 또 언제 즐기랴. 마음껏 먹었다.


이틀 뒤에 이삿짐 차량이 찾아왔다. 그런데 내가 본 이삿짐 차량과는 많이 달랐다. 아주 큰 대형 트레일러였고, 짐은 이중, 삼중으로 포장되어 실려갔다. 왜 그러냐 물어보니 바다를 건너야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흠, 오묘한 대답이었다. 그럼 짐들은 먼저 중국으로 가는 선발대인 셈인가? 장난감 하나하나에 행운을 빌어 주었다. 기분이 묘했다.


이 사건으로 느낀 건 '세상에 영원한 것 없다'였다. 영원히 함께할 줄 알았던 친구들도, 동네도 언젠가는 떠나게 된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이를 받아들이는 유연한 자세이다. 아무튼 남은 기간 동안 난 '개조 작업'에 들어갔다. 난 중국어, 영어에 까막눈이나 다름없었으니 거의 처음으로 공부에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그렇게 내 어린 시절은 점점 옅어져 갔다. 장남감도, 게임도 점차 줄어들었다. 


고향에서의 마지막 밤, 나는 문화센터로 가는 길에 위의 육교에 올라갔다. 전에도 자주 와 본 적 있었지만 오늘은 조금 특별했다. 눈으로 덮여 새하얀 다리였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초등학교 현장 학습, 어린이집 나들이도 이 다리를 건넜고, 학원에 다닐 때도 건넌 다리였다. 하지만 이제 못 본다. 돌아올 수는 있겠지만, 어린이로서 다리에 서는 날은 오늘이 마지막이었다. 


다리는 쥐 죽은 듯 고요했다. 가끔씩 차들이 조금 다니는 것 빼고는. 나는 구름이 서린 달을 올려다보며 내 어린 시절에 영원한 작별을 고했다. 크리스마스 날 하루종일 놀이터에서 논 추억과 동생과 싸운 기억도 모두 다리에 두고 내려온 것이다. 


첨언하자면, 스키장은커녕 생존이 위험한 나날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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