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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현 Nov 09. 2024

국제학교에서의 충격적인 첫날

졸지에 해외로 나간 어느 중학생의 이야기

(작중 인물들은 국적, 나이, 특징 등을 모두 바꾼 가공의 인물들입니다.)

스쿨버스. Source: Wikipedia

새 학기, 새 출발은 늘 설레는 법이다. 누구와 같은 반이 될지, 선생님은 어떨지 기대가 만연한 시기이기도 하다. 지난 6년간 늘 그래왔지만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해외에서, 그것도 국제학교에 들어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국제학교라고 하지만 중국 학생, 선생님들도 많았는데 필자는 중국어는커녕 영어도 잘하지 못했기에 걱정이 태산이었다. 기초적인 문법 지식은 알고 있었지만, 그걸로는 당연히 부족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학교 갈 준비를 시작했다. 결국 이 날이 오고야 말았구나.


그날 아침에 어머니께서 봉지에 담긴 와플을 넣어 주셨다. 한국에서는 한 번도 이런 경우가 없어 의아했지만, 외국에서는 으레 쉬는 시간에 간식을 먹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또 다른 점은 태블릿이었다. 태블릿이라니. 한국에서는 스마트폰을 가진 친구들도 잘 없었는데, 이곳에는 수업 시간에도 태블릿을 비롯한 전자 기기를 활용했다. 나는 순식간에 들떴다. 게임, 유튜브, 그간 시간제한으로 못 했던 걸 실컷 할 생각이 먼저 들어왔다.


하지만 부모는 늘 자식보다 앞서는 법. 이미 이중, 삼중으로 락이 걸려 '교육용 앱'외에는 쓸 수가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천만다행이지만 그때에는 그저 아쉬웠다. 그리고 필통, 물통과 공책을 몇 권 넣은 것으로 준비 끝. 이제 학교 갈 시간이다. 태블릿을 제외하면 여기까진 한국과 비슷했다.


그런데 학교에 걸어가는 게 아니었다. 몇 분이 지나자 드라마에서 보았던 그런 형태의 '노란 스쿨버스'가 나를 맞으러 온 것이다. 한국에 으레 있는 버스와 달리 앞부분이 튀어나온 게 정말로 똑같았다. 그리고 그 버스를 타고 학교로 향했다. 가는 길에 오만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이 말 시키면 어떡하지, 가다가 사고라도 나면 어쩌지 등등...


하지만 몇 시간이 지나자 걱정은 대부분 사라졌다. 첫째로는 내가 생각보다 영어를 그리 못 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자기소개도 그럭저럭 했고, 심각하게 걱정한 것과는 달리 선생님의 말씀도 그럭저럭 알아들었다. 둘째로는, 난 혼자가 아니었다. 교실에 들어가니 심각한 표정의 한국 학생들이 몇 앉아 있었는데 모두 나처럼 하루아침에 오게 된 애들이었다. 그중 작년에 청주에서 왔다는 제임스는 나와 잘 맞아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래서 혼자 아무 말도 못 하는 끔찍한 일은 다행히 벌어지지 않았다.

Source: Wikipedia


셋째로는 교실 분위기가 너무 편안했다. 한국 교실들은 앞에 칠판이 있고, 책상에 앉아 교과서로 공부를 했다. 하지만 이곳은 조금 달랐다. 바닥 위 매트에 베개를 베고 누워도 되고, 빈 백(Bean Bag)이라는 소파와 비슷한 물건에 자유롭게 앉아도 된다. 수업도 일방적으로 듣는 방식이 아니라 5명 정도 되는 인원과 토론을 하는 식이었다. 물론 숙제와 시험은 여전히 있지만, 분위기의 차이가 결정적이었다. 어린이집에 돌아온 것 같달까? 혼내거나 재촉하는 일도 거의 드물어 필자는 좋은 쪽으로 충격을 받았다. 같은 학교인데 이리 다를 수 있다니.


한국에서 '나'는 이름보다는 번호로, 자리 위치로 불릴 때가 많았다. 내가 누구인지, 어떤 의미를 가지는 지 생각해 본 적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처음 들어간 문학 수업에서는 '나'를 주제로 책을 만드는 활동부터 시작했다. 자신을 잘 알아야 남도 이해할 수 있다나.


그때는 잘 몰랐지만 그 수업은 나를 크게 바꾸었다. 내 로고를 만들기 시작했고, 그림을 그렸으며, '소설 주간'이라는 것이 있어서 처음으로 본격적인 글쓰기도 시작했다. 그것이 이 브런치스토리에 이르렀으니 국제학교는 내 삶을 바꾼 대사건인 게 맞았다. 만약 여기 오지 않았으면 난 아직도 별 볼 일 없는 사람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니까.


한국어만 쓰던 내 노트에도 영어와 중국어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길거리에서 간식 사 먹기 바빴던 내가 어느새 영어로 알제리와 북아프리카에 대해 발표하는 경지까지 오르게 된 것이다. 동시에 세상이 정말 넓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아프리카부터 동남아시아, 유럽까지 출신지가 다양한 선생님들이 들려주시는 이야기는 1쪽 자리 지식을 3000쪽의 백과사전으로 만들어 주었다. 그야말로 내 안의 산업 혁명인 셈이었다.


물론 위험은 늘 도사리고 있었다. 엄밀히 말하면 난 '조건부'로 입학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일단 중학교는 다니지만, 고등학교 때까지 영어, 수학 성적을 올리지 않으면 진학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열심히 공부한 덕에 그 해 가을 즈음에는 시험을 통과할 수 있었다. 해외 생활도 차차 적응하여 점점 편안해졌다.


그러나 어쩌랴, 이는 폭풍전야에 불과했다는 것을. 물론 대부분의 이야기들은 '행복하게 잘 지내다 귀국했습니다'로 끝날 것이다. 그렇게 끝나는 게 맞기도 하다. 하지만 내년은 2020년, 그리고 난 중국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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