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에게도 사랑니가 있다. 다행히 양호한 편으로 인터넷에서 볼 법한 그런 기괴한 모습은 아니다. 하지만 궁금하다. 사랑니는 왜 사랑니일까? 굳이 아프기만 한 이빨에 그런 예쁜 이름을 붙여 줄 필요가 있을까?
국립국어원은 명확히 특정되는 어원은 없다고 한다. 하지만 가장 가능성이 높은 건 '사랑을 알 나이에 나는 치아'라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는 것이다. 과연 사랑니가 나는 시절은 20대 초반, 한창 사랑이 마음 속의 대부분을 차지할 무렵이다 (필자는 아니다!). 사랑니가 주는 통증이 으레 실패로 끝나는 첫사랑을 나타낸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래서 그런지 처음 나는 사랑니는 정말 아프다고 한다.
어디 그뿐인가. '행복', '천사', '사랑' 같은 단어들은 대부분 아프고 힘든 것에 자주 붙는 것 같다. 특히 '천사'는 주로 불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장기 기증을 하거나, 아니면 힘들지만 평생을 남을 위해 산 사람들에 붙는 칭호다. 사랑, 행복 역시 복지원이나 고아원에서 자주 찾아볼 수 있다. 어쩌면, 현실이 힘들기에 그런 말들로 조금이나마 위안을 얻는 것일지도 모른다.
필자는 가끔 그림을 그린다. 이런 삶 역시 위의 언급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필자는 하늘을 나는 풍경이나 예쁜 가을 풍경, 소위 낭만적이라고 여길 법한 그림들을 그리는데, 그것들은 사실 삶에 낭만이 없기 때문에 그린 것이다. MBTI 중 T, 즉 이성적인 기질이 강한 필자는 같은 풍경을 보아도 현실적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내리는 눈을 보면 예쁘다기보다는 '난방이 없는 집은 어떡하지'나 '그러다 나무가 쓰러질 텐데' 같은 생각이 앞선다. 모닥불을 보면 저러다 고기를 태워먹지는 않을까 걱정하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낭만적인 생각은 잘 들지 않는다.
그래서 스스로 낭만적인 풍경을 그려 위안으로 삼는다. 그런 그림들은 대게 현실보다 훨씬 과장되어 있지만, 그 정도는 되어야 '낭만적이구나' 하는 생각이 비로소 드는 것이다. 남들이 일상에서 느낄 낭만을 일부로 창조해야 하는 것이다. 마치 힘든 곳에 '행복'을 붙이고, 아픈 이빨에 '사랑'을 붙이는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