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말 중 하나
출근길에 사무실 근처 논을 보니 움푹 움푹 파인 곳이 보였다.
사무실이 있는 곳은 파주 금촌2동(금릉동) 택지개발지구로 1층에는 식당이나 카페, 설계사무소 등이 있고 위층엔 일반 주택으로 지어진 건물들이 오손도손 모여 있는 동네다. 여기도 여느 곳과 마찬가지로 아파트가 많이 들어서 있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한적한 곳이 더 많다.
사무실 뒤편으로는 논밭이 봉일천까지 이어져있다. 가끔 작업하다 답답할 때면 바람 쐬러 동네 한 바퀴를 도는데 광활하게 펼쳐져 있는 논과 맞닿은 하늘을 보면 잠시나마 위안을 느끼곤 한다. 서울에서는 느낄 수 없는 시골 풍경이랄까. 파주는 아직 빈 곳이 많다. 파주로 이사 오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장마 내 비가 많이 와도 출근길에 보면 벼는 항상 잘 자라고 있어서 내심 벼가 참 대견했다. '그래, 잘 자라야지. 조금만 더 힘 내.' 마음속으로 늘 응원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며칠 전 출근길에 지난 태풍에 벼가 잘 있는지 걱정이 되어 보러 갔는데 이런... 여러 곳이 움푹 움푹 파여 있었다. 내 마음과도 같던 벼의 쓰러진 모습을 보니 마치 내 무언가가 무너진 느낌마저 들었다. 어려운 이 시기에 장마를 잘 견디어 내던 벼를 나와 동일시했었던 것 같다.
'잘 벼텼었는데. 조금만 버티면 가을이 오는데.'라고 생각했다. 모내기할 때부터 조금씩 자란 벼를 계속 지켜보고 있던 나로서는 이렇게 쓰러진 벼가 못내 아쉽고 안타까웠다. 계속 같은 생각이 났다. '조금만 버티면 되는데...' 이 쓰러진 벼를 며칠 동안 봤는데 딱히 다시 세우거나 하진 않았다. 나중에 그렇게 할지 아니면 이렇게 자라도록 놔둘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마음이 계속 좋지 않다. 지나가며 한 번 힐끗 보는 나도 마음이 안 좋은데 열심히 키우던 농부의 마음은 오죽할까. 그래도 다행인 것은 잘 자라고 있는 벼가 더 많은 것이다. 추수 때까지 잘 버티길 바라본다.
폭풍이 지나가며 비가 오다가 해가 뜨다가 오락가락한 날씨였던 날이 있었는데 그 날 내생에 가장 크고 선명한 무지개를 봤다. 사무실 근처였고 자가용을 타고 지나가다 마침 무지개가 보여 아들과 차에서 내려 스마트폰으로 연신 사진을 찍어댔다. 날씨가 그때까지도 조금 흐려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무지개였기에 마음이 다급했다.
완전한 반원은 아니고 위쪽은 구름에 조금 가려졌지만 그래도 이런 무지개는 흔치 않다. 간혹 해외 사진에서나 봤을 법한 무지개다. 사진을 어느 정도 찍고 다시 이동하며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성경에는 무지개가 하나님의 약속의 징표라고 나온다. 노아가 큰 홍수로 온 땅이 물에 잠기고 방주에서 나와 본 것이 무지개다. 언약의 무지개라고도 한다. 다시는 물로 세상을 멸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인 것이다.
성경의 내용과 별개로 과학적으로 무지개는 날씨의 여러 요소로 인해 생겨난다. 하지만 사실이 어떠하든 무지개를 눈 앞에서 본다는 건 큰 행운이 아닐 수 없다. 늘 보던 하늘, 늘 보던 풍경에 거대한 색의 띠가 눈 앞에 펼쳐지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그저 바라보고 감탄할 수밖에.
이 날 본 무지개는 내게 어떤 의미였을까 생각을 했다. 마침 그 날 아내와 아들이 독립 장편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하기로 해서 가는 중이었는데 아마 그 일 때문일까라고도 생각해봤다. 영화 촬영이 순조롭게 이루어질 것만 같은 기분. 하지만 모든 사람이 내 상황과 다르니 그날 무지개를 본 사람들은 각자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무지개가 어떻게 보였을까.
폭풍으로 쓰러진 벼를 보며 안타까운 마음이 들고 폭풍 중에 나타난 무지개를 보며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눈에 보이는 벼와 무지개는 결국 내 마음이 어떠한가를 보여주는 거울이었다. 아픈 마음도 즐거운 마음도 늘 내 앞에 나타났다 사라진다. 결국 좋든 싫든 시간은 흘러가고 난 그 시간의 흐름에 살 수밖에 없다. 쓰러진 벼도 반가운 무지개도 짧은 순간이었지만 내내 많은 생각할 거리를 주었다.
자연에서 배우는 것이 참 많다. 자연은 해야 할 때면 거침없이 하고 잠잠해야 할 때면 한 없이 잠잠하다. 우리 생각엔 변화무쌍한 것 같아도 그때를 가장 잘 아는 것이 자연 같다. 자연스럽게라는 말이 참 어려운 말인 것 같다. 사람이 어떻게 자연스러울 수 있는가. 그렇게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쓰러진 벼가 되어도, 반가운 무지개가 되어도 자연처럼 자연스럽게 사는 법을 배우고 싶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고 그다음 이어지는 많은 일들이 내게 주어진 선물 같은 삶임을. 자연처럼.
자연스럽게.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