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장 칠 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계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이육사의 시 '청포도'의 한 구절이다. 어릴 적 중학생이던 누나가 외우던 이 시가 참 생경하고 신비로웠다. 난 이 첫 구절이 좋았다. 그다음 구절도 좋았지만 이 시의 서두는 시의 모든 것을 말하는 것 같다.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어떻게 포도도 아니고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는 것일까. 시가 보여주는 것은 눈으로 보는 것보다 넓다. 어울리지 않는 단어가 만나 눈으로 보이는 것 너머 보지 못하는 것까지 보여준다.
커피를 좋아한다. 커피 맛을 안다고 나름 음미하며 마시긴 하지만 아직 커피 맛을 잘 모를 때가 더 많다. 그렇다고 취향이 없는 건 아니다. 풍부한 향과 다양한 맛이 균형 잡혀 있고 입에 머금을 때 부드러우며 마시고 난 뒤 입 속에 좋은 향이 머물러 있는 커피를 좋아한다. 커피를 좋아하지만 커피만 좋아하는 건 아니다. 커피를 마시는 장소 또한 중요하다. 커피 마시기 좋은 장소의 조건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내가 생각하는 건 이렇다. 친절함, 깨끗함, 편안함, 조용함. 이 중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편안함이다. 커피를 마시러 가는 건 쉼을 찾아가는 것과 같다. 커피 한 잔으로 배부르려고 가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해서다. 그깟 커피 한 잔으로 평안까지야 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편안 정도는 어떨까. 난 커피가 정말 편안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편안한 장소에서 마시는 향기로운 커피는 편안을 넘어 가끔 평안을 주기도 하니까.
이육사의 시에서 '청포도가 익어가는 계절'이 조국의 광복을 기다리는 희망과 고뇌의 시간을 말했다면 '커피가 익어가는 계절'은 잠깐의 평안을 기대하는 쉼과 위로의 시간이 아닐까 싶다. 현대인들은 커피를 참 많이 마신다. 걸어가면서 마시고, 잠시 쉴 때도 마시고, 누군가 만날 때, 힘들 때, 기쁠 때 커피를 마신다. 커피 없는 대한민국은 상상할 수도 없다. 우린 매일 커피가 익어가는 계절 틈에서 각자의 위로를 찾아 살아간다. 카페에 앉아 있는 처음 보는 얼굴도, 반복된 동작을 하는 바리스타도,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는 나도 커피를 통해 위로를 받는다. 커피가 익어가는 것만큼 우리의 삶도 잘 익어간다면 좋을 텐데 늘 덜 익은 떫은맛이 시시때때로 찾아온다. 그래서 커피가 필요하다. 한 모금의 위로가 필요하다.
그리워하는 마음이 불쑥불쑥 드는 가을을 걷고 있다. 누군가 반갑게 만나 찬 공기를 피해 따뜻한 카페에 들어가 커피 한 잔을 하고 싶은 계절이다. 마음속에 있던 이야기, 고민했던 이야기들을 커피에 담아 잔을 비워간다면 더없이 좋은 날들이다. 얼마 전 입동이 지났다. 겨울과 가을이 서로 뒤섞여 있는 이 시간이 커피를 더욱 익어가게 한다. 마치 좋은 날과 슬픈 날이 늘 혼동되어 있는 것처럼 이 시간이, 이 계절이 짧은 인생이, 커피 한 잔을 애타게 찾게 한다.
#이육사 #청포도 #블루보틀 #두번째작업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