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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석 Nov 16. 2021

커피가 익어가는 계절


내 고장 칠 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계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이육사의 시 '청포도'의 한 구절이다. 어릴 적 중학생이던 누나가 외우던 이 시가 참 생경하고 신비로웠다. 난 이 첫 구절이 좋았다. 그다음 구절도 좋았지만 이 시의 서두는 시의 모든 것을 말하는 것 같다.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어떻게 포도도 아니고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는 것일까. 시가 보여주는 것은 눈으로 보는 것보다 넓다. 어울리지 않는 단어가 만나 눈으로 보이는 것 너머 보지 못하는 것까지 보여준다.


커피를 좋아한다. 커피 맛을 안다고 나름 음미하며 마시긴 하지만 아직 커피 맛을 잘 모를 때가 더 많다. 그렇다고 취향이 없는 건 아니다. 풍부한 향과 다양한 맛이 균형 잡혀 있고 입에 머금을 때 부드러우며 마시고 난 뒤 입 속에 좋은 향이 머물러 있는 커피를 좋아한다. 커피를 좋아하지만 커피만 좋아하는 건 아니다. 커피를 마시는 장소 또한 중요하다. 커피 마시기 좋은 장소의 조건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내가 생각하는 건 이렇다. 친절함, 깨끗함, 편안함, 조용함. 이 중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편안함이다. 커피를 마시러 가는 건 쉼을 찾아가는 것과 같다. 커피 한 잔으로 배부르려고 가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해서다. 그깟 커피 한 잔으로 평안까지야 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편안 정도는 어떨까. 난 커피가 정말 편안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편안한 장소에서 마시는 향기로운 커피는 편안을 넘어 가끔 평안을 주기도 하니까.


파주 동산길에 있는 모카 커피 전문점 <두 번째 작업실>


이육사의 시에서 '청포도가 익어가는 계절'이 조국의 광복을 기다리는 희망과 고뇌의 시간을 말했다면 '커피가 익어가는 계절'은 잠깐의 평안을 기대하는 쉼과 위로의 시간이 아닐까 싶다. 현대인들은 커피를 참 많이 마신다. 걸어가면서 마시고, 잠시 쉴 때도 마시고, 누군가 만날 때, 힘들 때, 기쁠 때 커피를 마신다. 커피 없는 대한민국은 상상할 수도 없다. 우린 매일 커피가 익어가는 계절 틈에서 각자의 위로를 찾아 살아간다. 카페에 앉아 있는 처음 보는 얼굴도, 반복된 동작을 하는 바리스타도,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는 나도 커피를 통해 위로를 받는다. 커피가 익어가는 것만큼 우리의 삶도 잘 익어간다면 좋을 텐데 늘 덜 익은 떫은맛이 시시때때로 찾아온다. 그래서 커피가 필요하다. 한 모금의 위로가 필요하다.




그리워하는 마음이 불쑥불쑥 드는 가을을 걷고 있다. 누군가 반갑게 만나 찬 공기를 피해 따뜻한 카페에 들어가 커피 한 잔을 하고 싶은 계절이다. 마음속에 있던 이야기, 고민했던 이야기들을 커피에 담아 잔을 비워간다면 더없이 좋은 날들이다. 얼마 전 입동이 지났다. 겨울과 가을이 서로 뒤섞여 있는 이 시간이 커피를 더욱 익어가게 한다. 마치 좋은 날과 슬픈 날이 늘 혼동되어 있는 것처럼 이 시간이, 이 계절이 짧은 인생이, 커피 한 잔을 애타게 찾게 한다.



#이육사 #청포도 #블루보틀 #두번째작업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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