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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석 Nov 17. 2021

시금치


어제저녁엔 장모님께서 주신 시금치  봉다리를 꺼내어 삶고 시금치나물을 만들었다.  많을  알았던 시금치가 뜨거운 물에 들어가니 숨이 죽고 부피가 반이나 줄었다. 빠진 만큼의 부피는 어디로 갔을까. 살아  쉬던 식물이었을 텐데 어쩌면 내가  생명을 앗아갔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아진 시금치는 그만큼의 영혼이 빠진 걸까. 나야   맛있다고 먹으면 그만인 반찬인데 이런 생각을 하니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국간장과 참기름, 깨를 넣고 조물조물 무치니 익었던 시금치가 생기가 돈다. 윤기가 흐르고 먹음직스럽다. 간을 보려고 조금 먹어봤다. 조금 싱거워 소금을 쳤다. 이제야 간이 맞는다. 이렇게 만든 시금치가 식탁에 올라왔다. 그렇게 저녁 식사의 건강을 담당하던 시금치는 식구들의 뱃속으로 들어갔다. 작은 싹으로 시작해 누군가의 밭에서 길러졌을 시금치는 우리 집에 들어와 비로소  일을  하고 갔다.



이런저런 힘든 일을 겪으면서 삶이 참 짧다는 걸 느낀다. 오래오래 살 것 같아도 불과 몇십 년 살고 죽음을 맞을 텐데 10년 후를 생각하고 20년, 30년 후를 생각하며 죽지 않을 것처럼 살고 있다. 시금치 한 봉다리는 장모님의 손을 거쳐 내게 와 소임을 다했다. 삶을 돌아보니 난 아직 숨이 죽지 않은 것 같다. 요리가 되지 않았다. 저녁 식사의 고소하고 맛있는 반찬이 되지 않았다. 밭에서 나와 아직 시장에서 떠돌고 있는 것 같다. 누군가의 식탁에 맛있는 반찬이 되어 기쁨을 줄 수 있을까. 그분의 식탁에 올라, 한 끼 풍성한 기쁨을 드릴 수 있을까. 비록 뜨거운 물에 들어가 숨이 죽을지언정 다시 건져져 윤기가 흐르고 고소한 시금치 반찬이 될 수 있을까. 나도 밭에 버려지지 않기를, 누군가의 식탁에 올라가기를, 소임이 소명으로 이어지기를 바라며 오늘도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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