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민이라면 누구나 겪었을 그것.
어렸을 때 해외 생활을 해본 사람이라면, 한 번쯤 정체성에 혼란이 온 적이 있을 것이다. 난 분명 한국인인데 중국 음식을 먹고 미국식 교육을 받다니. 혼란 그 자체다. 이번에는 그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한다.
서드 컬처 키드(Third Culture Kid, TCK)라는 용어가 있다. 이는 어린 시절의 상당한 시간을 본국 밖에서 보낸 사람들을 이르는 말로, 해외에서 살다 귀국한 아이들이나 분명 본국이지만 식민지, 해외 영토 등 특수한 지역에 살다 온 아이들이 대부분이다. 필자 역시 중학교와 고등학교의 일부를 국외에서 보냈기에 여기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이 아이들은 국적은 본국의 문화와 현지의 문화가 합쳐진 독특한 정체성을 지닌다고 한다.
내가 살던 곳은 사실 둘이 아니라 넷이 공존하던 곳이었다. 아, 여섯인가? 어린 시절 살았던 집은 홍콩과의 경계지대에 있어 버스 한 정거장 거리면 홍콩에 갈 수 있는 곳이었다. 홍콩에서 차를 타고 좀 가면 마카오도 나왔다. 문제는 이 세 지역이 문화와 언어가 완전히 다른 곳이라는 것이다. 우선 홍콩은 영국의 영향으로 영국식 영어를 공용어로, 번체자와 광둥어를 사용하고, 마카오는 포르투갈어와 광둥어를, 그리고 본토 중국은 간체자와 보통화를 사용했다. 국경 지대 있던 우리 집은 이 세 문화권에 한국이 더해진 교차점에 있었다. 거기에 미국과 대만 한 스푼까지.
지금은 한국에 온 지 제법 되어서 정체성 혼란은 일어나지 않지만, 여전히 중화권 국가들이 '외국'처럼 잘 느껴지지 않는다. 해외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면 늘 중국 세관을 통과했고, 중국의 명절에는 중국인들이 먹는 월병을 먹고 CCTV 프로그램을 봤다. 그러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 '중국화'가 진행된 것 같다. 물론 같은 아시아국가기에 별 차이는 없지만, 왠지 6, 8, 9처럼 중국인들이 길하게 여기는 숫자를 마주하면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기도 했다. 코로나가 터지기 직전에는 현지인들이 먹는 간식을 즐겨 먹게 될 정도였다. 하지만 그게 그냥 '중국'은 아니었다. 우리가 살았던 곳은 광둥 성으로, 광둥어를 쓰고 딤섬을 먹는 곳이다. 중국이라는 정체성에 '광동'의 문화까지 덧씌워졌다.
그런데 버스를 타고 홍콩을 가면 때아닌 '영국'에 묘한 소속감을 느끼기도 했다. 거긴 영국처럼 이층 버스도 많고, 'Centre', 'Colour'같은 영국식 영어를 쓴 간판이 가득하다. 아직도 남아 있는 영국식 건물들 사이에서 차를 마시고 있자면 저절로 영국인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닌 게 아니라 서양인들도 많고, 버스, 지하철에서 모두 영국식 영어를 하니 결국 조금씩 따라 하게 되었다. 이걸 체감한 것은 싱가포르에 갔던 때였는데, 싱가포르도 한때 영국 식민지였던 탓에 익숙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끝을 장식한 건 대만과 포르투갈이었다. 마카오는 포르투갈식 에그 타르트가 맛있고 물결무늬의 포르투갈식 거리가 반겨 주는 곳이다. 길거리에는 번체자와 더불어 포르투갈어가 쓰여있었다. 골목골목 오래된 가톨릭 성당이 있고, '리스본' 같은 한국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도시 이름들이 거리에 붙어 있었다.
한편, 우리 집에서 몇 시간을 가면 샤먼(廈門)이라는 도시가 나왔다. 그 앞에는 공교롭게도 대만의 관할에 있는 진먼(金門)이라는 마을이 있었다. 중국 대륙에 웬 대만이냐고?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국민당이 대만으로 도주할 무렵 대륙의 약간의 땅을 지키는 데 성공했다. 그중 하나가 진먼이었던 것이다. 샤먼과 진먼 일대를 방문하면 대만에서 쓰이는 민난어를 비롯하여 정통 대만 음식을 맛보는 것도 가능하다.
심지어 학교는 미국식. 노란 스쿨버스를 타고 미국 교과서로 공부했으며, 노래로 미국의 주(州)와 도시들을 외우기도 했다. 핼러윈, 크리스마스는 물론 여러 축제까지 미국식 커리큘럼을 완벽하게 따른 것이다. 총기 사고가 거의 없는 중국임에도 총기 난사를 대비한 훈련까지 할 지경이었으니 말이다. 학교 1층에는 미국 과자 가게가 있었는데, 거기서 파는 과자들은 모두 미국에서 수입한 것으로 즐겨 먹었다. 기실 머리는 미국, 몸은 중국, 음식은 한국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국 내 청소년 시기는 수많은 지역의 문화가 뒤섞인 '혼종' 그 자체가 되었다. 사춘기는 정체성에 혼란을 겪는 시기라 하지 않던가? 이사 한 번만 가도 예민할 시기인데, 난 졸지에 여섯 지역의 경계를 넘나든 셈이 되었다. 그래서 내 필기가 마치 암호문처럼 보이는 걸지도 모르겠다. 내 필기에는 한글, 한자와 영어가 뒤섞여 있어 이를 해독하려면 3개 국어를 알아야 한다. 어쩌면 진정한 의미의 '국제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이를 새삼스레 깨달은 건 대학에 입학해서였다. 고려대 학생들은 '뱃노래'나 '민족의 아리아'같은 지극히 한국적인 응원가를 부르고 소주, 막걸리를 즐겨 마신다. 또 민족의 영물인 '호랑이'를 숭상하기도 한다. 일찍 귀국했지만 코로나 때문에 집에만 있었던 나는 처음으로 대학에서 한국 문화에 제대로 노출된 셈이었는데, 뭐랄까, 이국적인 느낌이 들어 재미있었다. 분명 고국이지만 마치 외국을 보는 것 같은 그런 느낌.
물론 내 삶에서 해외 생활이 차지한 시간은 극히 일부지만, 가끔씩 마파두부와 버블티를 마시며 '고향 추억'에 젖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